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75화 (175/200)

175화. 난국(亂局) (2)

선취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투수에게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투수는 아무리 잘해도 타자가 점수를 내지 못하면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투수가 선취점을 등에 업게 되면 여유가 달라진다. 적극적인 코스 공략은 과감함에서 나온다. 그 과감함을 훨씬 수월하게 시도할 수 있다. 같은 1점인데 때와 상황에 따라서 1점의 의미는 많이 달라진다.

‘선취점을 주다니…’

이런 경우는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다. 상대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려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1점 정도는 줘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투구를 했지만 원래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는 생각이 다른 법이다.

다이아몬드 백스의 5번 타자가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다. 상대 팀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아주 잘 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이거 내가 꼭 위기에 빠진 것 같잖아.’

타석에 선 백스의 5번 트레비노는 나를 상대로 지난 시즌 28타수 3안타인가를 쳤다.

‘올 시즌도 4타수 무안타지. 아! 오늘 전 타석이 빠졌네. 어쨌든 무안타잖아.’

타율 1할은 어디 가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즉 같은 지구에서 철저하게 내게 짓눌렸던 타자다. 열 번에 세 번 치는 건 실력이지만, 열 번에 한 번은 운이다. 정상적으로는 내게 정타를 쳐낼 수 없는 타자다.

‘분위기를 탄 거니? 아니면 타고 싶은 거야? 아무튼 이 동네는 조금만 약해 보여도 잡아먹으려는 놈들 천지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나 보다. 나와의 격차를 그에게 확실하게 한 번 더 가르쳐 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헛스윙이 나왔다. 힘을 다한 풀스윙. 노린 코스를 향해 배트를 휘두르는 데 주저함이 안 보인다. 스윙 궤도로 봐서는 싱커를 노린 것 같다. 물론 그가 노린 코스로 내 공이 향하지는 않았다. 싱커를 노린 스윙에 슬라이더로 헛심을 쓰게 만들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든다.

안 줘도 될 점수를 준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상당히 다운되어있는데 이젠 별놈이 다 덤빈다.

‘괜히 이럴 때 우연하게라도 한 방 맞으면 곤란하지.’

투구에 평소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정말 짜증스럽다.

이런 게 주도권을 잃은 건가?

지금까지 봐오던 타자 트레비노와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는 나를 만날 때면 주눅이 들어 있었다. 2회에 만났던 첫 타석도 그 모습에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선취점이 그의 동기부여를 강화한 것 같았다. 타자의 자신 있는 스윙은 투수에게 부담감을 준다. 더군다나 그가 시즌 평균 30개 정도의 홈런을 쳐내는 타자라면 더욱 심하다.

‘평소대로 하면 돼. 괜히 어깨 힘 들어가면 안 되지. 릴렉스 릴렉스…’

마운드에서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이 악물고 던진다고 난 100마일을 찍을 수 있는 투수가 아니다. 2구는 투심 패스트볼을 인코스에 붙였다. 초구 슬라이더와 공 끝의 움직임이 반대인 공이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타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타이밍을 늦춰 가볍게 1루 견제.

트레비노의 타격 자세가 급격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다시 제자리로 복귀했다.

‘OK.’

타자의 긴장감이 엇박자로 인해 깨어졌다. 날이 서 있던 집중력에 균열을 만들었다.

‘한 번 더…’

투구 자세를 잡고 타자의 긴장감이 극에 올랐을 때까지 기다렸다. 발을 풀고 다시 가벼운 견제. 다시 투구 자세. 이번엔 타자가 한 발을 타석 밖으로 뺐다.

‘하핫. 내가 하면 너도 한다 이거야?’

보통 루틴이란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데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순서나 방법을 지켜야 한다. 익숙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집중을 유도하고 심리적 안정을 취한다. 대부분 타자들은 타격 준비 자세 전 루틴을 가지고 있다.

물론 투수도 있지만 타자에 비해서는 티가 덜 나는 편이다. 어쨌든 이 루틴이란 묘한 특성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배팅 장갑의 매무새를 고치는 동작이 루틴이었다면 그게 몇 년 지나면 장갑을 벗었다 끼게 된다든가 하는 그런 식이다. 전문가들은 긍정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복잡한 루틴보다 간결한 쪽이 좋다고 하는데 세상에 몰라서 안 하는 일은 드물다.

지금 내가 예기치 않은 타이밍에 견제구를 던져 그 예비 동작을 방해했고 타자 역시 타석에서 벗어나며 일련의 투구동작 리듬을 깨려 했다. 이 결과는 내게 더 좋다. 난 투구 동작 전 특별한 루틴(routine)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봐! 적당히들 하지.”

나와 타자의 신경전에 주심이 개입했다. 구두로 주의를 받았다. 아주 잘됐다. 이것 역시 타자의 루틴을 흔드는 요소로 작용할 만하다.

‘내가 견제구를 던지면서 두 번, 타자 스스로 한 번, 주심까지 한 번 도와주네. 그럼…’

타자가 루틴을 하는 도중 네 번이나 방해받아 끝내지 못했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히 미묘하게 영향받는다.

타자가 다시 루틴에 들어갔는데 아주 매끄럽지는 않은 것 같다. 당연하게 그냥 느낌이다.

