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동상이몽(同床異夢)
다저스의 타순이 한 바퀴 돌았다. 1회에 카스트로에게 내준 볼넷이 하나 있을 뿐 아직 단타조차 맞지 않고 있다. 당연히 실점은 없다.
‘좋은 출발이네.’
두 번째 만난 다저스의 1번 타자는 별거 없었다.
세 번째 이닝을 끝내고 더그아웃에 들어와 앉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덮었다. 로스엔젤레스는 10월이 되면 평균 20도 내외의 기온을 유지한다. 9월 말인 지금도 차이를 못 느끼겠다. 즉, 별로 덥지 않다. 그런데 오늘은 1회부터 흥건하게 배어 나오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다.
‘몸이 허해졌나? 서른 갓 넘자마자 이러면 곤란한데…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어야 하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에는 없는 게 없다.
머리를 덮은 수건으로 땀을 닦고 물을 좀 마셨다. 늘어지면 안 된다는 경각심과 이닝을 잘 막아냈다는 안도감이 교차한다. 소위 말하는 큰 경기에서는 체력이 좀 더 소모되는 것 같다.보약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수분 보충을 자주 해주는 수밖에 없다.
앉은 채로 천천히 필라테스의 동작을 응용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목을 돌리고 어깨를 당기고 허리를 푼다. 서서히 평소 호흡이 돌아오고 있다. 깊은 심호흡을 마지막으로 가벼운 스트레칭을 마쳤다.
‘됐어. 아! 또 땀나네.’
이런 식이라면 빨리 마운드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꼭 이럴 땐 쓸데없이 공격이 길다. 단순하게 한 방 딱 날려주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공격을 너무 끌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기려면 점수를 내야지.’
우리 팀만 이번 시리즈가 중요한 건 아니다. 시즌 내내 1위를 질주했던 다저스도 전력을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저스의 선택이 좀 뜻밖이긴 했어.’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말 경주 시합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상대가 똑같이 상등마, 중등마, 하등마가 있을 때 이기는 법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
난 이걸 군에서 통속적으로 사고하는 정형적인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고전을 가장한 대리만족 글에서 봤는데 원래는 사기라는 중국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어쨌든 3전 2선승제에서 두 번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맞대결을 피하는 거라고 되어 있다.
하등마가 출전해 질 확률이 높은 시합을 상대의 상등마와 치르게 해 대적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략 이것이 그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온존시킨 핵심전력으로 상대의 중등마, 하등마를 상대하게 하는 거다.
적극적으로 룰을 이용해 버릴 건 버리고 얻을 것은 얻는다. 이천 년 전 사람도 알았던 간단한 이치를 여기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다저스는 3연전 중 2승이 필요한 게 아니고 1승만 해도 우승을 거의 거머쥘 수 있는 유리한 처지였다.
다저스는 이 3연전에 맞불을 놓았다. 상등마 대 상등마, 중등마 대 중등마, 하등마 대 하등마의 구도를 짠 것이다. 선발 투수는 경기 전 미리 예고한다. 그리고,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선발 로테이션 운용을 조금만 관찰하면 등판순서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건 고의적이라는 거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하게 될 거야.’
예전부터 다저스는 투수왕국으로 유명했다. 긴 역사 동안 유능한 투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지금도 탄탄한 선발진을 보유하고 있다. 제럴드와 위버라는 투수가 원투펀치로 유명하다.
‘그래도 그렇지 걔들이 나와 소르카 급은 아니잖아.’
그들이 우리보다 나은 건 연봉이 좀 높다는 것뿐이라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연봉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세 게임 중 어느 게임이든 한 게임은 이기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나? 아니면 홈경기에서 모양새가 신경 쓰여서? 하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야.’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져줄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일이 이렇게 된 이유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흥행은 성공적이었다. 월요일에 열리는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56,000석에 이르는 다저 스타디움이 만석이다.
‘벼랑 끝 대충돌이니 뭐니 온갖 수식어를 붙여 언론에 그렇게 떠들었는데 자리가 안 차면 이상한 거지.’
이번 이닝 공격에는 내심 기대가 좀 있었다. 아직까지 무안타로 상대 선발 제럴드에게 눌려 있다. 하지만, 타순이 한 번 돌아 가장 득점 생산력이 높은 1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공격 기회였다.
시작은 좋았다. 선두 타자 크리스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공격의 물꼬를 텄다. 2번 알버트는 안타를 쳐내진 못했지만 풀카운트까지 물고 늘어지며 진루타를 쳐 1루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에 보냈다. 베그웰까지도 괜찮았었다. 다시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해 1사 1, 2루가 되었다.
‘이럴 때 르블론이 4번 타자답게 진짜 뭔가를 보여줄 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통상적으로 4번과 5번이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들이다.
‘거기서 삼진을 당할 줄이야.’
투아웃이지만, 주자 1, 2루의 찬스는 여전히 유효했다.
‘헌트가 공을 못 맞혀서 문제지.’
우리 팀 후반기 반격의 주역은 요즘 좀 주춤한 경향이 있다. 내셔널 리그 투수들이 그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요즘 그를 상대하는 투수들은 하나같이 본인이 낼 수 있는 최고 구속의 패스트볼을 던진다. 아마도 운동능력이 떨어져 수비가 잘 안 되는 선수의 배팅스피드가 온전할 리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배팅스피드가 떨어졌을 것이란 생각은 반만 맞았다. 대부분의 타자들이 상대하는 공의 구속이 높을수록 타격에 어려움을 겪는다. 90마일 패스트볼에 비해 95마일 패스트볼을 상대했을 때 타율이 낮은 건 정상적이다.
