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85화 (185/200)

185화. 아직 순풍

“휴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승리의 함성을 토하고 있지만 내 입에선 다른 것이 나왔다. 맥이 풀린다.

‘실투였어.’

실투 하나가 오늘 경기의 승패를 가른 것 같다. 물론 내 이야기는 아니다.

‘조나단 헌트. 대단하네.’

그는 본인이 타깃으로 몰려 집중 견제를 당하는 와중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 정도 견제였으면 스스로 포기하거나 의욕이 떨어질 만도 한데 그 대신 공략 코스를 좁히고 틈을 노렸다.

홈런을 친 공은 96마일의 인코스 높게 향한 공이었다. 같은 구종을 같은 코스로 던져도 그 투구가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공에 가해지는 힘이 다르고 준비 자세가 미세하게라도 어긋난다. 훈련이란 이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게 사람이다.

다저스 투수는 구속의 일관된 상승을 원했지만 어떤 이유로 다른 공보다 조금 더 크게 어긋났다. 그것이 바로 홈런으로 이어졌다.

‘하아! 결국 실투를 배제할 수 없어서… 구속으로 짓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거네.’

고작 1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 경기에서 1점의 무게감은 보통 경기의 10점쯤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8회 말은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카스트로가 포진해 있는 다저스의 중심타선은 7회에 이미 지나갔다.

‘아! 아직…’

오늘 경기에서 아직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볼넷 3개만 카스트로에게 허용했다.

‘음. 노히트면 노히트인 거지. 별다른 것도 아니잖아. 내가 오늘 같은 게임에서 그런 기록에 신경 쓰는 건 오버지 오버야.’

쓰는 모양이다. 아니라면 이렇게 생각이 돌아갈 리가 없다. 하지만 무시하고 싶다. 난 이미 이것보다 큰 트로피가 두 개 있고, 트로피보다는 반지가 하나 더 있으면 하는 열망이 더 강하다.

현재 투구 수는 86개다. 여기선 가장 합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길을 벗어난다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건 나와는 맞지 않는다. 난 포장된 길 쪽이 돌투성이의 황무지를 걷는 것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것이라 믿는다.

아직 투수코치로부터 교체 시기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노히트 때문인 것 같은데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서로 부드럽게 상황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야구는 개인 종목이 아니잖아. 이겨도 팀으로 이겨야 하는 거지.’

7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8회를 신중하게 마무리하고 9회는 우리 팀 마무리 투수인 체이스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승리에 가까운 길이다.

억지로 투구 수 아껴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킨다고 해서 꼭 좋은 결과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9회에는 다저스 타선이 1번부터 시작된다. 마지막 순간 다저스의 4번 타자인 레오날드 앞에 주자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카스트로에게 주저하지 않고 볼넷을 내어주었던 배경에는 레오날드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쳤다. 다저스가 주저 없이 거액의 장기계약을 했으며 다저스의 간판 등으로 불리는 선수가 레오날드이지만 나에겐 통산 타율 1할 6푼으로 철저하게 약한 타자였다.

그가 빅리그 데뷔 이래 시즌 평균 30개 이상의 홈런과 2할 9푼대를 쳐낸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고의사구에는 통계의 스포츠인 야구에 맞는 철저한 계산이 있었다. 카스트로와의 정면승부보다는 카스트로를 1루에 놓고 레오날드에게 병살타를 유도하는 것이 훨씬 실점 확률이 낮은 플레이라는 결론이 나왔었다.

이건 다저스가 타순을 바꾼다든지 하면 바로 효과가 줄어들 계획이었지만, 다저스 벤치가 타선에서 가장 거액을 받는 간판타자 두 명에게 그러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작전대로 잘 되어 왔지만, 헌트의 홈런과 같은 돌발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걸 감당하기에 1점은 너무 작았다.

‘나도 참! 조금 전까지는 10점 같은 1점이라는 생각이 들더니…’

없을 땐 두려움도 없는데 가진 게 생기니까 별게 다 신경 쓰인다.

후속 타자들이 범타와 삼진으로 물러나 더 이상 공격의 맥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다. 이길 수 있는 최소 요건은 갖추었다. 바로 투수코치에게 내 뜻을 밝히고 마운드로 향했다.

틱-

보기엔 단순한 체크스윙 같았지만 미묘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주 살짝 스친 것 같다. 베그웰이 무리 없이 투구를 잡아낸 걸 보면 공의 궤적도 거의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내 착각인가?’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려는 순간 베그웰이 주심을 돌아보며 어필을 했다. 지금 투구는 존 밖으로 떨어지는 싱커였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배트에 공이 스쳤다면 삼진 아웃이다.

‘두 명이 같은 걸 잘못 봤을 리가 없잖아. 아웃이야.’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음.’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심판이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주심을 바라보던 베그웰이 다시 정면을 주시한다. 그도 이 어필을 길게 가져갈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번 찔러보는 정도였나?’

이러면 풀카운트다. 8회 말 주자 없는 투아웃에서 다저스의 핀치히터를 상대하는 중이다. 다저스가 포수 타석에서 대타를 내었다.

일반적인 팀에서 포수 교체는 강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대로 다저스는 포수의 층이 두터웠다. 투수왕국으로 알려진 다저스이지만 그 바탕에는 유능한 투수를 도와줄 수 있는 포수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현재도 주전에 크게 떨어지지 않은 백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우리 팀은 베그웰을 저런 식으로 교체하는 발상조차 할 수 없다.

