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현실 세계로 돌아오다
퍼퍼펑-
“안녕하세요. 소영수 선수 잠시 말씀 좀…”
“고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기…”
두 달여 만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는데 천지가 개벽해 있었다. 공항에서의 플래시 세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두 달 남짓 계속된 긴 동계훈련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귀환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예전 한국에서처럼 카메라 플래시가 앞을 못 볼 정도로 길게 터지지는 않았다. 카메라 몇 대와 열 명 남짓의 사람들. 다 한국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를 움츠러들게 하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뭡니까?”
고 감독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고 감독님. 잘 지내신다는 소식 듣고 있었습니다. 잠시 인터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 곤란하시다면 나중이라도 괜찮습니다. 시간 좀 내주시죠.”
“인터뷰라면 제가 소속된 사무실을 통해서 연락 주세요. 개인적으로 무작정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거기서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까 이렇게 된 거잖습니까. 예전엔 안 그러시더니 못 본 사이 너무 딱딱해지셨네. 그럼 선수들이라도 인터뷰 주선을 좀…”
“선수들은 구단의 허락 없이 인터뷰할 수 없습니다. 구단의 허락을 맡으셔야죠. 그건 제게 말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고 감독에게 친밀한 어투로 말을 건네 왔고 고 감독이 부드럽게 응대했다. 일단 말이 오고 가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플래시는 산발적으로 계속 터지고 있다. 이 틈을 타 같이 온 일행의 뒤로 몸을 피했다.
‘이럴 땐 몸 작은 게 좋네.’
일행 중 제일 작은 알버트와 베그웰의 키가 190cm가 넘는다. 투수들은 더 크고 그중에 존슨은 2m를 넘긴다. 180cm인 나 하나쯤은 가볍게 가려진다. 그들도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내 앞을 잘 가려준다.
카메라 플래시는 보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달려오는 공항 보안요원의 모습도 보인다.
잠시의 실랑이는 공항 보안요원이 개입하면서 곧 끝났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공항이다. 즉 여기는 우리 홈그라운드였다. 우승 이후 이 지역에서 우리 팀의 인기는 연고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정한 1958년 이래 최고라고들 할 정도였다.
공항 보안요원들과 오고 가는 항공기 탑승객의 대부분이 우리 팀의 팬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팀의 주축선수 여섯이 낯모르는 동양인 기자들과 맞서고 있는데 누구 편을 들겠는가? 보안요원의 안내를 받아 에이전트에서 보내준 차량에 아무 일 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짐이 좀 있어서 큰 차가 마중 나온 게 다행이었다. 물론 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거 너무 좁잖아요. 이거 10인승인가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짐이 있어도 그렇지 7명 타는데 이렇게 꽉 차면 어떻게 합니까? So하고 나하고 장기계약해서 회사도 돈 많이 벌었잖아요. 더 큰 차를… ”
베그웰이 투덜거린다.
“야! 원래는 네 명만 타기로 되어 있었잖아.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는데 좀 불편해도 그냥 가자. 니들 사이즈를 생각해야지 차가 작다고 하면 어쩌냐.”
다행히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20~30분 정도면 도착 가능하다.
“그보다 무슨 일일까요? 왜 이렇게 한국 기자들이 몰린 거죠?”
나의 기자 기피증은 잘 알려져 있다. 구단에서도 알아서 배려해 꼭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 이외에는 언론과의 접촉을 막아준다. 그것도 최소한만 참석한다. 3년을 그렇게 해왔더니 이제는 의례히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다라고 알려져 이제는 찾는 언론사도 잘 없다.
월드시리즈 우승 후 팀 주요선수들은 다 했다는 개인 인터뷰조차 하지 않은 게 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국 기자들이라니 이해를 못하겠다. 좀 전에 얼핏 보기로는 한두 개 언론사가 아닌 것 같았다.
“낸들 알겠니? 나도 니들처럼 거의 두 달간 세상과 접촉을 끊다시피 하고 지냈는데. 사무실하고 가끔 통화하긴 했지만 별 이야기는 없었다고. 기자들을 자극할만한 이슈가… 혹시 영화?”
고 감독에게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화요? 그거 잘 안되었다면서요. 시청률이 별로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연결 지을 만한 게 없어. 혹시 모르잖아. 그동안 우리가 신경 써서 살핀 것도 아닌데 근래에 한국에서 폭등했을지도…”
“그래요? 검색을 한번 해 볼게요.”
오랜만에 한국 포털에 접속했다. 인터넷을 문자 메시지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건 상당히 오래되었다. 검색어로 영화 제목을 쓰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영화 제목을 모른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저기 감독님. 이런 이야기는 좀 그런데 혹시 영화 제목 기억나요?”
“뭐? 넌 네 영화 제목을 모르면 어쩌냐. 나도… 음. 뭐라고 듣긴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좀 긴 제목이었어. 그게… 음. 한국 제목은 다를지도 모르잖아. 그냥 소영수 영화 이런 식으로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이런 걸 보면 고 감독이나 나나 야구 아니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I decide my life.(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군요.”
“맞아. 그런 제목이었어.”
