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히어로
“으음. 그래?”
고 감독이 조금 미심쩍은 듯 말꼬리를 높였다.
“그렇다니까요. 지금 열광적인 반응이…”
나 역시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현실감이 없었다.
“대니, 내 앞이라고 너무 립서비스가 심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과장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 아니고 정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어허! 이리로 오면서 나도 한국 포털 사이트 검색 정도는 해봤다고요. 별거 없던데… 대니. 당신 말대로 뜨거운 반응이 있다면 무슨 시청률 순위에도 나오고 그래야 할 거잖습니까. 그런데 어디고 간에 맨 아래 순위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데 무슨…”
미지근한 내 반응에 대니란 친구가 오히려 열을 낸다.
“인기 폭발한 것 맞습니다. 순위에 안 나오는 건 그 작품이 일반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잖아요. 그런 것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죠. 시청률 집계에 다큐멘터리 부문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그래도…”
“참 답답하시네. 다큐멘터리는 누구나 다 보는 게 아니어서 인기 있는 일반 드라마나 영화 수준의 시청시간에 도달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그 작품은 다큐멘터리의 시청률로는 지금 굉장히 높다구요. 그게 어느 정도냐면 한동안 월드 스타로 군림했던 한국 걸그룹을 다룬 다큐멘터리보다 높은 수준이에요. 좀 믿어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그렇게 우겨댄다고 없던 실체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순위에도 안 나오는데…”
“아! 정말… 말이 안 통하네.”
대니 정이 답답했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직접 어떤 사이트에 접속해서 표를 하나 보여 줬다. 내가 검색해서 보던 TOP 10이나 TOP 20이 아닌 TOP 200까지가 깔끔하게 정리된 표였다. 그 말석에서 I decide my life라는 제목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전체 시청시간 기준인데 거기 올라간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예요. 더군다나 다큐멘터리가… I decide my life가 그 리스트에서 유일한 다큐멘터리에요. 그 시청시간의 70%는 한국에서 나왔구요.”
‘한국에서 보지 않았으면 망했겠네.’
제목 뒤로 나오는 여러 숫자의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대니가 설명해 줬다. 신뢰도가 조금 상승했다. 역시 사람은 숫자로 된 실적에 약하다. 그저 황당하기만 했던 이야기가 조금씩 믿어지기 시작했다.
비시즌 기간이었지만, 구단 직원들은 정상출근 중이었다. 그들은 시즌보다 비시즌이 더 바쁜 경우가 많다. 시즌에는 업무가 거의 고정되지만 비시즌에는 예정에도 없었던 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서당 개 삼 년이면 뭐라는데 나도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3년을 묵었다. 웬만한 건 다 안다.
‘너무 보자마자 내 볼일만 물어본 것 아닌가? 조금 미안하네.’
딴생각이 드는 걸로 봐서 궁금증이 조금은 풀린 모양이다. 대니 정이라는 홍보부서 직원과 휴게실로 사용하는 공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까진 좋았는데 처음 본 사이에 너무 막무가내로 나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제야 떠오른다.
‘그런데 대니 정. 이 사람 교포 맞아? 한국말 너무 잘하는데…’
꽤 복잡한 말이 많았는데도 대화하기에 별다른 위화감이 없었다.
‘신상부터 물어보고… 그런 가벼운 화제로 이야기를 시작했어야 좀 더 매끄러운…’
뒤늦게 후회스러움을 느끼고 있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런 조율은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고 감독이 해줬어야 하는 일인데 고 감독은 대화에 거의 끼어들지 않고 우리의 대화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누구나 다 보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제 출연작은 주로 누가 보는 거죠?”
꽤 긴 시간을 대화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당신은 미국에 언제 왔나 이런 걸 묻기엔 너무 낯간지럽다. 홍보부서 직원이라고 하더니 말하는 내용에 상당한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소재로 대화를 좀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밖으로 공개되는 통계로 그런 것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시청자층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 알려진 것은 있죠. 젊은 남성들은 과학 관련 내용을 좋아하고 젊은 여성은 동물과 여행, 중년 남성은 역사, 중년 여성은 오지 탐험과 같은 내용을 선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오지 탐험과 같은 내용을 나이 든 여성들이 좋아한다는 건 조금 생각 밖이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말씀대로라면 스포츠류를 특별히 선호하는 부류가 다수인 것도 아닌데 왜 제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만 그런 반응이 있는 거죠? 야구 마니아가 많아서 그런 건가요?”
“그건 좀 복잡한데요. 다큐멘터리에도 마니아가 있긴 합니다만 대개 그런 부류는 잡식성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보면 마니아가 아니죠. 특정 주제나 장르를 열심히 파야 마니아죠. 보통 다큐멘터리에서 지금까지 특정 계층이나 연령대를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소재는 심해, 고대 문명, 공룡 등에 관련된 소재였습니다.”
