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74화 (174/200)

174화. 난국(亂局) (1)

‘아… 정말 꼬이네.’

1루 주자가 눈에 거슬린다. 매 이닝 계속 실책이 나오고 있다.

지금도 상대 타자가 툭 건드려 구르는 타구를 2루수로 출전한 브렛이 처리하려고 대시했는데 제대로 글러브에 넣지 못했다. 글러브에 맞고 튕긴 타구를 다시 잡으러 갔지만, 공을 잡았을 때는 이미 상대 타자가 1루 베이스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이번엔 뭐가 문제였던 거야? 저 느린 타구를 못 잡으면 어떻게 해. 억지로 송구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전 이닝에도 상대 타자의 평범한 땅볼을 2루수 브렛이 펌블을 했었다. 거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실수였다. 불규칙바운드라든지 하는 예기치 않는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서둘러 공을 쫓았지만 명백하게 타자 주자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멈춰야 했지. 그런데 그런 얼빠진 플레이를 해 버릴 줄이야.’

억지를 부린 1루 송구. 그런 경우 악송구의 위험이 대단히 높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1루수 필의 포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은 우리 더그아웃까지 굴러갔다. 그사이 주자는 2루까지 진출했었다.

투아웃이었고 다음 타자를 범타 처리하면서 실점을 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끝나야 할 이닝이 계속 이어지는 건 투수에게 타격을 준다. 투구 수가 늘어나고 정신력 소모도 더해지고… 실수든 뭐든 타자에게 진루를 허용했다면 그것으로 끝냈어야 한다. 투아웃 1루와 2루는 명백히 다르다. 주자 1루에서는 장타가 아니라면 안타 하나로는 점수가 안 된다.

‘그런데 2루에 주자가 있으면… 더군다나 타순이 1번으로 이어져가고 애먹은 생각을 하면…’

그것 때문에 이번 이닝도 2번 타자부터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 3, 4, 5번으로 이어진다. 한 팀에서 가장 잘 치는 선수들이 줄줄이 나오게 된다.

‘어휴! 지나간 일 자꾸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겨우 잊고 있었는데 이번엔 선두 타자의 진루를 허용하는 실책이 나왔다. 욕을 한 사발 퍼부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치밀어 오른 열을 발산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만 높다.

‘요즘 내가 스트레스가 많았나?’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고 가볍게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문득 지난 월드시리즈 7차전이 떠올랐다.

‘그때보다는 상황이 나은 건가?’

연속 실책이 나오긴 했지만 두 이닝으로 나눠서 범했다. 전 이닝의 실수가 경각심을 주었는지 이번 이닝에는 악송구가 나오진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이것밖에 없다는 게 우습다.

‘그때는 이어서 트리플 플레이가 나왔는데 이번엔 더블 플레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6월의 마지막 날까지 왔다. 오늘이 이번 시즌 딱 60번째 게임이다. 현재 31승 29패로 지구 3위다. 오늘은 지구 2위인 다아아몬드 백스와의 어웨이 경기이다.

‘전반기에 너무 처지면 후반기에 치고 올라가기가 어려워. 백스는 문제가 아니야.’

우린 우승을 바라보는 팀이다. 지구 선두 다저스를 잡아야 하는데 승차가 5게임이면 시즌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으로도 적지 않은 차이다.

아무도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선수들 모두 다 느끼고 있었다. 지난 시즌 우승팀이 특정한 이유 때문에 이렇게 처져 있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을 프런트가 아니다. 무엇인가 준비는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지. 아마도 그게 사실일 거고…’

지난 두 달 가까이 지역지, 방송, 팬 포럼 게시판에 이르기까지 프런트는 비난 여론에 난타당했다. 그럼에도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2029 시즌처럼 게임 운용전략을 바꾼 벤치도 무턱대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딴생각을 좀 했더니 겨우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피칭 스타일은 경제적인 투구다. 땅볼을 만들려 노력하고 삼진은 그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기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선발투수로서 책임져야 할 이닝을 소화한다. 내 플랜에서 실책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투구에 들어가기 전 브렛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무시했다. 투수가 자신을 주시한다고 느끼면 실수한 야수는 더 긴장하게 된다.

눈가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은 없던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건 내 의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근육이다.

‘이 정도로는 티가 안 나겠지?’

편하지 않은 심리상태가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몹시 마음이 불편하다.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무사 1루가 드문 경우는 아니다. 많으면 게임당 몇 번도 나올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렇게 되는 과정이 평소에 잘 당해보지 못한 경우라서 기분이 좀 안 좋았을 뿐이다.

앞에 있었던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금 무사 1루 상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상황이다. 그냥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자를 상대하는 데만 집중하려 했다.

퍽-

기습적으로 견제구를 하나 던졌다. 주자는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나온 견제구에 역동작이 걸렸지만 날듯이 몸을 던져 겨우 1루 베이스를 짚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거의 기다시피 했다.

“세이프.”

