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운칠기삼
“하나 쳐!”
“그거 아니지. 아! 커크. 공 좀 끝까지 봐!”
“그래 그거야.”
경기 후반 대타로 나선 선수가 안타를 쳐냈다. 발로 만든 안타였다. 어설픈 스윙은 제대로 공을 맞히지는 못했지만, 빗맞아 내야로 평범하게 흐른 공에도 불구하고 1루로 전력 질주해 안타를 만들어 냈다.
‘상당히 빠르네. 아무리 왼손 타자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 타구에 1루로 가기는 어려운데… 역시 루키라서 그런지 파이팅 넘치네.’
말린스와의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 8회 현재 스코어는 7:2로 우리 팀이 넉넉하게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 안타 하나가 그렇게 중요한 시점은 아니었지만 활기찬 선수들의 응원과 환호가 더그아웃에 메아리친다.
우리 불펜은 여름 이후 점점 안정을 찾았다. 지금은 그 심했던 기복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특정 선수에게 과부하가 걸리던 등판 간격이 많이 개선되었다. 역시 휴식이 답이었다. 그 결과 지금 이 정도 점수 차라면 거의 뒤집기가 불가능하다.
9월이 되면서 마이너에서 대거 콜업된 선수들로 더그아웃이 시끌벅적해졌다. 소위 말하는 40인 로스터의 본격적인 운용이다.
그동안 선수 유입을 위해 팜(Farm)을 황폐화시켰기 때문에 올릴만한 선수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여전히 마이너리그에 선수들은 넘쳐났다.
“활기차서 좋긴 해.”
“그전에도 우리 선수들은 활발했었어.”
완연한 상승세를 타고 있는 팀 분위기가 그동안 보이지 않던 소르카를 더그아웃으로 불러낸 것 같다. 지난 시즌에는 자신의 투구일 이외에도 거의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보던 소르카는 올 시즌 자신이 하던 원래의 투구 루틴으로 돌아가 더그아웃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것과는 좀 다르잖아. 풍기는 기운이 아주 신선 그 자체야.. 팜에 선수가 없니 어쩌니 하더니 하는 거로 봐서는 예년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풋. 그건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는군.”
쓸데없이 예리하다. 평균적으로 더럽게 못한다는 걸 좀 꼬아서 말한 거 맞다. 앞에서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관점에서는 다 도토리 키 재기였다.
몇 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지만 콜업되어 바로 잘했던 선수는 알버트 이외에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우리 팀 한정이다. 내가 자이언츠에서 3시즌째인데 팜에서 키워져 콜업 후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알버트가 유일하다.
‘트윈스에서는… 음. 내가 그 유일한 하나였었네.’
이 정도면 그 하나를 예외로 봐야 한다.
내 트레이드 때부터 유망주 유출이 자이언츠에서 본격화되었다고 하던데 내 상대로 트윈스로 보내졌다는 그 유망주들조차 아직 메이저리그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카스트로 때나 이번 헌트 때 보낸 선수들은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마이너 성적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유망주 순위니 뭐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포텐이 터지는 유망주란 로또 같은 것이라는 생각뿐이다. 아주 예외적인 몇몇을 제외하면 콜업 후 누가 빅리그에서 적응할지는 예측이 안 된다가 내 결론이다.
AA나 AAA까지 올라왔다는 것 자체부터 재능의 총량이 떨어지는 선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콜업된 선수들은 모두 기본적인 자질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성공사례가… 어휴! 생각만으로도 갑갑하네. 난 마이너에서 콜업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지? 아! 내가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였던 것 같네.’
억지 칭찬으로 현실을 오판하게 하는 것보다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 실질적 도움이 되겠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기회가 널리 주어졌다는 표현이었어. 상위권 유망주라고 불리던 선수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팀에서 나가게 되었으니까 그다음 순위에게 콜업의 기회가 일찍 주어진 거잖아. 그걸 살리려는 노력이 좋아 보여서 한 말이야.”
“음. 당연히 그렇겠지.”
전혀 믿기지 않지만 네가 그렇다니 굳이 따지지 않겠다는 태도다.
“네가 보기에 누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말 돌리기는 대부분의 경우 잘 먹힌다.
“가능성이야 누구든 다 있지. 다만 여기는 가능성을 보여야 하는 곳이 아니잖아. 주어진 기회에 실적을 내야지. 지금 유틸리티 내야수 자리가 비었잖아. 헌트가 내야를 볼 수 있긴 하지만 수비 부담을 주긴 어렵지.”
헌트는 트레이드 후 지명타자 자리에 고정되면서 전 소속팀에서보다 모든 타격지표가 상승했다.
“화이트삭스에서 뛰면서 부담감을 많이 느꼈었나 봐. 장기 고액 연봉자 노릇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야. 여기서는 그 정도의 팀플레이 기여를 요구하지는 않잖아. 딱 자기 몫만 해내면 되지.”
그가 한때 골드글러브급 내야수기는 했지만, 우리 팀이 그걸 보고 그를 영입한 것은 아니다. 그도 요즘 잘되지 않는 수비보다 타격에만 힘을 쏟는 것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자신의 경기 리듬을 지키기 위해 수비를 해야 한다는 선수 유형도 있는데 헌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팀이나 자신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그래서 헌트가 아예 수비를 안 한다고 생각하면 내야 보강이 필요해. 그래서 이번에 내야 포지션 선수들을 많이 올린 거고. 저 난리가 난 거야.”
소르카가 더그아웃에서 웅성이는 한 무리의 선수들을 눈으로 슬쩍 가리키며 말을 맺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대타로 안타를 쳐낸 선수 역시 포지션이 내야수였던 것 같다.
“투수 쪽은 어떤 것 같아?”
