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착각
“위대한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그랬지. 모든 투수는 던질 공을 결정한 뒤 공을 던진다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포수가 공을 어떻게 잡겠어요?”
고 감독이 말의 서두를 이상하게 꺼냈다. 무슨 고등학생을 지도하듯이 말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아웃코스 슬라이더와 패스트볼 정도는 사인 교환 없이 포구가 가능하겠지만, 느린 변화구와 패스트볼이 양쪽 코너 끝으로 무작위로 던져지면 어느 포수가 제대로 잡겠는가?
그래도 어쩌면 비인간적인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을 가진 메이저리그 정상급 포수라면 대부분 잡아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10개 중에 한두 개만 못 잡아낸다고 쳐도 그 게임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선발투수가 대략 100개 정도의 투구 수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10개 이상의 포일이 나온다는 건데 그런 게임이 성립할 수 있겠어?’
포일 한두 개만 나와도 불안해지는데 10개라면 게임을 그냥 접자는 이야기다.
‘만약 그럴 정도로 포수가 불안해 보이면 그 정도가 되기 전에 감독이 벌써 교체시켰겠지.’
현실에서 그런 게임을 찾기는 어렵다. 한 달 넘게 진행된 체력 훈련이 끝나고 드디어 처음 공을 잡았다.
“미국에서는 티핑 피처스(Tipping pitchers)라고 표현하지만, 그냥 편하게 쿠세 읽기라고 할게. 그런 용어는 아직 입에 잘 안 익어서…”
그러세요. 용어야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뜻이 통하면 되죠.‘
어려서부터 쿠세(습관, 버릇)란 표현을 듣고 써와서 그런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쿠세를 어떻게 찾아내지?”
“일단은 기본 그립 파악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투수가 제일 많이 던지는 게 패스트볼이니까. 그것을 파약하는 게 우선이죠. 기본적으로 구종에 따라 투수의 그립이 달라진다는 전제조건이 있으니까요.”
단적으로 말해 패스트볼과 커브를 같은 그립으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없다.
“그렇지. 투수가 제일 많이 던지는 것도 패스트볼이고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것도 패스트볼이야. 처음에 투구는 무조건 패스트볼로 배우기 마련이지. 그게 몸에 익고 나서 변화구로 넘어가잖아. 그래서 투구에게는 패스트볼 그립이 가장 자연스럽지. 그게 기본이니까.”
그래서 절대다수의 투수에게 제일 편한 것이 패스트볼 그립이다. 나중에 배운 커브와 같은 변화구 그립은 기본으로 잡았던 패스트볼 그립을 변형해서 잡으니까 조금 불편하다.
생각보다 그 이질감은 크다. 보통 배우는 시기에 있는 다수의 투수들은 그립을 바꿔 잡는 것만으로도 투수 폼의 변형이 생길 정도다.
“한국식으로 말할게. 그래서 편한 것은 직구, 불편한 것은 변화구라는 전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또 생기지. 이건 고등학교 레벨까지고 그 이상의 레벨에서 활약하려면 그 차이를 최대한 줄여야겠지. 그게 가능한 투수는 1군 콜업. 그게 안 되면 2군 붙박이가 되는 거야.”
고 감독이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했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다 안다.
보통 패스트볼에서 커브나 슬라이더로의 그립 변화는 움직임이 가장 작다. 옆으로 조금 돌려서 잡으면 되니까. 그런데 체인지업과 같은 건 그렇게 공을 돌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장 손가락 움직임이 많아진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투수들이 공을 던지기 전 준비 동작에서 글러브 안에서 손이 오래 머물면 변화구, 빨리 빠지면 패스트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이 그립 체인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쿠세 읽기의 첫걸음이다.
이 그립 변형에서 오는 이질감은 와인드업 동작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단 패스트볼 그립에서의 와인드업 동작을 파악하면 다음은 좀 쉽다. 그것과 달라지는 경우는 변화구다. 두 손을 모아 머리 위로 올리는 와인드업 동작을 취하면 손목의 꺾임에 따라 팔꿈치의 각도도 벌어지거나 좁혀진다. 즉 패스트볼일 때의 기본형과 다르면 변화구다.
‘그립에 따라 타자에게 보여지는 팔이 이루는 각도가 달라진다는 거지. 인체 구조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해부학을 공부한 건 아니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군.’
이런 건 투수에게 기본이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투구 폼 교정에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난 이런 일반적 경우와 다른 예외적 존재였다. 어느 레전드가 ‘만약 같은 그립에서 다른 구종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있다면, 쿠세를 벗어난 투구다. 그건 잡아내기 어렵다’라고 했다는데 내가 그런 경우였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예처럼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었지만, 아주 드물다.
내 싱커는 패스트볼과 그립이 거의 같았다. 차이점은 투구 시 힘주는 손가락을 달리해서 공 끝이 꺾이는 방향을 다르게 할 뿐이었다. 그 공의 꺾이는 각의 크기를 조절할 때도 그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좀 깊게 잡는 느낌과 얕게 잡는 느낌으로 구별했다. 그런 특징 때문에 그리 빠르거나 특별한 무브먼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패스트볼과 조화를 이뤄 언터처블의 위력을 발휘했다.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를 낼 수 있고, 정교한 제구와 맞물린 의도적 각도 조절까지 삼박자가 맞물려 타자들에게 악몽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내게 싱커란 구종은 내 투구의 바탕을 이루는 구종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와 달라서 찾아내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어. 보통은 어떻게든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인데 넌 그런 게 없어서…”
고 감독의 말에 공감한다. 투수들은 자신이 직구를 던질 때와 변화구를 던질 때 투구 동작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보통은 그 차이를 비슷하게 만드는 전략을 쓴다. 변화구로 그립을 바꾸는 시간을 줄이려 하고 그게 잘 안되면 패스트볼의 준비 동작을 늦춰 타자에게 그 차이를 체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갭을 없애려고 하다가 또 다른 차이점이 나오기도 하고…“
패스트볼을 던질 때 투구 동작을 의식하다 변화구일 때는 글러브를 들어 올리는 동작이 조금 빨라지기도 하고 그러다 자연스러운 리듬이 오히려 어긋나는 경우도 생긴다. 변화구의 그립 변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정지 동작이 불완전한데 투구 동작을 빨리 가져가려다 보크를 범하는 경우를 본 적까지 있었다.
