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66화 (166/200)

166화. 성장을 확인하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오후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애리조나의 2월은 아침엔 선선하다고 느껴지는 날씨지만, 오후가 되면 따스해진다. 이제 서서히 투구 수를 늘려가고 있다.

기자들이 계속 담장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접근하지 못한다.

버나드 변호사가 나서 정공법이 통하는 상대에겐 정공법으로 그렇지 못한 상대는…

‘상상에 맡긴다. 미국은 소송의 나라이기도 하고 난 1억 달러 규모의 장기계약을 체결한 상당히 유명한 메이저리그 선수다. 실체가 있는 언론사는 미국에서 나와 정면으로 부딪치기 어렵다. 이건 변호사가 그렇다고 하더라고… 나의 병력을 이용해서 접근 금지 가처분 같은 것도 아주 쉽게 받아오던데… 음,’

난 평온한 사생활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인격권의 일종이다. 더군다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서 언론으로부터 마치 스토킹과 같은 행위를 당한다면 과거의 트라우마가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판사에게 말했더니…

‘나를 대리해 버나드 씨가 그랬다는 이야기다. 판사가 그런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바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임시적인 조치가 가능한 줄은 몰랐지.’

아마 판사가 자이언츠 팬이었던 것 같다. 곧 시작될 시즌에 팀의 에이스가 부진에 빠질 수도 있다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샌프란시스코는 나의 홈그라운드이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가득하다.

‘제일 큰 언론사 한 곳을 지목해서 실력행사를 하고 나니까 다들 조용해지더라고. 좀 더 나대주면 다음 단계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언론도 아무에게나 집적이지 않는다. 상대를 상당히 많이 가린다. 경우에 따라 피해 보상 소송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상대라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실체 없는 인터넷의 허깨비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기자들은 저 멀리서 사진만 찍고 있다. 스프링캠프까지 따라온 정성을 생각해 그 정도는 참아주기로 했다. 그들도 월급쟁이들인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면 내가 너무 각박한 사람이 된다. 궁지에 몰린 짐승은 너무 쫓지 않는 법이다. 퇴로가 없어지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너도 어지간하다. 이렇게 기자들이 죽자사자 달라붙으면 적당히 상대하면서 스타의 기분도 좀 느끼고 그래야 하는 것 아냐? 지금은 니가 강자잖아. 한국에서 무지 유명해졌다며. 나 같으면 기자 한두 명 불러서 인터뷰 하나 해주면서 살살 구슬리겠다. 그럼 그 기자는 무조건 니 편이 되는 거야.”

소르카가 실실 웃으면서 말을 건네왔다.

“뭘 그렇게까지…”

“사회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두가 나에게 좋은 말만 하겠어. 이런 기회에 인간적인 교감을 가진 기자 한두 명 만들어서 너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쓸 수 있게 하면 좋은 거잖아. 잘 생각해 봐. 네가 기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알지만, 너무 피하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어. 저들도 직장인이잖아. 데스크에서 너를 취재하라고 지시하면 그들도 좋든 싫든 따라야 한다고. 어차피 이런 상황을 피하지 못한다면 니가 주도적으로…”

정말 과묵하던 때의 소르카가 그립다. 좀 친해지니까 말이 너무 많다. 그것도 좁쌀영감처럼 별참견을 다 한다.

“응. 조언 고마워. 잘 생각해 볼게.”

“그래. 예전에 내가 FA를 앞두고 지금처럼 기자들이 몰리고 그럴 때가 있었는데…”

또 나와 버렸다.

‘나 때는… 그런 건 제발 좀 참아줘! 누가 들으면 몇십 년 전 이야기인 줄 알겠네. 겨우 3~4년 전 이야기를 가지고 별… 너 나하고 같은 나이잖아. 어휴!’

지금 소르카가 하는 조언은 나도 충분히 고려해봤던 일이다.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산다. 난 이제 서른이 조금 넘었다. 남은 생이 아직 길 거라 생각하는데 영원히 한쪽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대니 정에게 이직을 제안한 후로 한참 동안 개인사와 언론 대응 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대니는 내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 구단 사장 해리스가 롤모델이라서 직장을 옮기고 싶지 않다고.

홍보부서 일개 직원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인 꿈이 아닌가 싶었지만, 장래희망이 그렇다는데 내가 거기 대고 어쩌고 하는 건 주제넘은 일인 것 같아서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말만 했다.

나도 할 말이 없던 김에 즉흥적으로 질렀던 말이라 그때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에이전트 회사에서 언론대응, 홍보 같은 외부 일을 봐 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서 양쪽 문화에 대해 이해도 깊고 공부도 많이 한 것 같고… 연봉 많이 준다고 했었어도 거절했을까? 그때 돈 이야기를 했었어야… 음. 차차 기회가 있겠지.’

