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고진감래(苦盡甘來)
‘어렵게 지나갔네.’
자이언츠에서 세 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그중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상반기가 끝나자마자 올스타전에 참여하고 하루 쉬었다. 예전부터 올스타전 참여에 대해 큰 매력을 못 느끼고 있기도 했었고, 이번에는 팀 사정도 별로 좋지 않아서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올스타전의 의의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불참을 선언하고 싶었다. 7월에는 더블헤더도 여러 경기 있었고 아주 분주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 30경기나 치러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왔지.’
말 그대로 참석만 하려고 했는데 한 이닝 던지라고 해서 억지로 투구도 했다. 이벤트성 경기를 진지하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별로 의욕이 나지 않는다.
배부른 자의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특히 후반기의 대반격이 필요한 현재 팀 사정을 생각하면 다른 일에 정신이 분산되는 것이 싫었다. 우리 팀은 지난 30경기에서 18승 12패를 거두어 점점 지난 시즌 모습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트레이드의 영향이 컸나? 어쨌든 50승 고지에 오르고 전반기를 마칠 수 있어 다행은 다행이었어.’
이제 서부지구 2위에 올라섰다. 1위인 다저스는 60승 고지에 올라 승차는 5게임 차이다. 다섯 게임 차이를 따라잡으려면 우리가 다섯 번을 이길 동안 다저스가 다섯 번을 져야 한다. 이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미 탱킹 모드에 들어간 팀들이 생겼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전력투구하는 팀들은 승률이 전반기에 비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희망은 있다. 다른 지구 팀이라면 아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같은 지구라면 경우가 다르다. 시즌 끝까지 다저스와 우리는 아직 9번의 맞대결이 남아있다. 여기서 7승 2패를 하면 승차가 없어진다.
‘3연전 세 번을 모두 위닝 시리즈로 끝내야 하네. 그중 한 번은 스윕해야 하고… 음.’
이제 곧 8월이다. 이번 시즌 일정은 10월 첫 번째 토요일에 마치도록 짜여 있다. 시즌 종료까지는 두 달이 조금 넘게 남았다. 남은 게임 수는 72게임.
“뭘 그렇게 생각해?”
‘아! 드로이넨이 있었네.’
가벼운 러닝 후 같이 휴식을 하던 중이었다.
“생각보다 다섯 게임 차이를 뒤집는 게 만만하지 않은 것 같아서…”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 올해 다저스는 기복이 없어서…”
다저스의 올 시즌 페이스는 지난 시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연패가 확실히 없어졌다. 긴 연승 없이 6할 6푼 6리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팀은 까다롭다.
“카스트로의 가세가…”
“시즌이 끝나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아마도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렇지만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어. 아직 게임은 많이 남았고 이 정도 승차가 뒤집히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야.”
“그래?”
우리 팀이 어느 시기에 미친 듯 이겨내는 페이스를 보여야 뒤집기가 가능할 것 같은데 드로이넨은 너무 긍정적으로 말한다.
“그럼. 무너지려면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기도 하지. 2007년 메츠는 잔여 경기가 17게임 남은 9월 13일까지 2위였던 필리스에게 7게임 차로 앞서고 있었어. 이 정도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렇지. 그 정도면…”
“메츠는 이후 벌어진 17게임에서 5승 12패를 했지. 특히 마지막에 벌어진 필리스와의 3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면서 끝장이 나버렸지.”
“17게임에서 5승은 너무했네. 그건 자멸이잖아.”
그건 선두를 질주하던 정상적인 팀에서 나올 수 있는 수치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그렇다. 그런 경우는 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도 일정을 보니까 마지막에 다저스와 3연전이 잡혀 있던데… 흠. 적어도 지금 우리 사정이 그때 필리스보다는 낫잖아. 그때 필리스는 마지막 17경기에서 13승을 해냈지만 최종전을 승리하고서야 지구우승을 확정 지었어.”
“어째 말이 좀 이상하네. 우리 팀만 잘해서 우승하기는 어렵다. 상대의 난조가 필요하다. 결론이 이거야?”
“그런 셈이지. 지금 우리 팀 승률이 0.555잖아. 다저스가 0.666이면 1할이 넘게 차이가 나는 건데 당연하지 않겠어?”
참 곤란한 이야기다.
‘남이 못되는 걸 바라야 한다니… 당당한 승부 이런 건 야구 만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건가?’
“그나저나 넌 괜찮아? 왜 오늘 던진다고 한 거야? 이럴 거 같으면 올스타전에 불참을 하든 그랬어야지.”
“후반기 반격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잖아. 조금 불편한 점이 있어도 감내하는 수밖에…”
“참! 너도 어지간해.”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갔다. 오늘 경기 내가 던지겠다고 먼저 말한 건 아니다.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끝낸 후 감독으로부터 후반기 일정이 이러이러하니 첫 게임 등판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내 마지막 등판일이 전반기 종료 전 게임이었고 올스타전 일정 3일 그리고 하루를 더 쉬었다. 5일 휴식을 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렵다.
‘거절이 봉쇄되었는데 부탁의 범주는 아니지 않나?’
올스타전에서 1이닝 던진 거야 좀 다른 유형의 불펜투구라고 생각하면 쉽다. 연습 투구까지 해서 30구 정도 던졌다. 난 몸이 빨리 풀리는 유형의 투수다. 일부러 그 정도에 맞췄다. 나도 생각이란 걸 하고 산다. 미리 일정까지 들었는데 몸 상할 짓을 스스로 하지는 않는다.
