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67화 (167/200)

167화. 봄맞이

대니를 만났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냥 웃게 된다. 대니의 말에 의하면 신비주의 전략으로 마케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판매하고자 제품이 특별해야 한다고 했다.

‘특별하지 못하면 적어도 혁신적이어서 증폭된 대중의 관심과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 한다고 했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아니면 역효과가 난다지. 생각해보면 사과폰이 그랬던 것 같네.’

에둘러 그런 식으로 칭찬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몹시 흐뭇했었다.

‘내가 좀 잘난 건 맞지. 한국인 최초의 사이영상 위너, 2시즌 연속 평균자책 1위, 월드시리즈 우승팀의 에이스 등등.’

그동안 언론의 고의적인 외면 등으로 일부 MLB에 관심 있는 팬 이외의 대중에게는 실력은 있지만 부도덕한 선수 정도로 알려져 있었는데 다큐멘터리로 인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실체가 대중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모두 공(功)과 과(過)가 생긴다. 대중이 나를 바라볼 때 영화 이전까지는 과만 보였다면 이제는 공도 눈에 들어오는 시점이라고 대니는 말했다.

포장이 별로라서 선뜻 구매하지 않았는데 입소문에 속는 셈 치고 샀더니 내용물이 너무 충실하다고 평가한다는 표현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내가 그동안 언론 접촉을 비해왔던 것이 신비주의 전략을 쓴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는 풀이에 무릎을 쳤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연히 본업을 잘했기 때문에 나타난 성과인 거지.’

대니가 또 다른 조건이라고 말하던 나에게 호의를 가진 마니아 그룹 역시 내가 야구를 못했으면 생겼을 리가 없다.

대중의 주위를 환기시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관심을 불러일으켜 줄 존재들. 소수지만 한국의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 활동하는 찐팬들. 대중이 영화를 통해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그들의 게시물이 뜬다.

대중에게 평소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어쩌다 보게 되더라도 그냥 지나쳤던 글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관심을 가진 자는 가독성이 떨어지고 생소한 야구용어로 범벅이 된 긴 글도 읽어본다. 그리고는 언론이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메이저리그에서 내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대니의 말을 듣고 어떤 건가 싶어 한번 찾아봤더니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짧은 기간 동안 이룩한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글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국뽕과 맞물려 영화의 인기가 어느 순간 한국에서 수직 상승했고, 한국 언론이 나를 더 이상은 외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것이 대니가 알려준 지금 나의 상태였다.

대니의 조언은 현재까지 이뤄온 메이저리그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언론 대응 그런 것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지금까지처럼 하라구요. 새삼스럽게 뭘 하려고 하지 마요. So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젠 알아서 바퀴가 굴러간다구요. 스타란 그런 거예요. 본업만 신경 쓰세요. 야구 잘하면서 몇 년 더 지나면 원하는 목적은 저절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래서 그 조언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다. 대중이 어디에 있든 바라볼 수 있는 별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인성 어쩌고 과거 어쩌고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하늘의 별로 뜨면 대중의 눈에 보기 싫어도 보이는 걸 어쩌겠어.’

이것이 비유란 거다. 요즘은 스모그 때문에 하늘의 별 같은 건 보기 힘들다. 이런 태클은 사양이다. 오후의 햇살은 따사롭고 너무 오래 쉬었다. 투수들의 연습 투구 구경도 따분해지고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소르카. 지난겨울은 너무 조용했네. 별다른 보강도 없고… 올 시즌 괜찮을까? 카스트로 계약도 늘어지더니 아직 확정이 안 되었잖아. 무슨 문제 있어?”

감겨오는 눈을 치켜뜨며 소르카를 상대로 새로운 화제를 끄집어내었다.

“그거? 계약 기간 때문에 이견이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든 맞춰 내겠지.”

카스트로의 FA 계약 발표가 아직도 안 나오고 있다. 나도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불안해진다.

“아마 곧 발표 날 거야. 서로가 필요한데 조금씩 양보하겠지.”

소르카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카스트로도 웬만하면 우리와 함께하려고 할 거야. 걔도 우승 욕심이 많거든. 이번 시즌도 우리가 가장 유력하잖아. 아니 지금 상황으로 보면 앞으로 몇 시즌은 그럴 것 같은데 한 번 있는 선수 생활이야. 이왕이면 이기는 팀에서 하는 것이 좋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어쩐지 이렇게까지 계약 타결이 지연되는 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많이 찜찜하다.

***

영광은 영원하지 않다. 새로운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해리스 사장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준비했던 계약 건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애초부터 큰 보강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현재 팀 전력의 코어를 이루고 있는 선수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

“알버트는 별 기대도 없었죠. 혹시나 그냥 한번 찔러보는 심정이어서 그랬는지 그저 그렇거니 하는 마음이 금방 들었는데 카스트로의 일이 이렇게 되다니…”

반갑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방문한 윌리스 단장에게 하소연하듯 사장이 중얼거렸다. 카스트로 계약 건이 스토브리그 운영의 1순위였었다. 그래서 모든 트레이드와 영입계획이 뒤로 밀렸다.

