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76화 (176/200)

176화. 난국(亂局) (3)

“무슨 일이 있어?”

내 물음에 테일러가 오히려 눈을 크게 떴다.

“몰랐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물으면 어쩌란 말인가!

“뭘 몰라?”

“그동안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왔어? 아니, 외국에 있었어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거기서도 신문기사 정도는 볼 수 있고…”

테일러가 제대로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신문? 그런 걸 요즘 누가 봐?”

영상도 축약본으로 보는 시대에는 너무 아날로그한 단어다.

‘한글로 되어 있는 짧은 글도 잘 안 읽는데 영어로 된 신문기사 같은 걸 보겠어? 세 줄 요약이라고 좋은 것도 있고…’

내가 영어 문맹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꼭 하는 건 아니다.

“정말 어이가 없네. 신문은… 그건 그렇고 브렛의 트레이드설이 나돈 지가 한참 됐잖아. 누가 이런 말 안 해줬어?”

“그거 지금부터 네가 해주면 되겠네. 너에게 처음 듣는 말이야.”

진짜 그 비슷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 곧 7월인데 거의 결정될 시기가 되었잖아. 본인은 이적이니 뭐니 아무 생각이 없고 우리 팀에 그냥 있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가 거의 사실인 것처럼 돌아다니면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있겠어?”

“그래?”

브렛이 트레이드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가 바라던 공격이 되는 내야수를 얻었는데 그런 선수를 왜 트레이드시킨다는 거지? 우리 팜 출신의 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선수인데… 언제는 그런 내야수 한 명 갖추는 게 소원이던 팀이 왜 그런…’

트레이드 대상이 지명타자로서 지지부진한 알폰소라면 그렇거니 하겠는데 이제 재능이 개화되어서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선수라니 이해를 못하겠다.

‘그냥 루머겠지?’

원래 여름 앞두고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아다닌다. 진짜로 트레이드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여름이 지나면 소문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이 봤다.

‘프런트가 미치지 않고서야… 하긴 메이저리그에 말도 안 되는 트레이드가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긴 하지.’

프런트가 항상 올바른 판단만 내렸다면 베이브 루스가 레드삭스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자신의 커리어를 다저스에서 끝냈을 것이다.

“그게…”

“에고, So. 나가야겠어. 남은 이야기는 경기 끝나고 해야 할 것 같네.”

궁금한 것을 좀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우리 팀의 공격이 끝나 버렸다. 4번 르블론이 볼넷을 얻어내 2사 만루를 만들었지만, 5번 타자 필이 삼진으로 득점의 희망을 날려버렸다.

0:1로 뒤진 상태 그대로 다시 마운드에 올랐지만, 대화에 정신이 팔려 우리 팀 공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지 별로 아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1점이야 어떻게든 내겠지.’

트레이드 얘기를 들은 탓인지 1, 2루 간을 바라보기가 되게 껄끄럽다. 이럴 땐 내가 투구 시에 3루 쪽을 바라보는 오른손 투수인 게 다행스럽다.

‘가뜩이나 싱숭생숭한 사람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낭설인지 진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럴 땐 브렛을 좀 쉬게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벤치가 너무 무심한 것 같다.

나도 실책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포장만 번드르르한 말을 그에게 했다. 내용에 진심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진심이랍시고 가리는 것 없이 실책 조심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면 과연 내 진심이 전해졌을까?’

지금 생각하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정말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해버렸다. 사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 브렛은 제대로 새겨듣지 않겠지만 내 입장은 다른 법이다.

‘그냥 신경 꺼야겠네. 그냥 편하게 던져야겠어. 오늘은 몇 점 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맞나 봐. 그런 경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야구 경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이닝이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번 이닝은 흐름이란 부분에서 특히 중요했다. 경기의 승리를 위해서는 계속해서 점수가 나는 흐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만일, 이번 회에 상대 팀이 추가 득점을 해낸다면 겨우 꺾은 기세가 다시 불타오를 수도 있다.

‘그건 안 되지.’

나도 참 모순적인 사람이다. 언제나 놓으려 하지만 끝내는 집착의 질곡에 갇혀버리고 만다.

지난 이닝 상대의 공격을 5번 타자에서 끊었기 때문에 이번 이닝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이닝일 수 있다. 원래라면 난 하위타선을 상대로 좀 더 적극적으로 던진다.

사람들이 보통 메이저리그급 타자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난 그 표현에 등장하는 메이저리그급에 하위타선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메이저리그의 타자들도 기량 차이가 몹시 크다. 배치된 타순을 보면 대개 그 기량 차이가 보인다.

나의 스트라이크와 볼 비율은 통계상 6:4 정도이지만. 상위 타선을 상대할 때는 유인구 승부가 늘어나기 때문에 스트라이크보다 오히려 볼이 많다. 그건 하위타순 상대로는 스트라이크가 극단적으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던지면 대개는 쳐낸다. 배트 중심에 맞추지 못하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볼을 건드리긴 한다. 그 결과 극단적으로 땅볼 타구가 많아진다. 투구 수 조절이 저절로 된다.

‘이거 2루수 쪽으로 가지 말라고 기도라도 해야 하나?’

여기서 무리를 하기는 싫었다. 하위타순 타자들을 상대로 투구 수가 늘어나면 길게 던지기가 어렵다. 평소에 하던 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첫 구를 던졌다.

틱-

“파울.”

6번 타자의 배트가 날카롭게 돌았다. 대개 6번에서 9번까지를 하위타순으로 분류를 한다. 7, 8, 9번은 보통 수비 부담이 많은 선수가 맡는다.

