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문제해결의 특효약은 승리
“이런…”
1사 후에 안타를 하나 쳐냈지만, 다음 타자가 바로 삼진이다.
2사 1루.
‘1점 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공격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지금까지 상대 투수 뉴컴으로부터 5안타를 뽑아냈다. 거의 매회 출루가 이어졌다. 그러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상대의 스플리터에 번번이 당하고 있었다. 마지막 고비를 넘길 듯 못 넘긴다.
오늘 9번 타자로 출전한 알폰소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한숨부터 나온다.
‘휴우! 점수 나긴 글렀네. 에고, 어린 애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 앤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해 1할 6푼 2리를 치고 있다. 덕분에 타순이 밀리다 밀리다 이젠 9번까지 왔다. 얼핏 든 생각에도 이건 아니다 싶다. 지명 타자가 9번을 치는 팀이라니 어이가 없다.
‘아니지. 1할 타자를 경기에 계속 기용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 프로는 열심히 하는 선수를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선수를 써야 하는 거라고.’
그의 노력이 개인적으로는 안쓰럽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마이너리그든 어디든 잘 찾아보면 저 이상의 타율을 올릴 선수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왜 쟤한테만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오늘은 다음 이닝까지만 하자고.”
투수 코치가 슬며시 다가와 오늘 내 역할아 다음 회에 끝남을 알려준다.
“예.”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다. 에이스라고 불리면서 두 점 뒤진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이러면 시즌 2패째가 되는 건가? 12번 등판에 5승 2패라…’
지난해에 비해 평균자책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2 미만이다. 내 기량은 지난해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표가 조금씩 안 좋아진 것은 나의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팀의 문제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 크다.
‘자기합리화가 너무 심한 건가?’
기록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그런 건 사이영 상 받을 때나 필요할 뿐이다. 이젠 그런 것에 별로 연연하고 싶지 않다.
‘받아 봐도 별거 없더라고. 은퇴할 시점까지 보장을 받았으면 그 몫을 해내야 하는 건데…’
투수 분업이 확고해진 요즘 투수에게 과거보다 승수의 의미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에이스라고 불린다면 적어도 이길 상황은 만들어주고 내려와야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내 역할을 못한 거야.’
그 이유를 분석하면 수십 가지는 나올 것 같지만, 이런저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빠각-
이런저런 생각의 틈을 가르고 묘한 타격음이 들렸다.
‘빗맞았네. 쩝! 이럴 때 뜬금포라도 한 방 나오면 좋은데…’
아직도 쓸데없는 기대를 하고 있다니 내 꼴이 처량하다.
“어… 어…”
주변 선수들에게서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탄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 반응이 왜? 이건…’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침 타구가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돔구장 천정에 맞을 듯 높이 솟구친 타구의 궤적이 이상하다. 타구의 질을 보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슬금슬금 펜스를 향해 뻗어나간다. 완전히 빗맞았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입이 안 다물어진다.
‘나 참! 저거 넘어가네.’
더그아웃의 억눌린 감탄사는 곧 환호로 변했다.
“우아아! 정말 힘 하나는…”
“야! 뭐든 무슨 상관이야. 홈런이잖아, 동점 홈런. 잘했어! 알론소!”
“OK! 이거지. 이젠 뒤집자.”
“좋아. 아주 좋아.”
모두 일어서 알폰소를 맞아들였다. 그도 그 예전의 홈런들과는 다르게 환하게 웃었다. 힘찬 하이파이브가 오고 가고 환성이 터진다. 나도 그 행렬에 끼어 감사를 전했다. 갑자기 더그아웃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패전의 위기는 넘긴 건가? 어렵네. 어려워.’
확실히 홈런타자의 가치는 남다르다. 도저히 출전시키기 어려운 1할 중반의 타율임에도 불구하고 벤치가 알폰소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홈런은 그 자체로 점수가 된다. 이건 상대 투수에게 상당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선행주자가 있으면 득점이 더블이 되지.’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1점을 얻기 위해서는 3개의 단타가 필요하다. 만약 2사에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3할 타자들이 계속 타석에 들어선다 해도 3안타가 연속으로 나올 확률은 대략 3.7%밖에 안 된다. 그만큼 단타로 득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3할에 30홈런을 치는 타자의 경우 홈런을 칠 확률이 단순계산으로도 5%가 나온다. 타자가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뛰면 대략 600타석쯤 되는데 대입하면 그런 수치가 된다.
2사에 주자 1루의 상황을 대입하면 여기서 연속 3안타가 나와 점수가 될 기댓값은 0.074점이었다. 그러나 홈런은 0.1점으로 약 36% 차이가 있다.
이런 확률을 계산한 기대 득점표라는 게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조금 전 상황인 2사 1루의 상황에서 장타가 나올 확률을 포함한 득점의 기댓값은 0.243점이었다. 하지만 홈런으로 2점이 들어왔다. 홈런의 가치란 그런 것이다.
‘홈런의 가치도 다 같지는 않아. 아웃카운트별로 다르고 주자가 어디에 몇 명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져. 예를 들어 무사 3루에서 나온 홈런과 2사 1루에서 나온 홈런이 같을 수가 있겠냐구.’
홈런에 의한 득점의 가치를 통계적으로 정리해 객관화된 수치로 표시한 기대 득점 모델이라는 것도 있다.
‘3가지 아웃카운트와 8가지 주자 상황을 조합하면 24가지 경우가 나오지.’
각 경우별로 기대 득점이 달라진다. 투런 홈런이라고 다 같은 투런 홈런이 아니다. 지금은 투런의 경우 중 가장 영양 만점의 홈런이었다.
