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거래의 법칙
“베그웰, 브렛이 트레이드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알아?”
“알지. 시즌 초부터 나돌던 말인데 좀 지나면 없어질 줄 알았더니 점점 더 확실한 것처럼 소문이 커지고 있잖아.”
베그웰이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경기를 승리로 마친 후 원정 경기 숙소로 쓰는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한가로운 대화라니 더할 나위 없는 일정이다.
“알면 왜 그런 얘기를 안 해줬어?”
“?”
“아까 게임 중에 테일러하고 잠깐 몇 마디 나누었는데 그런 소릴 하더라고. 다 아는 이야기인 것처럼 말해서 되게 무안하더라.”
승리 후의 휴식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오늘은 좀 더 특별한 것 같았다. 오늘 경기는 6회에 완전히 승세를 잡아 완승을 해버렸다. 기세를 탄 타선이 7, 8회에 연달아 폭발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글쎄, 그런 이야기를 괜히 뒷담화하는 것처럼 우리끼리 하는 게 우습지 않아? 그리고 그 널리 퍼진 이야기를 네가 몰랐다는 게 좀 놀랍네.”
“그거야… 뭐…”
대답할 말이 얼핏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요 몇 년 사이 삶을 너무 단조롭게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조금 반성하는 마음이 든다. 재계약 등 내 주변의 제반 문제가 거의 해결된 후부터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내 선수 생활이 길게 봐줘야 10년도 채 안 남은 게 현실인걸, 그 뒤에는 하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줄 텐데…’
미래는 모르는 것이라 하면서 외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직 마흔은 먼 현실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난 바보가 아니다. 다가올 현실을 직시하며 살고 싶었다.
주변 일에 어두운 것에 대해 조금 변명을 하자면 야구선수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내 노력이 그 원인이다.
‘나도 사람인 이상 원초적 욕구가 없을 수가 없지. 나도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고…’
정말 지긋지긋한 저염식 말고 보통 사람들이 먹는 것으로 식사했으면 좋겠고, 가끔 맥주 한잔하면서 수다도 떨고 싶다. 하지만 욕구에 따라 하나를 시작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하게 될 것 같아 아예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도저히 선별적으로 내 욕구를 제어할 자신이 없다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평균 정도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을 애초에 난 타고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관리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는 몸은 된다. 때마침 야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난 그것을 선택했다.
야구를 중심으로 짜여진 내 생활에 남의 이야기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런 삶에서 다른 선수의 일이 내 관심사가 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관심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알았든 몰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브렛의 수비가 흔들리면서 나에게 직접적 영향이 오고 있다. 이것이 내게 닥쳐온 현실이다.
“그런 루머 따위가 선수에게 영향을 주는데 왜 프런트에서 가만히 있는 거지?”
정말 이걸 모르겠다.
“진짜 트레이드하려고 하는가 보지. 낙엽이 지면 겨울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베그웰은 태연했다.
“뭐?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정말 그런 거라면 어리석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해.”
“왜?”
베그웰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왜라니… 브렛은 팀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내야수잖아. 2할 중반을 치며 공격에 도움이 되는 내야수를 팀 사정이 조금 어려워졌다고 트레이드시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든 레귤러 플레이어로 유지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너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베그웰에게 이렇게 답답한 일면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정말 눈앞만 보고 있다.
“착각이라니… 지금 트레이드 말이 나오는 게 지명타자를 데려오려고 그 카드로 브렛을 쓰려 하는 거잖아. 내 얘기는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야.”
누가 트레이드의 목적에 대해 알려주진 않았지만,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한다. 지명타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를 희생시켜서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네 말대로 브렛이 내야수로 라인업에 존재하는 게 팀 전력에 플러스 요인일 수는 있어. 하지만, 우린 지금 지명타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만약 카스트로와의 계약이 잘 이루어졌다면 우린 아주 좋은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기존의 팀 전력을 유지하면서 취약 포지션 보강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어.”
지금 이 말이 맞다. 잘 알면서 왜 앞에 딴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지명타자는 좀 더 기다렸다 구해도 되잖아. FA로 나오는 선수를 하나 사면되지. 그럼 내년 시즌의 우리 전력은 환상적이지 않겠어?”
“이상적인 말이지만 하나가 빠졌잖아. 올 시즌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고려가 빠졌잖아. 우린 지난 시즌 우승팀이야. 리빌딩을 할 수 있는 팀이 아니라고. 우리가 올 시즌을 지금 정도의 성적으로 마친다면 팬들이 그냥 보고 있을 것 같아?”
그런 문제가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린 상승세를 탔다.
“후반기로 갈수록 좀 더 나아지지 않겠어? 오늘 하는 걸로 봐서는 알폰소가 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고, 오늘 경기를 이겨내면서 팀 분위기도 바뀌었잖아. 이대로 쭉 간다면 지금 상황은 좀 어렵지만 어떻게든 지구 1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최소한 와일드카드라도 확보하겠지.”
“확실해?”
묘한 뉘앙스가 있는 질문이다.
“뭐가?”
“지금 넌 모두 희망으로 가득한 가정을 전제로 해서 말을 하고 있잖아. 그 가정이 잘 안됐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건데…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야. 알폰소가 나아져? 그럴 수도 있지. 암! 그렇지. 그 희망과 가능성을 놓지 못해 대개는 코가 꿰여 끌려다녀. 현실적으로는 안 될 가능성이 수십 배는 높지만 조금의 가능성이 희망 때문에 아주 크게 보이기도 해.”