‘3할 치는 포수가 흔한 것 아니지. 그나저나 이것 좀 찝찝하네.’

삼자범퇴로 가볍게 이닝을 마무리하고 돌아서야 할 상황에서 늘어졌다. 아직까지 주심의 고유권한으로 되어있는 볼판정에 대해 더 이상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억지로 한다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야구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하나 잡지 못해 이상해지는 상황은 가끔 있는 일이다.

2011년 월드시리즈에서 레인저스는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 있는 상황에서 6차전을 맞이했다. 7:5로 이긴 상황에서 맞이한 9회 말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까지 투아웃이 남은 상황을 만들었다. 여기서 안타와 볼넷으로 1사 1, 2루. 다시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우며 투아웃. 팀 창단 이래 첫 우승까지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기고 있었다.

‘거기서 사건이 생겼지. 우익수를 넘기는 장타를 맞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익수가 무리하게 캐치를 시도하다 그 타구가 3루타가 되어 버렸지. 당연히 펜스플레이를 해서 1루 주자의 홈인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한다. 한 번 삽질을 하게 되면 계속 삽질이 나온다. 이건 경험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다.

레인저스의 삽질은 연장으로 들어간 10회에도 계속되었다. 10회 초 공격에서 2점 홈런으로 다시 2점 앞서갔지만, 10회 말 잘게 썰어간 카드널즈의 단타 공세에 동점 허용. 결국 9회 동점 3루타를 쳤던 프리즈에게 11회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배했다.

‘그런 식의 역전패를 당하고 최종전을 어떻게 이기겠어. 싱겁게 끝나버렸지.’

사건이 일어나고 수습하는 건 하책이다.

‘볼넷은 안 돼.’

틱-

“파울.”

이번엔 슬라이더를 확실하게 존 안으로 집어넣었는데 타자가 어렵지 않게 커트해 낸다.

제프리라는 이 타자 낯설다. 아마 처음 상대하는 것 같다.

‘루키인가? 아님 이적한…’

선구안 좋고 컨택도 된다. 스윙 스피드도 꽤 빨라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수준급 타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그런 실력이라면 진작에 레귤러가 되었겠지.’

장점이 많은 타자다. 배트 스피드에 자신 있으니까 공을 몸 중심에 붙여놓고 치려고 한다. 공도 좀 길게 보는 것 같다.

‘큰 약점이 분명 있겠지만, 지금 그걸 알아볼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음. 내가 이럴 때 치트키가 있어서 말이야.’

내게는 처음 보는 타자는 절대로 골라낼 수 없는 공이 하나 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인코스 스트라이크 존의 상단으로 향하던 공의 궤적이 따라 나온 배트를 피해 더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타자의 경악하는 표정이 날 즐겁게 한다.

‘이런 거 처음 보지? 이건 칠 수 있는 공이 아냐. 골라내야지. 뭐! 네가 주전이 되어서 자주 보게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어쨌든 열심히 해라. 이거 덕담 맞다.’

마운드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으로 향하는데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이다.

“수고했네. 그리고… 음. 고맙네.”

라드 감독이 통상적인 말 뒤에 애매하게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아… 예.”

이 양반도 상당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아주 쑥스러워하는 게 다 드러난다.

‘풋, 고맙다니…. 올드스쿨 스타일치고는 너무 진보적인 말 아닌가?’

“So. 가지.”

아이싱 도구를 준비한 피지컬 코치가 늘상 해오던 것처럼 락커로 가기를 권유한다.

“저기… 오늘은 조금 있다 가시죠. 한 이닝밖에 안 남았는데 경기를 계속 보고 싶네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고. 그럼 점퍼를 입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왜 입으라는 건지는 얼핏 이해가 안 갔지만 긴말하기 싫었다. 일단 시키는 대로 어깨가 식지 않게 입곤 하는 점퍼를 입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럴 때 1점이라도 더 내주면 승리가 좀 더 확실해진다. 그러나 우리 팀의 마지막 공격은 7번 타자부터라 별 기대를 가지기가 어려웠다.

‘음. 역시…’

우리 내야수들의 공격력은 정말 어메이징하다. 이럴 때마다 브렛이 그립다. 그는 지금 화이트삭스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고 상당히 잘나가고 있다.

체이스가 마운드에 섰다. 우리 팀 클로저다.

대외적으로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파워피처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도 아무 때나 100마일을 의도적으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아니다. 컨디션이 좋고 밸런스가 잘 맞는 날 자연스럽게 나오는 구속이다. 즉 시즌 내내 100마일 이상의 구속이 나오는 공은 몇 개 안 된다.

‘90마일대 후반 정도의 구속이 평균적이라고 봐야지. 흐흣. 그런데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세 자릿수가 전광판에 찍히고 있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이러면 다저스의 9회 공격이 아무리 1번부터 시작하는 상위타선이라도 공략하기가 쉽지 않다.

타자 역시 그걸 느꼈는지 일단 타석 밖으로 물러나 숨을 돌리려고 한다.

‘어? 이건…’

“스트라이크.”

사정없이 주심의 콜이 떨어졌다. 그의 손이 타자 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타자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나왔다. 초구에 당황했는지 무심코 타자가 타석 밖으로 나가버렸다. 타임이 나오지 않은 이상 한발만 나가야 한다.

주심이 제대로 지적했다. 이것이 룰이다.

하나가 꼬이면 계속 꼬인다. 그것이 우리 팀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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