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82화 (182/200)

182화. 가성비가 중요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번 시즌 지구 우승의 향방이 결정될 다저스와의 3연전을 오늘부터 치러야 한다. 경기 시작 전부터 우리 선수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무슨 포스트 시즌 치르는 것 같은 분위기네.’

정말 이런 건 올 시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9월 한 달간 승률 7할 5푼을 넘기는 미친 기세를 보인 우리 팀이었지만, 선두 다저스와의 승차는 두 게임이 유지되고 있었다.

‘정말 징글징글한 다저스야.’

시즌 후반기가 시작되었던 7월 중순 5게임 차이 나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따라붙은 셈이지만, 이제 정규시즌은 단 6게임만이 남았을 뿐이다. 우리 팀이 승리를 거듭했지만 다저스도 못지않게 페이스를 유지해 왔다.

‘세상만사가 다 비슷하지. 절대적인 게 있기는 할까? 무엇이든 우리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상반기의 부진 때문이지만 이제 와 곱씹을 일은 아니다. 그냥 다저스와의 3연전을 스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2승 1패의 위닝시리즈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승차를 하나밖에 못 줄인다. 자력 우승이 불가능해진다. 이번 시리즈가 끝나도 세 게임이 남지만 거기서 그 승차를 극복한다는 것은 요행수다.

한 게임 뒤진 채 최종 시리즈에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3연승으로 그 시리즈를 스윕하더라도 다저스가 남은 잔여 경기에서 1승 2패를 하면 동률, 2승 1패를 하면 반 게임 차로 2위에 머물게 된다.

‘다저스와의 마지막 시리즈에서 3연승을 하는 것이 승차를 앞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게 결론인 건가?’

원정경기라는 게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원하는 모든 조건이 다 들어맞는 곳을 현실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건 사이버스페이스 안에만 존재하나 봐. 현실의 공기와 닿으면 변질되는 왜곡된 것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부분은 만약 우리 팀이 지구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와일드카드 1위는 거의 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6게임을 남긴 현재 우리 팀은 106승을 거두고 있다. 남은 게임에서 우리 팀이 전패를 하고 와일드카드를 노리는 팀들 중 일부가 전승을 한다면 동률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우리 팀이 남은 경기에서 1승만 더 추가하면 그 희박한 확률마저도 없어진다. 어떻게 흘러가든 우리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은 확정이 되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다.

‘문제는 와일드카드로 진출하면 곤란하다는 거지.’

우승하더라도 5전 3선승제의 디비전 시리즈로 직행하는 건 내셔널 리그 3개 지구 중 승률 1, 2위 팀만 가능하다. 남은 게임에서 최대한 많이 이겨서 와일드카드 시리즈를 치르는 일을 피해야 한다. 정말 아주 갑갑한 상황에 몰렸다.

‘이런 결과는 대충 예상 가능했었지. 하지만 예측한다고 해서 꼭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상황에 밀려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이번 시즌의 초반 부진으로 지난 정규시즌과 같은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시즌 시작 후 처음부터 잘했어야 했었다.

선발투수진의 효율적인 운용이 후반기 선전의 바탕이 되었다. 우리 팀의 가장 큰 강점을 그렇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올 시즌 우리 팀은 포스트 시즌 준비와 같은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못했다. 후반기에 그렇게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도 아직 지구 1위는 손안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뒤늦게라도 반전이 이루어져서 다행인 거지.’

팀 정비 이후 빡빡한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쳐 그것을 뚫어내야 했다. 그렇게 버텨내고 고비를 넘어 여기까지 왔다.

‘사실은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게 최상의 결과일지도…’

그 와중이었지만 이번 시리즈를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는 해냈다. 등판 순서를 여러 경기 전부터 조금씩 조정해 1선발에서 5선발까지 순차적으로 남은 6번의 경기에 등판할 수 있도록 선발진의 로테이션을 맞췄다.

난 오늘 경기에 등판하고 시즌 마지막 경기 전까지 확실한 순위 결정이 안 된다면 마지막 게임에도 등판해야 한다. 만약, 남은 경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와일드카드 시리즈를 치러야 한다면 포스트 시즌 시작부터 과부하가 걸릴 것이 너무 뻔하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5연승을 해 그때 상황을 살핀 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등판을 하지 않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 등판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마지막 경기 등판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간다면 우리 팀은 나의 등판이 없이 포스트 시즌 첫 시리즈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첫 시리즈부터 그렇게 허덕이면 요행히 이겨서 올라가더라도 점점 투수진 운용이 어려워진다.

‘결국엔 지난 포스트 시즌 우리를 상대했던 팀들 꼴이 나게 될 수도 있지. 그런 상황은 무조건 피해야 해.’

시작이 중요하다. 오늘 경기는 무조건 이긴다.

‘어! 조용해졌어.’

게임 중의 경기장은 늘 어떤 식으로든 소음에 휩싸여 있다. 관중 개개인의 작은 소리가 모여져 때로는 큰 방향성을 만든다.

‘이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나 보네.’

***

‘아니…’

베그웰이 계속 사인을 바꾸고 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볼 배합에 내가 머리를 흔드는 일은 좀처럼 잘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쉽게 다음 공을 던지기가 어렵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두 번의 거부 후에야 겨우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를 위한 준비 동작에 들어갔다. 피치 클락이 눈에 거슬린다. 공정한 판정을 위한 그 장치가 지금은 오히려 투구를 방해하고 있다. 조금 아슬아슬할 것 같다.