내가 훈련 때 봤던 몇몇 선수들은 공이 좋아 보였다. 소르카의 관점은 어떨지 궁금했다.
“아직 실전에서 던진 선수가 거의 없어서… 판단하기가 좀… 당장 기존 투수들을 밀어낼 수준의 선수는 아직 못 봤어. 연습 투구 때 구위 자체는 훌륭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안 되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건 그렇다. 기본적인 구위가 떨어지는 투수가 콜업되었을 리가 없다. 그들의 문제는 빅리그의 투수들 누구나 다 그렇다는 거다. 정말 100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수시로 던질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면 구위만으로 가산점을 받기는 힘들다.
‘요즘은 100마일로도 안 되려나? 그런 투수들이 많아져서…’
이곳은 루키들만의 경쟁 장소가 아니라 루키가 기존의 주전을 밀어내어야 하는 곳이다. 드러난 능력이 같다면 경험 많은 선수를 쓰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결국 없다는…”
1루 주자가 2루로 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허! 애매하네.’
사실 애매하지 않다. 5점 차이 정도에 8회라면 거의 무관심 진루(defensive indifference)로 기록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왜 뛰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루키가 열심히 하려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대 팀의 감정을 건드리면 괜한 분란이 일어날 수 있다.
말린스의 포수는 2루로 송구하지 않았다. 멋진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를 짚은 주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표정한데 어찌 보면 당황한 얼굴로 보이기도 한다.
“쟤 이름이 뭐야?”
“난들 알겠어. 루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네. 아무리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지만 야구선수로 몇 년인데 지금 상황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뛰었다는 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지금 무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 하나는 알겠군.”
루키가 메이저 경기 첫 출전에 지금 상황을 잊을 만큼 흥분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빠르긴 하네.”
“그러게 말이야.”
수비가 어떨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웬만큼만 한다면 대타나 대주자 전문으로 써도 될 만한 발이었다.
“그는 아론 커크라고 해. 아직 어려 22살. 커크가 단독으로 도루한 게 아니야. 사인이 나갔어. 2루로 뛰라고. 감독이 그의 주루능력을 보고 싶었나 봐.”
우리 좌석 앞쪽에 앉아있던 필이 뒤를 돌아보면서 알려준다. 우리 대화가 한 줄 앞 정도까지는 들리는가 보다.
“그래?”
벤치에서 작전이 나올만한 때가 아니었기에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아직 우승 경쟁을 해야 하는 팀 사정상 상당수 루키들을 콜업했지만, 경기에 기용하기는 꽤 어렵다. 지금 이 경기처럼 거의 승패가 조기에 확정되는 경기가 나와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시즌 종료까지 35경기가 남은 현재 지구 1위인 다저스와의 승차는 2경기다. 남은 경기수도 꽤 되고 아직 다저스와 3연전이 한 번 남아 있기 때문에 루키들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경기가 많지 않았다.
“커크는 AA에서 발로 유명했던 선수야. 출루가 되면 거의 3루까진 프리패스였다고 하더군.”
‘그 정도까지 빨라 보이지는 않았는데…’
조금 의외의 이야기였다.
“우리 팜이 메말랐다는 이야기가 한참 전부터 돌았잖아. 커크란 저 친구가 22살이면 마이너에 최소 3~4년은 있었을 텐데 그런 유망주가 있다는 이야기가 왜 알려지지 않았지?”
그런 특징적인 강점이 있는 선수라면 유망주 랭킹에도 올랐을 것이다. 야구는 단체종목이다. 5툴이니 해서 올라운더의 가치를 높게 쳐주지만 특별한 부분이 하나만 있어도 그 부분의 스페셜리스트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게 좀… 내야 수비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고 타격 문제가 심각하지. 저 친구 출루의 절반이 내야안타야. 나머지는 볼넷이고. 싱글 A까지는 그럭저럭 견뎌냈는데 더블 A에서 출루율이 3할을 밑돌았어. 타율은 처참한 수준이고… 도루 기회도 출루를 해야 생기는 거잖아.”
“타격이야 경험이 쌓이면 나아지지 않을까? 요즘 좋은 코치들 많잖아. 내야안타를 양산할 만큼 발이 빠른데 조금만 배트 컨트롤이 받쳐주면 되는 거잖아.”
“그런 생각을 누군들 안 해봤겠어. 그런데 커크 저 친구는 근본적으로 스윙 스피드가 느려. 구속이 90마일 초반만 좀 넘으면 따라가질 못해. 그의 신체 능력은 다리에만 몰려있나 봐. 싱글 A 코치가 그걸 극복하려고 오랫동안 만든 스윙이 저건데 저걸로 더블 A에서 2할 2푼밖에 못 쳤다구.”
거기서 그 정도라면 빅리그에서 버텨내기는 아주 어렵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빅리그 콜업은 어려웠을 친구야. 더블 A에서 좀 버티다가 야구 커리어가 끝났겠지.”
콜업 우선순위 후보들이 너무 짧은 기간에 없어져 버렸기에 생긴 공백기가 그의 콜업 조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해마다 계속 어린 유망주들은 충원된다. 그래서 앞을 가로막은 선수들이 어떤 이유로 사라져도 뒤에서 올라오는 선수에게 추월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는데 그의 지난 경력을 봐서는 그에게 정말 대운이 깃들었던 것 같다.
“그럼 감독은 다 알면서 왜 콜업을 한 거죠?”
“들리는 이야기론 구상하는 작전 야구에 필요한 선수들을 테스트하는 거라는데… 자세한 건 이야기를 안 하니 알 수가 없지.”
우리 팀 공격은 소총부대 치고는 도루가 적다. 발 빠른 선수가 적지 않지만, 타율 높은 선수들이 많아서 도루와 같은 작전을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 구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규시즌용은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