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71화 (171/200)

171화. 언밸런스

투 아웃 볼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주자는 없다.

챙이 조금 돌아간 모자를 고쳐 썼다. 아직 채 4월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햇살이 꽤 따갑다. 습도가 낮아서 그런지 땀은 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것보다는 습도가 좀 더 높은 쪽을 선호하지만, 이 정도면 경기환경으로는 아주 쾌적하다.

손끝 감각이 아주 좋은 날은 아니다. 그립을 비껴 잡았을 때 손가락에 닿은 감촉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습도가 낮아서 그래.’

쏘아보는 타자의 시선을 슬쩍 흘리며 투구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고 있는 팀 타자 같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직은 역전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눈빛을 꺾어버리고 싶다.

와인드업 동작으로 머리 위로 올려진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슬쩍 돌려 잡았다. 겨울 동안 이것 연습을 많이 했다. 투구 중 보지 않고 손가락 감각만으로 그립을 바꾸는 것은 내 구종이 노출된다고 생각했을 때 해결책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동작이지만 바로 써먹기는 어려웠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투구폼에서 어색함 없이 물 흐르듯 의도하는 동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겨울 체력훈련 기간 동안 연습했다. 이런 건 반복 훈련이 답이다. 하고 또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된다. 그래서 시즌 개막전부터 계속 쓰고 있다.

구종 노출에 대한 오해가 사라져 이런 훈련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동계 훈련 기간 동안 밤이면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시간 때우기 삼아 계속 연습했고, 일단 몸에 익은 건 어떻게든 써먹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이렇게 되었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횡으로 스칠 듯 존을 통과한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콜을 받았다. 심판이 일반적으로 보는 브레이킹 볼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궤도를 그리는 공이라 볼 선언을 받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심은 주저 없이 손을 올려줬다.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고… 뭐 이런다고 별 손해날 건 없으니까. 마음이라도 편하면 좋은 거잖아.’

2031시즌 16번째 경기 중이다. 파드리스와의 원정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 7이닝을 마친 지금 92구를 던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4피안타 1볼넷 1실점. 그런대로 괜찮았네.’

빗맞은 안타가 적시타가 되어 1실점 하긴 했지만, 평소대로였다. 3대1로 리드한 상황이라 기분 좋게 아이싱을 위해 라커룸으로 향했다.

오늘 경기 이전 세 번 등판해서 1승에 그치고 있다. 노 디시전(NO Decison) 경기가 두 차례나 있었다.

개막전은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따라 로키스 1선발 허버트의 구위가 쩔었지.’

투수친화에 가까운 오라클파크의 특성과 맞물려 그날은 양 팀 타자들이 학살을 당했다. 시즌 첫 등판이라 투구수를 80구로 제한당했지만, 75구 6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었다.

‘확실히 경험이 중요해.’

몸 상태를 완전히 올리고 등판한 경기가 아니라서 100%의 컨디션이라 하긴 어려웠지만, 빅리그에서 보낸 4년이란 세월은 나에게 경험이란 부가 능력치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전 경기는…’

7이닝 2실점이라는 무난한 피칭을 하고 3:2로 리드한 스코어에서 내려왔는데 다음 투수가 바로 실점하며 노 디시전이라는 결과를 맞이했었다. 그래도 오늘은 두 점 차이라서 좀 낫다.

‘애덤이 두 점을 날려 먹진 않겠지. 시즌 초반인데 벌써부터 힘이 떨어지면 곤란한데… 설마 등판 횟수의 문제인가? 그렇게 늘어난 것 같지는 않은데…’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8회를 든든히 책임졌던 애덤의 초반 성적이 별로 좋지 않다.

‘지난 시즌과 구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네.’

그는 최고참 투수다. 당연히 나이가 들면 체력회복 기간이 길어진다. 이 문제에 대해선 코칭 스텝이 나보다 더 주의를 기울인다. 연투를 최대한 피하고 있다. 물론 지난 시즌에 비해서 출장하는 빈도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무리하다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어. 진짜 등판 횟수를 더 줄여야 하는 걸까?’

올 시즌 시작 전부터 걱정하던 득점력의 저하는 시즌 초반부터 바로 드러나고 있었다. 지난 시즌 4점이 넘던 팀 평균 득점이 3점대 중반으로 떨어졌다.

‘정말 이런 예측은 좀 틀려도 괜찮은데…’

경기 종반에 1점차 리드와 2점차 리드는 확실히 다르다. 확실히 애덤을 안 쓰고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지난 시즌에 비해 줄어들긴 했다.

밖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애덤에게 공의 회전수 저하와 같은 구위가 떨어질 만한 요인이 생겼고, 등판 횟수도 많아진데다 등판 시에 리드한 점수 차가 줄어들면서 경기 운영 방식이 달라졌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쯤인데 과연 이것이 합당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게 다 조금씩 영향을 미쳐서… 아! 너무 결과에 이유를 억지로 끼워 맞춘 건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와아아아-

아이싱한 얼음주머니를 어깨에 두른 채로 라커룸을 나섰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관중의 높은 함성이 들린다.

‘하아! 오늘 또…’

이곳은 원정구장이다. 관중의 환호가 뜻하는 건 명백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같이 동행했던 피지컬 코치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더그아웃의 출입문을 열었다.

와아아아-

출입문 앞에서 들은 함성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열린 문에서 경기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내 얼굴을 덮쳤다.

시선이 저절로 경기장 상황을 훑는다.

