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시즌은 멈추지 않는다.
따악-
청명한 하늘을 백구가 갈랐다. 배트에 맞자마자 홈런임을 알 수 있었던 아주 큰 타구다.
깨끗한 솔로홈런. 타자는 별다른 감정표현 없이 묵묵히 베이스를 돌고 있고 상대팀도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관중석은 조용했다.
‘홈에서 이 모양이라니… 애석한 홈런이네. 애석(哀惜)이라 아주 적절한 표현이야.’
말 그대로다. 정말 슬프고 아깝다. 9회말 8: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홈런이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홈런을 친 선수조차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 이젠 머쓱해할 뿐이다.
“이건 무관심 홈런이라고 불러야 하나?”
“르블론! 쓸데없는 말 만들어내지 말고 들어오면 티 내지 말고 환영 인사나 잘해줘. 그래도 팀에서 5개로 홈런 제일 많이 쳤잖아. 왜 열심히 하려는 애 사기를 죽이려고 해?.”
필이 재빨리 르블론의 말을 잘라냈다. 그렇지만, 선수들의 수군거림이 현재 분위기를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무관심 진루(Indifference advance)가 있는데 홈런이라고 별다르겠어? 아무튼…”
레블론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관심 진루란 야구 규칙에 의하면 두 팀 간의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 수비 측이 주자의 진루에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때 발생한 도루는 도루가 아닌 야수선택으로 기록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무관심 도루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리 팀 8번 타자이자 지명타자인 알폰소의 홈런은 항상 이런 무관심 진루가 선언될 만한 순간에 터졌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알폰소는 정말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력을 다해서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다만 상대 투수의 집중력이 달랐을 뿐이다. 승패가 거의 가려져 상대 투수의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만 타격이 된다는 건 투수가 승부에 집중하면 쳐낼 수 없다는 뜻이다. 알폰소는 대부분의 타석에서 삼진으로 산을 쌓고 있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컨텍 능력보다는 힘과 선구안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타율보다는 출루율과 홈런인 셈이다. 이도 저도 아닌 스윙으로 땅볼과 뜬볼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목적이 확실한 스윙을 하다 삼진을 당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상대 투수의 투구에 대응을 못 해서 제대로 배트에 맞추지 못하고 당하는 삼진은 최악이다.
세이버매트릭스적인 관점에서 투수는 탈삼진이 많을수록 좋고 타자는 삼진을 적게 당할수록 좋다. 삼진과 볼넷을 결합해 투수는 볼넷 대비 탈삼진 (K/BB)이 높으면 좋고, 당연히 타자는 삼진 대비 볼넷(BB/K)이 높을수록 좋다. 해마다 쌓여가는 이런 기록들의 추세가 그 선수의 미래 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표로 활용된다.
‘알폰소의 홈런은 플루크(Fluke, 요행)이야.’
이런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아직 메이저리그급 실력이 안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적응을 기대하며 꾸준히 출장 기회를 주고 있지만, 코칭 스탭의 인내가 어디까지일지는 미지수다.
홈런 수가 많다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세이버매트릭스적으로 홈런 아니면 삼진인 공갈포들의 20홈런보다는 10개의 홈런과 타율 대비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선수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루키 잘했어.”
“힘내.”
늘어선 선수들과 하이파이브가 오고 가고 덕담이 건네졌지만, 다분히 형식적이고 맥 빠져 보인다. 더그아웃에서의 홈런 축하 세레머니가 신나기는커녕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분위기 참! 돌아가시겠네.’
올 시즌 30게임째인 오늘 경기는 거의 졌다. 이러면 15승 15패 다시 5할 승률이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짐작조차 안 간다. 아직까진 괜찮지만 너무 길어지면 치고 올라가기 어렵게 된다. 현재 지구 3위, 지구 1위 팀인 다저스에게 연패를 했으니 승차는 더 벌어졌다.
‘내일은 좀 다르려나?’
다저스와의 첫 시리즈부터 된통 당하고 있다. 이번 시리즈 두 경기에서 카스트로는 어제 2안타 오늘 1안타를 쳤다. 3할을 꾸준히 치는 그의 타율을 생각해보면 평균 정도의 플레이지만 그 3안타 중 2개가 홈런이었다. 어제 하나 오늘 하나. 둘 다 순도 높은 쓰리런 홈런.
‘누구와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잖아.’
알폰소로는 당연히 비교가 불가능하고 브렛까지 합쳐도 안 될 것 같다. 브렛은 2할 5푼대를 쳐내며 새로운 2루수로 무난히 자리 잡았다. 하지만 폭발력이 떨어지는 그의 타격이 팀타선에 크게 위력을 더하지는 못했다
내일은 내 등판일이다. 연패를 끊어야 한다.
***
카스트로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뭐 하는 거야?”
“우우. 저딴 놈을 그냥 보낸다고? 승부해!”
몇몇 관중이 소리치는 게 똑똑히 들려온다.
‘오늘 어웨이 경기였었나? 댁들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저스를 욕해야지 왜 내게… 전략 몰라? 게임은 일단 이겨야 할 거 아냐.’
냉정하게 현실 파악을 했다. 내가 우연이라고 우긴다고 사실이 변하는 게 아니다. 카스트로는 나에게 아주 강한 타자다. 그것이 나의 투구 리듬과 그의 타격 리듬이 일치해 벌어진 일이든 아니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와 나는 상성이 좋지 않다.
투수와 타자와 만났을 때 공방의 주도권은 기본적으로 투수에게 있다. 이건 확실하다.
‘왜냐면 이렇게 대결 자체를 없애 버릴 수가 있거든.’