헌트는 95마일 이하의 패스트볼에 대한 타격에서는 별문제가 업는 것으로 드러났다. 타격 성적이 통산적인 평균치를 상회했다. 그런데 97마일 이상에서는 극단적으로 타율이 떨어졌다. 컨택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 사실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운동능력의 하락으로 배팅스피드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긴 선수 생활의 경험으로 그 부분을 보충해 아직은 상당히 괜찮은 타자라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약 94마일이니까 그 정도면 아직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선발 투수 중에서 97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제구해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아주 소수다. 마무리 투수 중에는 좀 있는 편이지만 그들은 지고 있을 때는 나오지 않는 단 1이닝짜리 투수일 뿐이라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구속을 높여 던질 수 있다와 그것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다만, 오늘 다저스의 선발 제럴드가 97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제구할 수 있는 소수의 투수란 게 문제일 뿐이다.
‘어쩐지… 화이트삭스에서 그런 트레이드를 순순히 하는 게 수상하긴 했어.’
해가 갈수록 운동능력의 저하는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아직은 헌트의 타격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일지는 미지수다.
‘아직은 쓸만해 보일 때 미리 보낸 건가?’
볼카운트는 투볼 투 스트라이크. 상대 투수 제럴드의 평속은 95마일대. 그도 의식적으로 구속을 올리는 것이 어색한지 완벽한 제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 두 개가 빠졌다.
‘이기려면 점수가 필요한데… 아직은 좀 어렵나?’
다음 공의 구종은 뻔하다. 존 안에 들어오면 헌트가 쳐낼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래서 기대감 역시 바닥이다.
‘이번 이닝에 꽤 많이 던지지 않았나? 풀카운트 승부가 두 번에다 베그웰은 볼넷. 르블론에게도 5개인가 던졌고 지금도… 스물 몇 개쯤은 되겠네.’
이 정도면 타자들은 할 만큼 한 것 같다. 점수 낸 것 못지않게 잘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한 줄기 흰 선이 깨끗하게 존을 가로질렀다. 헌트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쩝! 할 수 없지. 제럴드의 투구 수가 지금 60개가 좀 넘었으니까 6이닝이 끝이겠네.’
신경을 갉아먹는 이런 게임은 체력소모가 심하다. 투구 수 백 개 이상은 어렵다. 그렇게 던지고도 또 나온다면 그건 환영이다.
‘구위가 떨어진 투수가 이름값 하기는 아주 어렵지.’
한 점이라도 내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이제 내 차례야.’
꽤 오래 쉬었다. 어느새 쏟아지던 땀이 말랐다. 호흡도 굉장히 안정적이다.
‘2번부터 시작인가? 조심해야겠네.’
1회에는 범타로 잘 막아냈지만, 이젠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상대 타자는 더그아웃에서 몇 이닝 동안 내 투구를 관찰하고 나름 분석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타자였지?’
좀 오래 쉬었더니 머리가 하얗게 되어 있었다. 경기를 풀어나가는 리듬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게임 준비를 잘하는 투수라도 상대 선발 라인업 모든 선수의 분석리포트를 기억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2번 타자라면 분명히 세심하게 훑어봤을 텐데 쉬는 동안 머리가 리셋된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라면 쉽지.’
그러나 그 선수가 어떤 코스와 구질에 강했는지 약점은 어느 곳에 있고 타격 스타일은 어떠한지. 루상에 나갔을 경우 주루플레이의 유형 등 마음먹고 파야 한다면 알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운드로 걸어 나가며 떠올랐던 잡생각들이 마운드에 오른 순간부터 딱 멎었다. 이제 승부의 시간이다. 기억나는 게 없어도 상관없다. 난 단체종목을 하고 있고 이런 순간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눈앞에 있다.
로진 주머니를 만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 긴 생각은 불필요하다. 투구 자세를 취하고 베그웰의 사인대로만 던지면 된다.
“스트라이크.”
초구를 슬라이더로 시작했다. 존 안으로 공을 꽂아 넣었다. 타자는 배트를 내지 않았다.
‘패스트볼 높게.’
“볼.”
‘응? 왜 스윙을 안 하지?’
신중하게 노림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데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웃 코스. 싱커 낮게.’
계속 구종을 바꾸고 대각선 방향으로 공의 위치를 조정하고 있다.
틱-
파울이 되었다. 배트 끝에 공이 스쳤다. 공은 타석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날아갔다.
‘좀 더 중심에 가깝게 맞아야 땅볼이 나오는데…’
볼카운트는 원볼 투 스트라이크,
‘이건 뭐지? 인코스 낮게 패스트볼?’
내 마음이 점점 경기 템포에 젖어 들고 있다.
틱-
투심성으로 오른쪽 타자의 몸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공 끝이 배트의 중심을 피했다.
“그래 이거지!”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3루수 테일러가 대시 후 타구를 잡아 강력하게 1루 송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웃.”
1루심의 치켜 올라간 손이 반갑다. 풀어졌던 긴장감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문제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