“스트라이크.”

심판의 콜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별다른 동작이 없는 걸로 봐서 투구 제한 시간을 오버하지는 않은 것 같다. 20초라는 제한시간을 넘었다면 볼이 선언된다.

보통은 그 제한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한 템포로 투구를 해왔다. 그렇게 훈련되어 있다.

‘이거 좋지 않네. 리듬이 느려졌어.’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설치된 타이머의 숫자가 다시 늘어나고 있었다. 매 투구마다 다시 세팅되어 동작하는 기계지만 이럴 땐 많이 부담스럽다.

“볼.”

이렇게 피치 클락이 의식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평소 대부분의 내 투구는 15초 이내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었고 곁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게임이 부담스럽니? 월드시리즈 최종전도 별 탈 없이 치러냈는데 이 정도에… 내가 시계를 본다고 시간이 안 흐르는 것도 아니고…’

빠각-

신경을 거스르는 불협화음이지만 이건 반가운 소음이다. 부러진 배트 조각이 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공은…’

작은 바운드를 일으키며 2루수 앞으로 구른 공을 크로포드가 경쾌한 스텝으로 대시하며 잡아냈다.

“아웃.”

1루심의 손이 가볍게 올라갔다. 여유 있는 차이로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 화려하진 않지만 견실한 수비. 이것이 최상이다.

러닝스로우니 하는 것이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수비의 풋워크가 좋다면 거의 나오지 않아도 되는 기술이다. 정지 상태에서 송구를 하는 것이 움직이며 하는 송구보다 당연히 정확도가 높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저런 스텝이야말로 고급기술이지.’

한동안 브렛에 밀려 내야 유틸리티의 역할을 맡았던 크로포드였지만 후반기부터 다시 2루수의 역할을 다해주고 있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좋은 수비였어.’

1루수 필에서 공이 다시 내게로 넘어왔다. 스코어보드에 두 개의 아웃카운트가 선명하다. 주판에게 공을 바꿔 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포수에게 천천히 공을 던져 주었다.

‘뭐! 이러면서 한숨도 좀 돌리고 하는 거지.’

룰을 어떻게 만든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방법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야구는 불완전한 사람이 하는 게임이다.

‘그 불완전성에서 재미가 나오는데 근본을 부정할 수가 있겠어?’

우아아- 짝짝짝…

오늘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에게서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호! 카스트로. 반가워.’

다저스의 3번 타자 카스트로가 타석에 등장했다. 여전히 카스트로는 내 천적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관중의 기대 섞인 반응을 보면 이런 사실이 상식으로 굳어진 것 같다.

그건 기록상으로도 나타난다. 그는 올 시즌 나를 상대로 15타석 8타수 3안타다. 타율로 말하면 4할에 가깝다. 그중에 홈런도 하나 있다. 나머지는 다 볼넷으로 보냈다. 카스트로는 15번의 맞대결 중 10번을 출루했다. 엄청난 출루율과 타율이다.

‘특정 투수와 타자에게 이런 기록이 또 있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단체 경기에서 개인 기록이 모든 상황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그냥 참고 상황일 뿐이지.’

난 올 시즌 5번 있었던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우리 팀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즌 초반 한 번을 제외하면 나머지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되었다.

야구에서 출루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잔루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프로야구는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점수가 필요하다. 카스트로의 출루는 대부분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난 전략적 선택을 한 거야. 개인적으로도 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백번을 양보해 개인적으로 밀렸다고 하더라도 야구는 단체 경기라고. 개인의 승리라는 건 있을 수 없어.’

카스트로와의 승부는 대부분 철저하게 게임의 승패와 관계없는 상황에서 나왔다. 5:0으로 이기고 있는 9회에 맞는 솔로 홈런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거 보면 다저스 벤치도 머리가 굳었어. 내가 감독이었으면 진작에 타순을 바꿔서 1번으로 냈을 텐데… 제일 출루확률이 높은 타자가 자주라도 나와야 할 거 아냐. 계속 이대로가 좋아요. 부탁 좀 할게요.’

타격 준비를 갖추면서 카스트로가 싱긋 웃는다. 내 고의사구에 초반의 그는 열을 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리그 최고의 투수가 자신을 피한다는 게 타자로서는 자랑일 수 있다.

‘음. 도발의 의미로 웃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구.’

1회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다. 베그웰에게 슬쩍 주먹을 쥐어 보였다. 신호는 포수에게서 우리 벤치로 넘어갔고 어김없이 고의사구 의사가 주심에게 전달되었다.

정해진 각본대로 얼굴이 벌게진 다저스의 4번 타자는 유효타를 쳐내지 못했다.

삼자범퇴 같은 사자범퇴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려는데 벌써 등이 축축해진 것이 느껴진다.

꿩 잡는 게 매다. 어떻게 생겼든 어떤 방식을 취하든… 꿩을 잡을 수 있으면 매다. 맹금류의 왕으로서 모양새가 좀 떨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최대한 룰을 활용해 승리를 챙길 수 있다면 그 길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게 프로의 미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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