마침 알맞게 그는 다저스에서 3번 타자를 맡고 있었다. 투 아웃 이후에 맞이한 나에게 아주 강점을 보이는 타자를 굳이 상대해줄 이유가 없다. 그냥 단타 하나 맞은 셈 치면 된다.
괜히 머리 쓰면서 대결해봤자 그를 잡아낸다고 해도 피곤이 누적된다. 2사 1루라면 여간해서는 안타 하나로 실점하지 않는다. 다저스가 득점하기 위해서는 최소 연속 2안타가 필요한데 그 확률은 카스트로가 나를 상대로 홈런 칠 확률보다 현저하게 낮다.
‘얼마나 현실적인 계산이냐고. 그리고 고의사구로 보내면 투구 수 절약도 돼. 감독이 그냥 심판에게 말하면 되는데…’
카스트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1루로 걸어 나가고 다저스의 4번 타자 레오날드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다.
다저스의 타순은 지난 시즌과 많이 달라졌다. 카스트로를 FA로 영입하면서 3번으로 고정시키고 기존에 3번을 치던 에디 레오날드가 4번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쇠화가 완연해진 2번 캐빈 럭스는 7번으로 갔다. 작년보다 더 짜임새가 있다고 평가받는 타선이다.
‘왜? 자존심이 상했어? 열 올리면 배트 끝이 흔들린다고 열 좀 삭혀 봐. 다 그렇게 인생 사는 거야. 자존심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자존심은 이 경기 이기는 걸로 지키려고 마음먹은 사람도 있다고.’
관중들이 상대팀 타자가 아닌 왜 나에게 비난을 했는지 이해는 한다. 우리 팀 에이스가 불구대천의 원수 다저스 타자에게 꼬리 내린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입장에 따라 여러 생각으로 나눠지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지금은 비난을 하지만 경기를 이기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비난의 기억은 곧 사라진다. 그들은 그 기억을 굳이 들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에디 레오날드. 이번 시즌이 빅리그 6년째다. 이 시즌이 끝나면 FA가 된다. 원래도 좋은 타자였지만 보통 6년 차 때는 더 분발하게 된다. 홈런 한 개 때문에 계약금액이 확 바뀌는 수도 있다. 금전적인 이득만큼 동기부여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재료를 찾기 힘들다.
‘오죽하면 FA로이드란 말이 나왔겠냐구.’
일반적으로는 FA 직전 시즌 분발하는 선수들을 보고 FA로이드를 복용했다란 식으로 사용한다. FA + 스테로이드의 합성어인 셈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뛸 정도면 기본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선수다. 그런 선수가 부상의 위험 따위는 도외시하고 FA 대박을 위해 마구잡이로 몸을 던지면 시즌 성적이 올라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FA로이드란 표현은 굉장히 부정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그 표현 자체가 비꼬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FA 직전 시즌의 성적상승은 FA란 동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목표를 달성하고 동기가 없어지면 당연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리한 대가로 부상이 찾아와 계약기간 대부분에 걸쳐 기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로 이럴 때 팬들이 쓰는 표현이다.
원래는 진짜 스테로이드를 먹은 것이 아니냐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면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한창 시끄럽던 때 언론에서 처음 만들어낸 말이라서 그렇다. 약물 복용으로 성적을 내다가 고액의 다년 계약을 맺고는 복용을 끊어 성적이 하강한다는 그런 의미로 쓰였다.
‘비난은 한순간에 지나가지만 이미 받은 돈은 없어지지 않는다. 어느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던데…’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구단의 입장은 벙어리 냉가슴 앓게 된다.
‘선수? 야구팬들이나 언론에서 열심히 까겠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는 좀 있겠지만 받은 돈이 없어지진 않는다니까.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하면 돼. 그럼 유야무야 넘어가는 거지. 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수 개인이 어떻게 지겠어. 예측을 잘못한 구단이 지는 것이 맞지.’
레오날드는 거액의 FA계약이 확실시되는 선수다. 여러 시즌에 걸쳐 본인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줬다. FA 직전 잠재된 포텐이 터진 것처럼 한 시즌 반짝하는 선수들과는 급이 다르다. 그만큼 구단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도가 적은 선수였다.
‘그럼 뭐 하냐고. 저 친구의 5시즌 통산 타율은 3할이 넘지만 나에게 2할 밖에 못 쳤는데… 이다음에 나올 5번도… 아니 가만… 다저스에서 카스트로를 빼간 게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이건 너무 많이 앞서갔다 싶다. 그런 부분이 계약 이유 중에 작은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내 존재감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스트라익.”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가 나온다. 지난 시즌까지 내 싱커는 대부분의 타자들에게 그냥 거르는 볼이었다. 볼이 되는 빈도가 높고 까다로운 공 끝 때문에 쳐도 땅볼이 될 위험이 크다는 이유였다. 존 안으로 들어와 스트라이크가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음. 나에게 호구 잡히면 FA계약의 감액 조건이 될까?’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싱커를 노리는 타자들이 늘어났다. 내 초구의 싱커 비율이 높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타자가 연구하면 나도 연구한다. 그래서 슬라이더의 구사 비율을 높였다.
틱-
“파울.”
간단하게 존에서 빠지는 슬라이더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자존심을 조금만 숙이면 이렇게 승부가 쉬운데…’
“스트라익. 배터아웃.”
하이 패스트볼을 가장한 업슛에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흥분하면 그렇게 된다니까. 열 좀 내리고 다시 한번 해보자고.’
삼구삼진.
타석에서 씩씩대는 레오날드의 모습이 은근한 기쁨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