“예전에 내 선배 누구는 변화구를 던질 때 글러브 안을 쳐다보며 그립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고 또 누구는 패스트볼 때는 포수를 정면으로 쳐다보다가 변화구 때는 포구가 예정된 지점으로 시선이 돌아가기도 하고…”
“예. 잘 알겠습니다. 제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고 감독의 사설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조금 지루해졌다.
“네 생각엔 무엇인 것 같아? 너도 생각해본 게 있을 거잖아.”
정말 고 감독은 한 번도 순순히 무엇을 해준 적이 없다. 꼭 한 번은 비틀고 난 뒤에야 답이 나온다.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닌 거잖아요. 영상을 몇 번 보면서 비교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리고 그때 포스트 시즌 중이었는데 길게 거기에 신경 쓸 수나 있었겠어요? 컵스전 이후에는 거의 신경을 안 썼어요. 아니, 그럴 심리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겠죠. 메츠나 애스트로스는 모르는 것 같았고…”
“그럼 메츠나 애스트로스 때 투구 패턴을 바꿨지? 점수 차이가 많이 벌어졌을 때 이외에는 다 패턴을 다르게 해서 던졌지. 상대가 모르는데 원래대로 던졌어도 상관없었잖아.”
고 감독 자신도 투수 출신인데 내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다 알면서 왜 이렇게 말을 돌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야 찝찝해서 그랬죠. 누군가가 내 약점이 될 만한 걸 알아냈다면, 다른 누군가도 알아낼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요. 지금은 모르더라도 어떤 계기가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잖아요.”
이 말 그대로다. 마음이 불안한 것보다 싱커의 구사 회수나 코스를 제한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컵스가 그런 부분을 파고든 것 같아.”
“뭐라고요?”
고 감독이 한 번에 이해가 안 가는 말을 하고 있다.
“투구 동작 자체에서는 거의 티가 안 나. 여러 가지 경우를 상정해서 전문가들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는데 아무렇게 해도 초구 이후 구종 예측 확률이 보통 60% 정도 나오더라고. 70%가 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고.”
“예? 그럼… 아무리 패턴이 단순해도 그렇게 높게…”
“음. 단순하기는… 패턴이 단순했던 게 아니라 네가 그만큼 싱커를 많이 던져서 그런 거니까 별로 놀랄 일이 아니지. 싱커라는 단일 구종 구사 비율이 50%를 넘겼어. 보통 투수가 패스트볼 던지듯 던진 거야. 게다가 구속 차이를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패스트볼 다음에는 거의 싱커더라고 슬라이더도 가끔 있었지만 10%~20%, 업슛은 3% 정도로 나오더라.”
보통 이렇게 고 감독이 변죽을 울리면 본론이 따로 있었다. 결론은 더 먼 곳에 있고. 이럴 때 그냥 감탄하는 척해주면 알아서 남은 이야기를 다 풀어놓는다.
“아! 그렇군요.”
고 감독 얼굴에서 특유의 의기양양한 미소가 나타났다.
“네가 포피치 투수라고는 하지만 싱커에 비해 다른 구종 구사 비율이 너무 낮더라고 그래서 패스트볼 다음 볼 배합에 특정 패턴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옮겨갔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 싱커를 단일 구종으로 보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구사 용도별로 분리를 해냈지. 체인지업처럼 썼을 때, 유인구로 썼을 때 등 해서 단일 구종이지만 세 가지로 나눠서 분석을 한 거야.”
상당히 새로운 관점이다. 그동안 내 싱커를 여러 용도로 쓰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못했었다.
“그렇게 하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지. 결론으로 나온 네 문제는 두 가지야. 이걸 약점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너에게는 강박관념이 있어. 패스트볼은 빨라야 하고, 변화구는 느려야 한다는 것에 너무 집착했어.”
“그게 집착이라고요? 당연한 거잖아요. 저같이 느린 볼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타격 타이밍을 흩트려야 하고 그러려면 당연히 느린 구속이지만 최대한 패스트볼을 빠르게 던져야죠. 그렇게 구속 차이가 커져야…”
“그게 맞지. 내가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 아니다. 다만 그게 정형화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네가 자신 있어 하는 레퍼토리가 정형화되면서 상대에게 노림수를 가질 수 있게 만든 거야. 의외성을 잃어버린 거야. 자! 이거 보고 연구 좀 해봐.”
고 감독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준다. 빠른 패스트볼 이후 2구나 3구에서 목적구로 썼을 때 그 이후 구사한 싱커의 볼과 스트라이크 비율에 대해 정리한 확률이 나와 있었다.
‘89마일 이상 패스트볼 이후 싱커의 구사 비율은 85%, 싱커가 들어왔을 때 볼일 확률은 90%?’
이게 맞는 계산인지 불쑥 의심이 간다.
“네 투구 방식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쿠세는 못 찾았어. 다만 짐작하기로는 심리적인 문제가 컸던 것 같아. 상대가 두세 번 볼을 골라내는 것 같으니까. 확률에 기반해 짐작한 것을 상대가 어떤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거지. 그 이후로 네가 싱커로 볼을 던지지 않으니까 그게 또 다른 기준이 된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