내 검색으로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정도까지였다. 인기 영화 랭킹 같은 곳을 찾아봐도 순위에 내 영화는 올라 있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짓을 계속하려니 금방 질려버렸다. 아무래도 내 재주로 정확한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런 문제는 한국에 사는 사람에게 물으면 바로 답이 나올 것 같은데 내 주변에 한국 사람이라고는 아버지밖에 없다. 아버지는 그런 쪽에 관심 자체가 아예 없었다. 요즘은 골프를 열심히 치며 소일하신다. 아버지도 한국에서의 기억을 가급적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진수 형과 태경이와도 어느 사이에 연락하는 텀이 점점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작년 초였다. 거의 일 년간 연락하지 않다가 이런 일로 불쑥 전화한다는 건 많이 민망한 일이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고… 좀 뻔뻔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나도 참…’
벌써 플로리다의 시골이 그립다. 동계훈련의 막바지였던 요 근래에는 너무 변화가 없는 곳이라 좀 지루하게 느껴졌었는데 그래도 차라리 그곳이 좋았다. 이렇게 머리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삶이 그립다.
“감독님 생각 좀 해봐요. 한국에 물어볼 만한 누구 없어요?”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현실에 나왔으니 현실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없어. 나도 지인들이랑 연락하지 않고 지낸 지가 어언…”
“이봐! So.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심각해?”
고 감독과 나와의 한국어 대화가 꽤 길게 이어졌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는 것이 지루해졌는지 베그웰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미안, 너무 말이 길어졌네. 오해하지 마.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 아니었어.”
“아니기는. 두 사람 다 표정들이 아주 심각했다고. 무슨 일이야?”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몰라서 문제니까. 모르는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베그웰에게 이런 상황을 대충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 그럼 한국 사람. 인터넷 사용에 익숙할 만한 좀 젊은 사람이 있으면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란 거네.”
“그렇지.”
“내가 아는 한국 사람이 있는데…”
베그웰에게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뭐? 혹시 한국계 미국인?”
“응. 맞아.”
이야기해줘서 고맙지만, 별 의미 없게 느껴진다. 지금 미국에 있는 한국인은 2세도 아니고 3, 4세가 주류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거의 보통의 미국인과 비슷해진다. 예전 미네소타에서 구단 직원 등으로 우연치 않게 만나본 몇 명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어가 서툴렀다. 말을 좀 하는 부류도 글을 읽는 건 어려워했다. 그 때문인지 그중에 한국 포털을 이용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고마운데 여기서 태어나서 직장 다니고 하는 그런 친구라면 한국 사정에 어두워서 만나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야. 한국 잘 알아.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말 못하는 미국인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뭐 하는 친구인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우리 구단 직원이야. 작년에 구단 홍보영상 찍었을 때 만났어. 대니 정이라고 해. 한국 드라마도 자막 없이 보고 그러던데… 내게 K-pop 노래 파일도 보내주고 그랬었다고.”
베그웰이 한국 노래를 가끔 듣길래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공급처가 있는 줄 몰랐다. 요즘은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고 해서 무심코 베그웰에게 그런 면도 있구나 정도의 생각만 했었다.
“음.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번 만나보자. 어차피 구단 근처잖아. 잠깐 내리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베그웰, 전화해서 지금 잠깐 만날 수 있는지 물어봐 줄래?”
“OK. 코치.”
고 감독의 말에 그렇게 미덥게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오라클 파크로 향했다. 마침 대니란 그 친구도 시간이 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근무시간에 한국 드라마를 보고 그랬다는 걸로 봐서는 그렇게 성실한 친구는 아닌 것 같다.
‘보통 직장인은 그렇게 하는 건가?’
오랜만에 오라클 파크에 왔다.
“에구구… 찌뿌둥하네요.”
“야! 영수야. 너 지금 한 일흔쯤 됐냐? 더군다나 운동선수가 무슨 그런 앓는 소리를 내? 차 몇 분이나 탔다고.”
할 말은 많지만, 그냥 못 들은 척 넘겼다. 차를 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공항에서 그 사건을 겪었고 오늘 플로리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시간만 6시간 이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척 바빴는데 그 정도면 기운이 빠질 만도 하다.
“어?”
“왜? 몸이 이상해?”
내가 다시 신음 소리 비슷한 걸 내자 비로소 걱정이 되는지 고 감독이 상태를 물어온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요. 아까 그 기자들은 우리가 그 시간에 공항에 나타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너무 황당한 일을 겪어서인지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었는데 땅에 발을 짚고 허리를 펴고 서자 갑자기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역시 난 투수가 천직이야. 마운드에서의 자세를 취하니까 생각의 속도와 깊이가 달라지잖아.’
“플로리다 쪽에서 말이 새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랬다면 그들이 플로리다로 왔겠죠. 우리 에이전트 사무실에 직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 티켓은 누가 예약한 거죠?”
“음. 잠시만…”
고 감독이 마일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의 경위를 확인했다.
“마일리가 직접 했다고 하네. 그리고 그 e-티켓은 바로 나에게 보냈고.”
그랬다면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말이 샐만한 곳은 운전기사뿐이다. 그랬다는 증거 그런 건 없다. 하지만 이건 수사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다. 현실에서 찜찜함은 그냥 제거하면 편하다.
“직원 다시 구하셔야 할 것 같네요.”
“아마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