드로이넨이 본 것과 실제의 내용은 좀 다르다. 하지만 그걸 굳이 알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후반기 첫 경기는 로키즈와의 홈 3연전으로 시작한다.
아직 조나단 헌트가 합류하고 나서 치른 경기 수가 적어 통계로 말하긴 어렵지만, 느낌으로는 팀 득점이 좀 늘어나긴 한 것 같다.
‘뒤집을 수 있어.’
첫 단추를 잘 끼워야겠다는 마음뿐이다.
***
“역시 So는 대단하군요. 팀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선수예요. 오늘 등판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면이 있죠. 올스타전 등판 이후 하루 쉬고 바로 나오는 건 좀 무리수가 아닐까 싶네요. 그가 올스타전에서 1이닝 14구를 던졌지만, 사실은 그것만 던진 것이 아니거든요. 선발투수가 정상적인 투구를 하기 위해선 불펜에서의 예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오늘 등판이 바람직한 건 아니죠.”
자이언츠의 후반기 첫 홈경기는 홈팀이 잘 풀어나가고 있었다. 1회부터 2득점 하며 야구 중계에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인지 해설자의 코멘트가 느긋하게 나왔다.
“말씀드리는 순간 로키즈의 9번 포수 젠킨스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3회까지 3번의 삼자범퇴 우리 에이스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존에 들어오는 좋은 슬라이더였습니다. 올 시즌 So의 투구 내용에 변화가 좀 있었습니다.”
“어떤 변화인가요?”
공수전환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다. 캐스터 그래엄이 슬쩍 그라운드의 상황을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슬라이더의 사용 빈도가 늘어난 것이 대표적이죠. 지난 시즌까지 So의 투구에서 슬라이더의 사용은 10%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올 시즌에는 20% 정도까지 늘어났죠. 더군다나 주로 유인구로 사용하던 슬라이더를 존에 넣기 시작하면서 타자들에게 싱커와 슬라이더 이중고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아직까지 연투의 영향은 없어 보입니다만, 그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이 갑자기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죠. 다만 무리는 누적되죠. 그러다 어느 순간 한계치를 넘으면 폭발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 영향이 없다고 해도 아직 시즌은 두 달 이상이 남았습니다. 더군다나 포스트시즌을 생각하면 석 달, 아니, 넉 달 가까이 더 던져야 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엄이 고개를 돌려 해설자 윌리엄을 바라보며 웃었다. 바로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번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은 불확실해 보였지만, 짧은 기간 동안 상황이 많이 변했다. 지금은 지구우승은 장담하기 어렵지만, 최소 와일드카드는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굉장히 반가운 말씀을 주시는군요. 넉 달 가까이라면 너무 길게 잡으시는 것 아닌가요?”
투구해야 할 날이 넉 달 가까이 남았다는 건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야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글쎄요. 예상이니까요. 그런 건 희망적일수록 좋은 것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 팀의 원투펀치를 비롯한 선발진은 건재합니다. 승수는 지난 시즌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평균자책 등 다른 지표상으로는 아직도 최상위입니다. 이건 단기전에서 굉장한 강점입니다.”
“하핫. 윌리엄 해설위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길 저 역시 간절하게 기원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분위기 환기는 지역 방송국이 하는 편파 중계의 필수요소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지금의 코멘트는 그래엄 캐스터의 진심이 엿보이는 것 같아 윌리엄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3회 말 자이언츠의 공격이 다시 상위타선에서 시작되는데 이번 이닝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점수를 좀 더 내줘서 So의 교체 시기를 가급적 당길 수 있는 여유를 벤치에게 줘야 하겠습니다. 시즌 길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자이언츠의 공격은 2번 타자 알버트로부터 시작합니다. 초구는 볼. 외곽으로 많이 빠지는 패스트볼이었습니다. 몇 점 정도면 벤치가 5회에 So를 내릴 마음이 들까요?”
“그걸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4점 차이 정도면 일찍 내려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어떨지… 아! 알버트 2구 타격. 강한 타구가 투수 옆을 스쳐 센터 방면으로 빠져나갑니다. 선두타자 중전안타로 가볍게 출루합니다.”
그래엄은 점점 가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경기를 했다 하면 꼬이기만 했던 이번 시즌이었는데 최근 자이언츠의 경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지난 시즌의 경기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연속 안타가 터집니다. 역시 베그웰. 올 시즌 출발은 조금 애매했지만, 이 안타로 이번 시즌 들어 처음 3할 타율을 넘어섰습니다. 최근 다섯 경기에서 5할을 치며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그웰이 애매하지는 않았죠. 2할대 중후반의 타율을 꾸준히 쳐주는 포수가 그리 흔하진 않죠. 지난 시즌 MVP를 받은 것 때문에 기대치가 너무 과도했던 거죠. 어쨌든 트레이드 이후 타선의 밸런스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나타나고 있네요.”
“하하. 애매했다는 표현은 취소하겠습니다. 잘못된 표현이었던 것 같네요. 늘 자기 몫을 해주던 베그웰 선수로 정정하겠습니다.”
불붙은 자이언츠 타선이 폭발하고 있었다. 4번 타자 레블론까지 3연속 안타로 1점을 얻었고 무사 1, 3루로 이어지던 찬스에서 5번 타자 헌트의 희생플라이로 다시 1점으로 복잡하지 않게 점수를 뽑아냈다.
“하핫. 원아웃 1루에서 4번 레블론의 도루까지 나오네요. 초반부터 완전히 로키스를 압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