어쨌든 그때 대니에게 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

“대니. 자세한 이야기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많이 당황했는데 당신 덕분에 궁금증이 많이 풀렸네요. 이런 상황에서 전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구단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사실 한국 언론의 동향은 구단의 관심사가 아니죠. So 선수가 그런 활동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고… 물론, 얼마 전부터 인터뷰 요청이 늘어난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닌데 뭔가 많이 빠진 것 같은 밋밋한 답변이었다.

“당신은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거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안 했던 겁니까?”

“제가 홍보팀이긴 해도 구단의 대응을 결정할 위치에 있는 건 아니죠. 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된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죠. 제가 구단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좋을 수도 있구요.”

여전히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대답이지만, 이렇게 말하는데 더 묻기는 곤란하다. 아무리 같은 구단 소속이지만 선수와 직원은 다르다. 그에게도 외부로 발설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구단 직원의 입장이 아니고 대니 개인이 저와 만난 거라면 해주고 싶은 말이 없나요?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저와 친구라고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가 구단 업무와 공식적인 만남도 아니고 제 개인적인 호기심 해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않습니까. 외부로 알려져 대니를 개인적으로 곤란하게 할 것 이야기는 듣고 바로 잊어버리겠습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전문가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굉장히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지만 원래 인연이란 게 다 이렇다. 어쩌면 뜻밖의 소득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금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니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으음. 제 생각엔 So 선수가 특별히 뭘 하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움직여서 손해 보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해요. 그냥 이제껏 하던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은 대응입니다.”

“무대응이 상책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듣기만 하던 고 감독이 급발진했다.

“솔직히 우리가 영화를 돈을 벌려고 만든 건 아니었거든요. 이미지 개선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해받아 억울한 부분에 대한 해명을 좀 세련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에 호응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다는데 이런 기회에 언론에 노출도 좀 하고 그러면서 바뀐 이미지를 유지해 나가야 맞는 게 아닐까요?”

오랜만에 고 감독의 생각이 나와 일치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젖는다고 했다.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So 선수의 이미지가 개선되어 영화가 인기 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예? 그럼 왜?”

“예를 들어 내용이 좋아 보는 영화도 있고 등장인물의 연기가 좋아서 인기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현실에서는 악인이어도 매체에 등장하는 순간 현실 이미지를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면 대중의 새로운 인정을 받을 수 있죠. 욕하면서 본다가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연기파가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제가 생각하는 이 다큐멘터리의 인기 비결은 대중이 잘 몰라서입니다. 대중의 머릿속에는 지금 영화 안에서 보여지는 So 선수만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문은 많았지만, 실체는 거의 대중에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영화가 다큐멘터리입니다. 실체를 착각할만한 요소로 가득 차 있죠. 스포츠에 선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굳이 말을 하자면 룰을 지키고 이기는 자가 선에 가깝죠. 게다가 국뽕의 요소도 있습니다. 이게 인기의 원인입니다.”

“제가 나서면 그 환상이 깨진다는 뜻인가요?”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So 선수의 성향상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직접 상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연기가 따라주지 않는 주연배우가 롱런하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아마도 So 선수의 실체가 상황에 따라 왜곡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내용이 알쏭달쏭하다.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너 나대기에는 능력 부족이야.’ 이런 뜻인 것만 알겠다. 조금 기분은 그렇지만 내가 생각해도 틀린 이야기 같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기는 좀…”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하고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필요에 의해 안 하는 겁니다. 신비주의 전략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런 말은 들어봤다.

“그런데 그거 한물간 거 아니에요? 요즘은 그거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던데…”

“연예인 같은 경우는 그렇죠. 하지만 제품 마케팅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죠.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궁금증을 만들어내는 기법입니다. 호기심만 자극해 소비자들 스스로 제품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하게 만들죠. 추측은 루머가 되고 그 루머가 광고가 되는 식입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더 잘 먹히고 있죠. 가령 사과폰 같은 경우가 이 전략으로 성공했습니다. 이런 효과를 위해 광고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고 내용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죠.”

대니의 설명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 같다. 못 알아먹겠다는 뜻이다.

“신비주의의 작동원리는 심리적 반발을 유도하는 겁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인간의 속성을 이용하는 거죠. 그래서 소비자들이 직접 움직여 제품을 알아보고 구매하게 만듭니다. 난 많이 팔리는 걸 별로 원하지 않지만, 너희들이 원한다면 할 수 없지가 되게 하죠.”

“그래요? 전 말씀하신 사과폰 말고는 그런 걸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렇게 효과가 좋다면 모두 그렇게 해야 맞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많이 까다로워서 하는 사람과 제품이 드문 겁니다. 사람 같은 경우 그 조건을 갖추는 것보다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쉬우니까 안 하는 겁니다.”

아무튼 많이 배운 것들은 말을 무지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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