이번 시즌을 위한 계약으로 지출한 최대금액이 4백만 달러 미만일 정도로 최대한 실탄을 아끼며 카스트로와의 계약에 전력을 쏟았다.

카스트로의 에이전트가 최초 제시한 조건은 10년 총액 3억 5천만 달러였다. 31살의 1루수 겸 지명타자에게 그런 기한과 금액을 줄 수는 없었다. 구단은 5년 총액 2억 달러로 맞섰다.

지루한 공방이 겨울 내내 지속되다 봄이 되면서 7년 2억4천만5백만 달러와 8년으로 3억 달러로 조건이 근접하고 있었다. 아직 총액 차이는 좀 있지만 서로 양보가 가능하다는 신호를 주고받는 건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 윌리스 단장이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음. 블러핑일까요? 다저스라니 다 늦게 이게 무슨…”

해리스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단장의 말에 의하면 어제 다저스 프런트와 카스트로의 에이전트가 만났다고 한다.

다저스는 2번을 치던 캐빈 럭스의 급격한 기량 저하 때문에 수준급 타자가 필요한 팀이기는 했다. 그러나 캐빈 럭스는 외야수였다. 다저스는 스토브리그 중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레이스와 트레이드를 통해 외야수 보강을 끝냈다.

FA가 1년 남은 수준급 외야수. 빅마켓 팀은 즉전감을 얻고 스몰마켓 팀으로서는 곧 다가올 FA 계약을 하기 어려운 선수를 보내 팜을 살찌운 누구나 납득할 만한 트레이드였다. 더군다나 다저스는 1루수와 지명타자 자원이 넘쳐나는 팀이었다.

같은 지구 라이벌인 자이언츠의 출혈은 다저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득이 된다. 실제로 계약 생각은 없으면서 슬쩍 끼어들어 선수 몸값을 올리는 행위는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해리스로서는 다저스가 카스트로를 진짜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하죠. 하지만, 그 만남 직후에 다저스 재정 책임자가 포함된 회의가 열렸다는 걸로 봐서는 계약할 가능성을 무조건 배제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거 머리 아프네요. 그래도 8년 3억 달러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연평균 3,750만 달러가 되는데 이건 타자 연봉 순위 10위권입니다. 카스트로가 좋은 타자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해리스는 지금이라도 카스트로의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와는 내일 만나는 것으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지금 연락을 먼저 하는 건 이쪽 마음이 급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건 맞지요. 사실은 8년도 많이 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카스트로가 현재 기량을 유지하는 기간을 최대한 봐줘도 5시즌 이상 되기는 힘들겠죠. 연평균 금액을 좀 높이더라도 계약 기간을 줄일 수 있다면 줄이는 게 좋지요.”

단장의 말에 해리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그거야 백번이라도 그러고 싶지만,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트레이드와 FA의 시초는 한 몸에서 나왔다. 1970년 카디널스의 커트 플러드라는 선수가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는 이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사무국과 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때까지 선수는 트레이드 거부권이 없었다. 그는 1970년 시즌을 뛰지 못했고 1971년 은퇴했다. 1972년 소송까지 졌다.

패소의 이유가 독과점금지법에 야구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록 소송의 결과는 그랬지만 이런 결과가 공분을 일으켰고 1975년 캣피시 헌터가 계약 내용을 어긴 구단에 대한 이의 제기로 최초의 자유 계약 신분의 선수가 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을 근거로 같은 해 12월 FA 제도가 메이저리그에 도입되었다.

단장과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해리스 사장은 냉정을 회복해갔다.

“참! 지금까지 계약을 끌고 와서 어떻게든 카스트로가 계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덫이었네요. 그게 내 발을 붙잡을 줄이야.”

지금까지 카스트로와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건 서로의 의견 다툼이라는 문제도 있었지만, 해리스 사장이 의도적으로 시간 끌기를 한 탓도 있었다. 카스트로는 가급적 자이언츠와 FA 계약을 하고 싶어 했다. 계약을 고려하는 1순위가 자이언츠임을 숨기지 않았다. 해리스 사장도 그에 호응해 어떻게든 계약을 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협상해 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웬만한 FA선수는 계약을 끝냈고 구단들은 필요 포지션의 선수들을 충원했다. 그렇게 하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해리스 사장의 전략이었다.

지금까지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느긋하게 배짱을 부려 왔는데 그 바탕에는 카스트로와 계약할만한 구단이 이제 남지 않았다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만약 카스트로와의 계약이 안 되면 그 대체선수를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벌레들이 더 모이기 전에 약을 치든지 해야겠네요. 이번 해 정원 관리는 제가 실수했으니…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겠죠.”

해리스 사장은 결심의 일단을 단장에게 내보였다.

“8년으로 갈 생각이신가요? 다저스의 블러핑일 수도 있는데?”

사장의 빠른 태세전환에 이제는 단장이 오히려 신중함을 보였다.

“이 바닥에 확실한 게 어디 있겠어요? 이젠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뚜르르- 뚜르르-

“아! 죄송합니다. 잠시만… 응? 카스트로 에이전트인데…”

잠시의 침묵 후 해리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음… 뭐라구요? 허! 이건… 아!”

통화가 끊어진 뒤에도 해리스는 한동안 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카스트로가 다저스와 계약을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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