아주 비관적인 생각이었다. 본인이 무한 긍정의 힘으로 지금 자리까지 왔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사람은 희망으로 살 수 있지만 우린 야구팀이야. 목적이 다르다고. 팀은 이겨야 하고 그렇게 수익을 창출하고 팀 가치를 높여야 해. 그게 프런트의 목적이야.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도 그들이 지지. 미래는 약속될 수 없어.”
“음…”
“그래서 네 생각은 브렛을 트레이드시켜도 어쩔 수 없다. 이거야?”
베그웰의 말도 전혀 터무니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미래를 팔아 현실을 사자는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야.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택할 수도 있다고. 그게 현실적이지.”
“그럼. 네가 생각하는 현실이 뭔데? 지금 말하는 것 들어보니까 넌 브렛이 트레이드되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베그웰의 말을 듣다 보니 프런트가 그리는 팀의 모습이 조금 보이기는 한다. 브렛을 보내고 적당한 타자를 구한다면 작년 모습에 거의 근접한 전력이 되긴 할 것 같다. 물론 카스트로 급의 타자가 오진 않겠지만 브렛보다는 훨씬 나은 타자가 오긴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우승전력이 되는 건가? 아니지. 카스트로급은 아닐 테고 적응 기간도 필요하니까… 작년만은 못하겠네.’
어떤 식으로든 지금 전력보다 훨씬 강해지긴 할 것 같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브렛은 크로포드라는 대체자원이 있잖아. 원래 2루수가 위치를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개인적으로는 브렛이 안타깝긴 해. 상황만 좀 받쳐줬으면 본인이 편안해하는 팀에서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건데…”
말은 아주 냉정하게 하더니 생각은 다르다니 조금 어이가 없어지려고 한다.
“지명 타자를 대체하기에는 타격 지표 향상이 너무 애매하고 수비적으로도 크로포드라는 기존 자원을 압도하지 못하지. 물론 우리 팜에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카스트로 트레이드 때 다 소진되어 버렸잖아.”
“그건 그렇지.”
브렛 개인적으로는 더러운 상황에 걸린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지명 타자를 데려올 만한 적당한 카드가 지금 그밖에 없다고. 아마 적당한 타자가 나타나면 그와 마이너에서 한둘 정도 붙여서 보내지 않을까 싶어.”
안정된 수비력을 갖추고 타격이 어느 정도 되는 유능한 내야수는 귀한 존재다. 더군다나 연봉도 그렇게 높지 않다. 우리 팀이 오랫동안 찾았던 존재가 나타나자마자 그것 때문에 팀을 떠나야 할 상황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브렛을 탐낼만한 리빌딩 팀들이 좀 있긴 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알폰소도 마이너행인가?”
“그렇겠지. 아직 그는 메이저 레벨이 아닌 것 같아.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시즌 시작부터 40경기 이상 나왔을 거야. 그 정도면 기회는 넘치도록 주어진 거지. 그럼에도 레벨업이 안 된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아주 냉정한 평가다. 이것에는 내 생각도 비슷하다.
“그래도 오늘 그 홈런은 깜짝 놀랐어. 그게 넘어갈 줄이야. 사실은 그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나니까 평가를 좀 달리해야 할 것 같더라고.”
“플루크(fluke)였다고 생각해. 그런 희망이 사람 잡는 거야.”
“너무 독하게 말하는 것 아냐? 아직 애한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잖아.”
베그웰이 어떤 선수를 두고 이렇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들은 것 같다. 그는 바닥에서 올라온 본인 경험 때문인지 선수의 가능성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관점에서 말하곤 했었다.
“그는 근본적인 타격 스타일에 문제가 있어.”
“왜? 배드볼 히터라서?”
“아니, 그건 그럴 수 있지. 잘 치기만 하면 그건 컨택 능력이 뛰어나다는 방증(傍證)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팔이 길다던가 하는 신체 능력을 잘 이용하는 건데 문제없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알폰소는 배팅 스피드도 좋잖아.”
그는 외견상 신체 능력도 준수하고 상당히 좋은 타자였다. 단 하나 컨택이 안 된다는 것만 제외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브레이킹 볼에 대한 약점만 극복되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그게 좀… 배트볼 히터의 종류에도 여러 유형이 있잖아. 그의 문제는 선구가 안 된다는 게 가장 크다고 봐. 사실은 배드볼 히터가 아닌데 배드볼 히터처럼 보이는 거지. 그는 보통 중남미 선수들에게서 보이는 안 좋은 점을 다 가지고 있어.”
‘이거 지역 차별적 관점인 거였어?’
우리끼리니까 괜찮지만, 상당히 위험수위의 발언이다.
“그게 뭔데?”
“거기 애들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려면 일단 스카우터들 눈에 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공을 잘 쳐야 하거든. 볼넷 이런 걸로는 주목받기 어려우니까 일단 치고 보자는 식의 타격이 많지. 그게 습관화되어서 배드볼 히터 유형이 되는 거야.”
“그래서…”
“그는 버릇이 더럽게 들었어. 간단하게 말해서 타격 어프로치 교정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