점점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기 있다는 소재와 나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대중적인 소재의 내 다큐멘터리가 인기 있다고 대니 정은 주장했다.
“제 건 좀 다르지 않나요? 그런데 왜…”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그냥 듣고 참고만 하세요. 정확하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일단 대중적인 소재라고 알려진 심해, 고대 문명, 공룡의 공통점이 뭘까요?”
“글쎄요. 음…”
프로 야구 선수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것들은 일단 알려진 것이 적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근거를 제시해 어떠한 것을 보여줘도 그냥 주장 이상의 것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지금 공룡의 피부 빛깔이 어떠했는지 어떤 형태의 털을 가졌는지 정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죠.”
“그래도 공룡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될 뿐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공룡의 털이 조류의 깃털 형태라 주장하고 그 증거가 될 만한 화석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이 특별한 경우인지 일반화시켜도 괜찮은 건지 증명하기는 어렵죠. 한 개도 겨우 찾았는데 같은 화석이 수백, 수천 개 나오는 건 현실화되기 어렵겠지요.”
고개가 끄덕여진다.
“심해나 고대 문명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비슷한 소재들이죠. 아는 것 같지만 미지의 존재. 그런 면에서 So도 비슷하죠.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것 같지만 실제로 한국의 대중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존재죠. 나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외신을 통해서 보여지는 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 소위 말하는 국뽕의 대상이 될 만한데 왠지 언론을 비롯한 기존 체제에서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존재. 이렇게 생각하면 대중적으로 잘 먹히는 소재와 비슷한 부분이 있죠.”
“그래서 야구에 별 관심 없었던 사람들이 많이 봤다는 건가요?”
“일단 그런 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만들었죠. 저절로 노이즈 마케팅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극장에 가야 볼 수 있는 영화도 아니고, OTT 서비스라는 집에서 접근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내용을 세 편으로 나눠 지루함을 없앤 것도 주요했습니다.”
대니 정 본인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상당히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영화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제가 한국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런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예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분명히 반감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영화 제작자가 영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것을 들고 나왔죠. 영웅 서사를 써먹은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토르나 캡틴 머시기하고 비슷한 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영웅이요? 하핫. 제가 마블 히어로도 아닌데… 전 제 영화에 그런 것이 나온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물론 그 영화에는 땀내 나는 운동복과 경기 모습이 나올 뿐이죠.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써먹은 영웅 서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내용이 있는 것 같다.
“아니요. 그냥 쭉 이야기 해주세요. 제 인생의 60%는 야구였어요. 그런 것을 알기엔 너무 한쪽으로만 쏠린 삶을 살았죠.”
조셉 캠벨은 각 영웅 신화에 인간을 만족시키는 어떤 공통된 구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무의식 안에 공통으로 가진 욕구가 발현되어 영웅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긴 시간 동안 집단에 의해 구성되어 전승된 것이 신화라고 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한 구조화된 단계를 영웅 서사라고 한다.
“디즈니는 민담, 설화 등 신화의 내용을 품고 있는 원작을 각색해 관객의 내재된 욕구를 자극시키는 전략을 썼죠.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그런 구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고… 어렸을 때 겨울 왕국이나 라이언 킹 같은 건 봤을 거잖아요. 그런 식이라는 거죠. I decide my life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아! 그래요?”
가만히 듣고 있으려 했지만, 왠지 가슴이 너무 두근거린다. 대니의 말에 따르면 각 신화 내부에 있는 인간 자아실현의 중심이 되는 원형을 원질신화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웅은 무조건 분리, 입문, 귀환이라는 3단계의 모험 사이클을 경험한단다.
“분리에서는 소개가 나오죠. 인물, 배경 그런 거죠. 주로 시련이 주어지고 영웅이 이루어야 할 사명의 같은 게 나오죠. 게임으로 말하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퀘스트라고나 할까요? 입문은 성장의 단계입니다. 다양한 만남과 성장을 위한 직접적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사명에 대한 당위성 같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로 이것은 책임감으로 표현되죠. 마지막 귀환의 단계에서는 영웅의 승리로 갈등이 해소되고 완성된 영웅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허어…”
“느껴지는 게 있어요?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대가답게 이런 큰 흐름을 유지하며 세부적 여정을 교묘하게 변형시켜서 관객으로 하여금 몰두하게 만들었어요. 마치 현실에서 영웅 탄생을 목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든 거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뗄 수가 없다. 고 감독을 슬쩍 돌아봤지만, 그도 시선을 피한다. 아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휴우! 시사회 때 제대로 봤어야 하는 건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뭘 알아야 한마디라도 할 텐데 떠오르는 게 전혀 없다.
“하핫! 대니. 대단하시군요. 혹시 직장을 옮길 생각 해보신 적 있으세요?”
모든 일을 내가 할 필요는 없다. 빈 구석이 있어야 사람이 모이는 법이다. 히어로도 조력자를 구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아마 입문 단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