‘내가 남의 심리에 파장이 일었는지 그대로인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직감이지. 그리고 꼭 타자 때문에 이런 건 아니라서…’

타자와 상관없이 내 마음은 좀 편해졌다. 남들에게는 쓸데없어 보일 수도 있는 사전작업이었지만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20초는 너무 짧았다. 초구를 던진 투수는 2구째부터 포수로부터 공을 받은 후 20초 안에 투구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시간 끌기에 성공한 결과 이제 평상심에 가까워진 것 같다. 확실히 이런 사전작업은 내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틱-

기대한 타격음이 들리며 타구가 내야에 바운드되어 구른다. 타자가 노리고 있는 것 같은 싱커를 던져줬더니 여지없이 배트가 나왔다. 물론 존에서 빠져나가는 볼이었다.

‘트레비노 저놈은 일관성이 있어서 좋다니까. 믿고 있었어.’

두 번이나 기다리는 것과 달랐으니 노리는 구종을 바꿀 만도 한데 그대로다.

‘이제 싱커가 들어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나도 니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내가 던지는 전체 구종 중 싱커의 비율이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40%는 된다. 공 셋 중의 하나는 싱커인 셈인데 그걸 너무 맹신하면 이렇게 된다.

‘생각한 대로… 헉! 2루 방면? 아! 몰라. 그것까지 내가 어쩌겠어.’

브렛이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바운드에 맞춰 공을 잡아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유격수에게 정확히 전달했다.

“아웃.”

2루 베이스를 밟고 급하게 2루로 달려든 주자의 태클을 피한 유격수가 1루로 송구해 최종적으로 더블 플레이가 완성되었다.

최소 실점으로 막아내긴 했다. 더그아웃 한편에 있는 내 자리에 슬며시 앉았는데 정신이 아득하다. 아직 4회인데 7회는 된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타자들의 적극적인 타격으로 던진 공 개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의 기복은 한 경기를 치른 것만큼 자주 있었다.

‘최소 두세 이닝은 더 던져야 해.’

한참 눈을 감고 있다 쿵쾅거리던 심장의 박동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훨씬 상태가 낫다.

‘원래 우리 벤치가 이렇게 조용했었나?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아마 오늘 기분 탓이겠지?’

기분전환이 되었는지 슬슬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우리 공격이 하위타선부터 시작이라서 요즘 6번을 치는 브렛은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표정하게 조금 전의 나처럼 눈을 감고 늘어져 있다.

보통 이럴 때는 계속 자책을 하게 된다.

‘자기 플레이에 대한 실망감도 있을 텐데 나에게 비난받은 꼴이 되었으니…’

실책으로 선취점을 빼앗긴 것에 대한 원인 제공을 한 건 맞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시즌도 많이 남았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래 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야. 그러다 슬럼프 온다구.’

일어나 그에게로 갔다. 인기척을 느낀 듯 브렛이 눈을 떴다.

“내가 오해받을만한 말을 한 것 같은데 그거 신경 쓸 필요 없어. 누구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음. 아까 마운드에서 긴말할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지나쳤는데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다가 그냥 돌직구를 던지고 말았다.

“아니,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마. 욕먹는 게 당연한 플레이였어. 다 내 잘못이야.”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한 것 같은 어조였다. 아직까지도 계속 자책 중인 것 같았다.

“너무 깊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쉽지는 않겠지만 잊어버려. 어떤 일은 의식하면 할수록 더 꼬인다고. 그냥 플레이 자체만 생각하는 게 나을 거야. 그리고 넌 야수지만 타자잖아. 한 방 쳐서 만회하면 돼.”

슬럼프는 모든 것을 무너트린다. 대개 수비가 안 되면 타격까지 잇달아 영향받는다.

“위로는 고마운데 솔직히 나도 왜 그 장면에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 아무튼 최대한 그런 일 없도록 노력해 볼게.”

브렛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말 한마디로 풀어질 일은 아닌 것 같다,

“특별히 야구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이 다 그렇잖아. 좋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거지. 투수에게도 안타, 홈런 맞는 건 일상이야. 그걸 허용하고 싶은 투수가 있겠어? 하지만 그런 게 게임의 일부인데 어떻게 하겠어. 그냥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는 거지.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 너도 그냥 그 정도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브렛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더 이상 말하는 건 내가 오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말을 멈췄지만, 내 자리로 돌아오면서도 생각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잘난 척한 건가? 잔소리처럼 들렸을까?’

분위기를 수습하고 싶었는데 막상 하고 나니 잘한 짓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흘깃 돌아본 그라운드에서는 한창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투아웃 1, 2루.

선두타자였던 9번 타자는 출루하지 못했는데 어찌 된 영문이지 두 명의 주자가 있다.

‘이게 뭐지? 잘하면 점수 나겠는데… 주자가 알버트하고 베그웰이네.’

이렇다는 건 투아웃 이후 연속출루가 이루어졌다는 거다. 자리로 돌아가던 걸음이 저절로 더그아웃의 전면으로 옮겨졌다.

“얘기는 잘했어?”

들려온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3루수 테일러였다.

“무슨…”

“브렛하고 아까 실책 건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아니었어?”

“음. 조금 했지.”

테일러가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대화 내용을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팀에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부분도 좀 있는 것 같아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걔도 요즘 마음이 영… 그래서 그런 걸 거야. 브렛이 우리 팀에 있은 게 팜에서부터 따지면… 어휴! 머리가 복잡할 만하다고.”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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