‘복잡한 이야기니까 이만 생략이야.’
아무튼 홈런 타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이게 결론이다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홈런의 수혜를 입으니 알폰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다. 벤치에서 알폰소를 놓지 못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아직 콜업하면 안 되는 애를 끌어올려서… 쯧쯧. 마이너에서 한동안 더 담금질했어야…’
만약 그랬다면 본인도 힘들어하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피곤한 이런 상황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적응이 좀 더 쉬웠을 것 같다.
따악-
‘엉? 이게 무슨 일이야?’
투런 홈런의 흥분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백투백 홈런이 터졌다. 그것도 시즌 평균 홈런이 한 자릿수인 1번 크리스에게서… 상대 투수인 뉴컴이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것 같다. 행잉성의 슬라이더가 가운데로 쏠렸다.
동점으로 한숨 돌려 만족하고 남은 한 이닝을 잘 던질 궁리나 하려던 참이었다.
‘풋. 정말 이 경기 다이나믹하네.’
꼬이고 꼬인 경기가 풀어지려면 이렇게도 된다. 좋아서 웃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이 터졌다. 이런 식의 역전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응? 작년에도 별로 없었나? 하긴 우리 팀이 역전승을 많이 만들어 내는 팀은 아니지.’
지난해 한창 좋았던 시즌에도 우린 지키는 야구를 하던 팀이었다. 선취점을 내고 투수력과 수비력으로 추월을 허용하지 않는 팀이었지 추월을 해야 하는 팀은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더그아웃은 열광의 콘서트장처럼 변해 버렸다. 흥이 오른 선수들의 고함 소리가 메아리친다.
“정말 미치겠네.”
크리스가 개선장군처럼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크리스!”
“크리스!”
모두들 팝스타에 열광한 소녀들처럼 그를 맞아들였다.
‘이거 뉴컴이 맛이 갔겠는데… 여기서 바꾸려나?’
투수 교체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이번 회에만 3안타를 맞고 그중에 홈런이 두 개라면 교체되어도 이상할 건 없는 것 같다.
우리 더그아웃이 뒤집힌 것과는 상관없다는 듯 백스의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 나갔다.
‘역시 교체네. 오히려 교체 타이밍이 좀 느린 건가? 차라리 투런 맞았을 때 바로 교체를… 음. 이건 너무 결과로 평가하는 건가?’
무표정하게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투수의 뒷모습이 조금 짠해 보이기는 한다. 사실 조금 전까지 상대 투수는 너무 멀쩡했었다. 투런 홈런의 장면도 투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정말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인생이나 야구나 거기서 거기야. 오늘 나름 잘 던졌는데 좀 안됐어.’
감상은 여기까지다. 상대 팀의 불행은 우리 팀의 행복과 맞닿아 있다. 특히 나의 소중한 승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너무 느닷없이 벌어진 일인데 구원투수 준비나 되었을지 모르겠네.’
누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이 분위기에 맞이해야 할 우리 타선이 2번부터다. 지난 시즌 3할에 20홈런을 쳐 신인상을 받은 타자부터 지난 시즌 수위타자. 거기에 30홈런을 친 4번 타자가 줄줄이 등장한다.
투 아웃이지만 여기서 기세를 탄 우리 팀을 멈춰 세우기엔 어떤 투수든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알버트가 관건이겠네. 그에게 한 방 더 맞으면…’
공수전환 되면 바로 나가려고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일어서 대기 중이었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가기도 애매해졌다. 하지만 이런 건 얼마든지 괜찮다.
‘잘하면 이기려나? 요즘 뒷문이 조금 불안하긴 한데 이 기세라면… 음. 12번 등판에 5승은 너무 적었지. 오늘 이기면 6승. 에구구, 설레발은 안 돼. ’
교체되어 마운드에 올라가는 투수를 보면서 설렘은 더 커졌다. 빠른 공을 가진 중견 소리를 들을만한 투수이긴 한데 평균자책 3점대 후반을 기록하고 있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이럴 거면 왜 바꿨는지 의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투수보다는 뉴컴이 몇 배는 나은 투수였다.
따악-
“허억!”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야구 격언대로의 스윙이었다. 벼락같이 휘둘러진 알버트의 배트에 맞은 공이 새까맣게 떠올랐다. 맞았을 때부터 바로 알았다. 2층으로 된 외야의 최상단을 직격하는 초대형 홈런이 나왔다.
백투백에 다시 투백이다.
“이거 뭐야. 갑자기 다들… 허허헛.”
설마 했다. 삼연타석 홈런으로 달아나는 점수까지 만들어 냈다.
‘오늘 경기 이기겠네. 이 게임을 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다시 환영 세리머니… 이건 아무리 자주 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백스가 다시 투수 교체를 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가기로 했나 보다.
“베그웰. 한 방 더 부탁해!”
“후하하 그게 되겠어? 백스 애들 운다. 베그웰 살살 하라고.”
농담이 나올 만큼 우리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완전히 풀어졌다. 마치 지난 시즌 한창때처럼.
우리 공격의 기세를 베그웰은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더 바라면 욕심이 과한 거지. 난 이걸로 충분하다고.’
홈런 3방으로 간단히 경기를 뒤집고 작년 우리 팀이 잘하는 포지션으로 복귀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나도 그렇고 우리 선수들은 지고 있는 경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젠 제일 잘했던 걸 하면 되겠네.’
확실히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맞나보다. 어지럽던 머리도 또렷해지고 조금씩 빗나가기도 했던 제구가 척척 된다.
6회 말을 깨끗이 막아내고 의기양양하게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