‘투아웃 주자 1, 2루 점수는 으음. 한 점 들어왔네. 3 : 2라…’

마운드에 선 애덤은 무표정하게 다음 투구를 준비한다. 슬쩍 감독을 곁눈질로 바라봤지만 투수 교체의 기미는 안 보인다.

‘바꾸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 경험을 믿는 건가? 하긴 바꿔봤자 이 상황에서 특별히 잘할 것 같진 않지만…’

라드 감독의 성향은 전체적으로 신인의 패기보다는 검증된 선수의 경험을 중시한다. 이런 부분은 안정적인 시즌 운영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꾸준한 일정 이상의 성적이 가능하다. 즉 쉽게 잘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보다 전력이 더 좋지 않았던 전전 시즌에 5할 내외의 승률을 계속 유지해낼 수 있었다.

‘확실히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타입이야. 어쩌면 그래서 전 시즌의 117승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 상황은 조금 불안한데…’

현재 팀 주력선수의 이탈 여파로 생긴 여러 상황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다 애덤을 길게 쓰면 안 된다는 정황을 보여준다.

관중의 환호를 등에 업고 타석에 선 타자는 기세등등하다. 투아웃이라 자신이 아웃되면 이닝을 끝난다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찬 스윙이 연거푸 나왔다.

타악-

‘결국 걸렸네.’

관중의 기대에 타자가 부응했다. 주자가 모두 사라졌다.

우아아아-

펫코 파크가 떠나갈 듯한 함성 속에서 타자 주가가 홈을 밟았다. 마무리 투수의 연투는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미친…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지만 이건 아니잖아.’

감독이 천천히 마운드로 나가고 있었다.

***

미디움으로 익혔지만 겉만 익었다. 안은 시뻘건 질감의 고깃덩이 그대로다.

‘오더에 실수가 있었나? 이거 레어 아니야? 아이고, 뭐든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잘려진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오랫동안 씹었다. 늦은 시간의 저녁 식사라 그냥 방으로 시켰다. 사람들은 피하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는 좀 그래서 베그웰도 같이 불렀다.

“아! 입맛 없어.”

“너 그거 두 개째야. 니 얼굴만 한 스테이크를 그렇게 먹어대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많이 먹는 것과 맛있게 먹는 건 분명히 다르다. 이성적인 베그웰이라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베그웰. 내가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잖아. 의무감으로 먹는 거라고. 급격한 운동 후에 충분한 영양 보충은 필수적이잖아. 오늘은 맛을 못 느끼겠어.”

“오늘만 그런 거 아니잖아. 원래 저염식은 맛이 없어.”

정말 감정이 메마른 놈이다. 승리를 만끽하며 먹는 밥과 기분이 처져서 억지로 하는 식사의 차이를 못 느끼다니…

‘에구, 이런 놈에게 뭘 기대하겠어. 그런데 하나 더 먹을까?’

이상하게 허기가 진다. 평소에는 하나면 충분했고 두 개를 먹는 일도 잘 없었는데 지금은 아직도 배가 허전하다.

‘이게 다 경기에 진 탓이야. 거기서…’

보통은 시즌 중 진 경기에 대해서 선수들은 말을 잘 꺼내지 않는다. 시즌은 한 게임에 매몰되기에 너무 길었다. 진 게임에 연연하기보다 다가올 게임에 이길 생각을 하는 것이 더 건설적이다.

“애덤의 부진이 일시적인 거 같아?”

차마 못 하고 있던 말이 그냥 흘러나왔다.

“부진? 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근본적으로 애덤은 달라진 게 없어.”

“무슨 소리야? 결과가 계속 이렇게 나오고 있는데…”

“그건 애덤의 탓이라기보다는 팀 밸런스가 어그러져서 생긴 상황이라고 생각해.”

애덤은 원래 긴 선수 생활 내내 선발 투수를 해왔던 선수였다. 선발투수에게는 여러 가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중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위한 경기의 완급 조절과 위기관리의 방식은 경험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극단적으로 말하면 100마일을 던질 수 있었던 20살 때 피칭방식과 구속이 떨어져 90마일밖에 못 던지는 40살 때 피칭방법이 같을 수는 없다.

“애덤은 노장이지. 구위보다는 경기 운영 쪽에 강점이 있는 투수였다고. 구위가 엉망이라는 건 아니지만 크게 보면 그래.”

“그래서?”

“과도기지. 요즘 접전상황에서 등판이 잦아지니까 피칭스타일이 변해야 하는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문제는 생각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서…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베그웰은 애덤이 한두 점 줘도 괜찮은 여유 있는 상태에서 주로 등판을 해 피칭스타일이 그에 맞춰졌는데 요즘은 그게 안 되니까 부진처럼 보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감독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 그동안 지키는 야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거야. 그걸로 성적을 내기도 했고 원래 성향도 그것에 잘 맞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팀의 전체적인 밸런스가 맞아 들어가려면 좀 걸리겠지. 인내심이 필요한 시기야.”

‘참아라? 시간이 해결한다? 언제까지? 거참! 이래가지고…’

16게임을 치른 지금 8승 8패다. 오늘 패배로 딱 5할 승률을 맞췄다. 이건 너무 익숙하지 않다. 우린 지난 시즌 7할 이상의 승률을 올린 팀이다.

“음. 네가 보기에 알폰소는 나아지고 있어? 버텨낼 것 같아?”

요즘 지명 타자에 기용되고 있는 루키다.

“그를 평가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그냥 적당한 타자 하나 영입하는 게 확실하겠지.”

이 정도 말이면 알 만하다.

‘어떡하냐! 우리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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