6번은 좀 애매하다. 타격이 강한 팀의 경우 클린업 트리오에게 쏠린 투수의 견제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 경우 득점권 타율이 높은 선수가 배치된다. 하위타순에서는 가장 잘 치는 타자다.

‘정말 잘 치면 진작 상위타순으로 갔겠지.’

오늘 같은 경기에서 특별히 신경 쓰고 싶지 않다.

틱-

“파울.”

파울의 연속이다. 이게 저들의 한계다. 안 치면 스트라이크이니 안 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정도 기량의 선수가 내 공의 무브먼트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그게 감당이 되면 6번이 아니라니까.’

메이저리그에서 빌빌거리는 타자들도 마이너리그에서는 다 배리 본즈였다. 그랬던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대개 브레이킹 볼 공략이 안 되어서다.

마이너에도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는 많다. 오히려 투수들의 평균구속은 마이너리그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런 투수들이 마이너에서 계속 머무르는 이유는 세컨 피치 혹은 서드 피치의 숙련도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구종이 다양하지 않으니 당연히 패스트볼 위주의 피칭을 할 수밖에 없고 타자들은 실전에서 브레이킹 볼을 상대해 볼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런 상태로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어 본 적도 없는 변화구를 상대해야 한다. 더군다나 그중 정상급의 투수는 콤비네이션을 구사한다. 변화구를 쳐낼 수 있는 소수의 선수들만 정착을 하고 대부분은 다시 마이너행이다. 그 기준의 끝에 걸린 선수들이 하위타순의 타자들이다.

대부분 기본적으로 변화구에 약점이 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현란한 무브먼트를 가졌다고 하는 나 같은 투수의 공을 어떻게 제대로 치겠는가!

나는 패스트볼 구사 비율이 극단적으로 적고 브레이킹 볼은 계속 각이 변한다. 이런 유형의 선수들에게는 최악의 상성이다. 물론 나에게는 최상의 상대다.

‘그런 걸 양학이라고 하나?’

틱-

땅볼 타구가 나왔다. 다행히 유격수 방면이다.

“아웃.”

패터슨의 송구는 넉넉한 차이로 타자 주자를 잡아냈다. 평소와 다름없다.

‘그래. 이거지. 괜히 걱정했네. 별거 아니잖아. 나도 분위기 탔었나?’

땅볼 타구가 나온다고 모두 다 실책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브렛의 실책 두 번에 너무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맞히는 것에 급급해서는 절대로 내 공을 칠 수 없다. 이제야 겨우 정상적인 투구 리듬이 돌아오고 있다.

“스트라이크.”

이어 타석에 선 7번 타자의 배트가 시원하게 헛돌았다. 도 아니면 모라고 생각하는지 극단적으로 스윙이 커졌다.

‘그래 가지고는 더 안 맞는다고. 하긴 정상스윙이라도 결과는 비슷하겠지만.’

이제는 그나마 공에 스치지도 않는다.

“스트라이크.”

아웃코스 슬라이더로 간단하게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여전히 볼과 배트의 사이는 멀다. 얼핏 보기에도 공 한 개 차이는 나는 것 같다.

‘뭐 하는 거야. 최소한 비슷하게는 휘둘러야지. 풋. 여유가 조금 생겼나? 이렇게 순조로운 이닝도 있어야 숨이라도 쉬지.’

이제는 상대 타자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스트라이크. 배터아웃.”

낮은 쪽으로 떨어지는 싱커에 여지없이 배트가 따라 나왔다. 두 타자를 상대하며 처음 볼을 던졌는데 삼진을 이끌어냈다.

‘이제 8번…’

거의 다 왔다. 타선에서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타자 하나만 더 잡아내면 이닝이 끝난다.

감독에 따라 9번에는 상위타선과의 연결을 위해 타율은 낮더라도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를 배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8번이 가장 약한 타자라고 봐도 된다.

‘한숨 돌렸네.’

비록 한 점 지고 있지만, 1점 정도를 따라가는 건 일도 아니다. 전 이닝의 우리 공격에서 보듯이 상위타순의 타격감은 나쁘지 않았다.

따악-.

너무나 경쾌한 타구음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느려졌다. 좌측 폴대 쪽 가장 가까운 담장을 새하얀 공 하나가 살짝 넘어갔다.

“헉! 이런… 오! 마이 갓.”

신을 믿지 않지만, 저절로 신을 찾게 된다. 관중의 환호가 사방이 막힌 체이스필드를 울린다.

‘정말 돔구장 XX같네.’

나에게는 너무 생뚱맞은 홈런이었다.

‘허… 나 참!’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홈런 한두 번 맞아본 것도 아니고 투수가 게임을 하다 보면 홈런 맞을 때도 있다. 이럴 땐 보통 자책을 하는데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잘 맞은 홈런이었다.

비거리는 짧았지만, 실투를 노려 친 것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내가 의도한 궤적을 가지고 목표한 존의 가장자리로 날아간 싱커였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타자의 능력을 생각하면 이 홈런은 100% 우연의 산물이다. 그건 그러하지만, 그렇다고 점수가 물러지는 건 아니다. 스코어보드의 1이라고 쓰여진 숫자가 2로 바뀌는 것이 가슴 아프도록 눈에 들어온다.

타자가 홈을 밟고 요란한 세리머니를 하는 걸 덤덤한 눈으로 지켜봤다. 관중은 열광하고 백스의 더그아웃은 축제 분위기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고 말았다. 더럽게 안 풀리는 날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9번 타자를 상대하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마음이 너무 덤덤하다.

‘이젠 실책 핑계도 못 대겠네.’

가볍게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우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제 6회가 시작되는데 2:0은 많이 부담스러운 점수 차이다.

정적이 흐르는 더그아웃을 가로질러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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