주자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견제구를 던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내 견제구는 대개 주자를 주시하고 있다는 티를 내서 베이스 근처에 묶어놓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별생각 없이 타자에게 전념하겠다는 심정으로 포수와 사인교환을 하는데 베그웰에게서 견제 사인이 나왔다. 바로 생각할 겨를 없이 빠르게 던진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주자를 잡아내진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안간힘 쓰는 주자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집중력은 돌아온 것 같은데 베그웰의 사인을 보는 순간 살짝 찜찜하다.

‘지금 싱커를 건지는 게 맞긴 한데…’

이런 장면에서 그라운드 볼을 유도해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더블플레이를 노려야 한다.

‘싱커와 투심 조합으로 배팅 타이밍을 흔드는 게…’

마음속 어딘가에서 자기 앞으로 굴러온 볼을 두 번 연속 놓쳤는데 세 번째는 없을까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중요한 경기의 초반에 기세를 내줄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이럴 땐 삼진을 노리는 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브렛이 저번에는 잘 해결해 내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란 생각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야수를 믿고 포수를 믿어야 한다라는 외침도 있었지만, 삼진에 대한 유혹의 목소리를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마지막 순간 믿음을 되살렸다. 베그웰에 대한 믿음을…

따악-

존 밖으로 살짝 떨어트리려 했는데 조금 높았다. 투구 전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타자가 힘 빼고 툭 밀어 친 타구는 많이 뻗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1루수를 넘길 정도는 되었다.

1루수를 넘어 떨어진 타구가 라인을 타고 돌돌 구른다. 우익수 알버트가 빠르게 달려왔지만 1루 주자가 2루를 지나 3루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고약한 타구였다.

‘하아! 더럽게 안 풀리네. 차라리 좀 더 뻗었으면 3루까지는 어려웠을 텐데…’

무사 1, 3루다. 베그웰이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걸어 나왔다.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네. 구종 선택을 너무 단순하게 했나 봐.”

“아니, 공이 좀 높았어. 내 컨트롤 실수야.”

내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내 실수를 남에게 미룰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별일 아니잖아.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아! 네가 실수했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주자가 이렇게 쌓이는 게 네 탓이 아니라는… 아… 그게 아니고…”

내야수들이 마운드에 모여 있었다. 말을 할수록 오해받을만한 말이 계속 나온다. 누구 실수를 꼬집는 말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뒷말을 덧붙이려다 베그웰의 눈짓을 보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오늘 이상한 날이네. 뭐가 이렇게 계속 꼬여,’

브렛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4회잖아. 이렇게 된 이상 한 점은 준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가자. 내야 수비 위치는…”

베그웰이 티 나지 않게 말을 돌리며 상황의 봉합을 서둘렀다.

‘한 점도 주기 싫은데… 어쩔 수 없나? 그냥 순리대로 가야 하나?’

베그웰이 한 이야기는 내야 땅볼이 나오더라도 홈 승부는 자제하고 더블 플레이에 주력하라는 뜻이다.

“OK.”

“알았어.”

내야수들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 짧게 대답했다. 평소의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던 팀이었다. 베그웰이 홈으로 돌아가고 다시 마운드에 섰다.

무사 1, 3루에서는 안타를 맞지 않아도 실점할 수 있다. 희생 플라이를 맞아도 1점이고 내야 땅볼을 만들어내 더블플레이를 성공시켜도 실점을 피할 수가 없다. 여기서 실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든지 아니면 행운이 따라야 한다.

현실적으로 제일 편한 건 1점을 주고 더블플레이로 주자를 없애는 것이다.

‘최악은… 여기서 다시 안타를 맞으면 나락행이야. 조심해서…’

내가 주의한다고 해도 닥쳐올 현실은 그대로 다가온다. 오늘은 내게 행운이 깃든 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이아몬드 백스의 4번 해밀턴이 그대로 초구를 받아쳐 공을 띄워냈다. 중견수가 확실히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타구다.

보통 때라면 나의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타구인데 지금은 무사에 주자가 3루에 있다. 이럴 땐 타자의 행운이 된다. 같은 타구에 다른 결과 문득 세상사도 이와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젠 별생각을 다 하네.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가만 설마 이걸 못 잡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좀 전에 안타를 맞는 게 최악이라고 했었는데 아니었다.

‘지금 이걸 못 잡으면…’

에러에 연속으로 맞았더니 인플레이 타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아니지. 여기 미국인데… Once bitten, twice shy(한 번 물리면 두 번 쭈뼛거린다.)라고 해야 하는 건가? 뭐든 좀 잡아줘. 레블론.’

저런 타구를 놓치는 레블론을 본 적도 없었고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오늘은 무엇인가 이상한 날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고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레블론은 가볍게 그 타구를 잡아냈다. 몸이 힘들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 너무 어려운 경기다.

가볍게 외야 플라이를 쳐낸 해밀턴이 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홈으로 들어오는 3루 주자를 맞아들였다. 레블론이 잘 잡았지만 3루 주자의 홈인을 막기에는 타구가 너무 멀리 날아갔다. 난 무사히(?) 1점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에러로 출루한 타자가 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비자책점으로 기록되어 내 기록에는 별 영향이 없는 점수다. 하지만, 한 팀의 에이스로서는 몹시 기분 나쁜 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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