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인간은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어? 없어? 왜 안 왔지?’
시사회라고 해서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가 아니었다. 몇십 명 정도. 이 정도면 한눈에 참석자를 확인 가능한데 아무리 훑어봐도 없다.
‘이런 자리에는 당연히 참석해야 할 거 아냐. 촬영팀이 안 온다는 게 말이 되냐구.’
케이트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영화제작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언제 시사회에 같은 데 와 봤어야 할지.’
더군다나 내 이야기라는데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에 참석해서 마이클 어쩌고 하는 프로듀서를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좀 있다 보면 곧 오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참석자들이 모두 준비된 자리에 착석하는데도 보이질 않는다.
‘아까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이 자리에 온 직후 바로 프로듀서를 만났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바로 케이트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괜히 부끄러워져 우물쭈물했던 내 행동이 후회스럽다. 이제는 암막이 쳐지고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참석자는 없을 것 같다.
프로듀서가 스크린 앞으로 나서 뭐라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내게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에이,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시사회인지 뭔지 하려면 빨리 영화나 틀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아직 영화 시사라는 본론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지루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요?”
옆자리의 고 감독에게 소곤거리며 물어봤다. 아버지도 계시지만 이럴 땐 고 감독이 만만하다.
“참 일찍도 물어보네. 그런데 질문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냐?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평생 야구만 하던 일개 에이전트 나부랭이가…”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니다. 다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 대상이 마땅찮았다. 같이 참석한 아버지는 지금 이곳에 만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제법 재미를 느끼시는 것처럼 보였다. 배정된 좌석을 옮겨 그쪽 일행과 같이 있었다.
‘여기 왜 한국 사람이 있는 거지? 다행이긴 하네. 어울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좀 곤란할 뻔했는데…’
고 감독도 같이 참석한 마일리가 프로듀서와 버나드 씨가 포함된 다른 일행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곳을 비즈니스의 장처럼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다들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나와 고 감독은 야구를 벗어나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도 둘이 함께하고 있었다.
“왜, 이제 영화에 관심이 식었어? 음. 하긴 1년쯤 전에 계획했던 건데 변덕스러운 네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고 감독도 지루했나 보다. 그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는지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맞춰 건드린 것 같다.
‘아니, 아저씨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어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야? 원래 그런 사람인데…’
“하핫. 자기 이야기가 이렇게 대중에 공개된다는 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관심이 식었다기보다는 좀 얼떨떨해서 그렇지요.”
태연한 척 말을 받아넘겼다. 애초에 답을 바라고 던진 말도 아니었다. 입 다물고 그냥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이었을 뿐이다.
“풋. 넌 어떻게 20살 때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참 성격 일관성 있어 좋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해. 무슨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
고 감독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는 속사포 랩이 가슴에 꽂힌다.
“음. 음. 곧 영화 시작하나 보네요. 영화 보시죠.”
마이클 프로듀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아서 그의 말이 끝날 때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만만한 핑곗거리 같았다.
“또 말 돌리는 거 봐라. 너 지금 안달나 있는 거 다 보여. 지금 케이트이지 뭔지 하는 아가씨가 안 나타나서 심통 부리는 거지?”
‘헉! 이… 이 아저씨가 무슨 말을…’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찔리는 게 많다.
“음. 제가 뭐요. 그냥 보통 때와 같아요. 너무 그렇게 과장하지 마세요.”
“귀를 그렇게 빨갛게 하고 이야기하면 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니? 역시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크크.”
고 감독이 놀리듯 말하며 즐기고 있다. 이어지는 원투 콤비 블로우에 속수무책이다. 다행히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상영시간은 180분 겁나게 길다. 중간에 잠깐 한 번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지만 지루해서 혼났다. 난 다 아는 내용이라서 그런 건지 그저 그랬다. 솔직히 이런 걸 돈 주고 볼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좋구나. 내가… 음. 음.”
아버지를 찾아 어떠냐고 여쭤봤지만 내가 또 방향을 잘못 잡았다. 아버지는 패스다. 이분에게 객관적인 감상평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이 필요해.’
같이 있던 한국 사람은 배급사 직원이라고 하는데 그도 덕담 같이 들리는 말만 한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적당히 말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기엔 거부감이 앞선다.
버나드 씨, 마일리, 마이클 프로듀서. 이곳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이 정도인데 다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모여 무슨 이야기인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딱 봐도 비즈니스의 느낌이 가득하다. 그쪽도 다가가기엔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정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난데 제작이 끝난 영화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모두의 주된 관심은 다른 곳에 있고 나는 부차적 존재가 되어 있었다.
원래 내가 영화제작에 관심을 가졌던 목적은 금전적인 것에 있지 않았지만, 지금 모두의 관점은 그것을 우선한다. 뭔가 선후가 바뀐 느낌이라 조금은 허탈하다.
‘자본주의가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잖아. 결국 누구밖에 없나?’
고 감독이 적당한 사람이긴 하다.
‘직설적인 표현력과 일단 지르고 보는 저돌적 성격… 이런 건 괜찮은데…’
그도 일부 장면에 출연한 사람이라서 객관성 유지가 될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도돌이표처럼 다시 고 감독에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 상영이 끝난 이곳은 작은 사교모임처럼 변했다, 다들 나름 즐거운 것 같은데 고 감독과 나는 어울리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떠돌고 있었다.
‘이렇게 될 거 같아서 별로 이런 자리 참석하고 싶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케이트도 안 오고… 되는 일이 없네.’
가볍게 투덜거리면서 눈앞에 보이는 음료를 한 잔 집어 들고 고 감독에게 갔다.
“이거나 한잔 드세요.”
지금 파티하는 장소처럼 변한 이곳 사방에 널린 것이 먹고 마실 거리인데 여기저기 기웃기웃거리면서 한잔하지도 않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 감독은 누가 가져다주기 전에는 물 한 잔도 안 마실 사람이다. 미국 여자하고 어떻게 같이 사는지가 의문이다.
‘마일리에게 시키나? 설마 그러진 않겠지?’
환경이 바뀌었으면 그에 맞춰 변해야 살아남는다.
“오호! 네게 이런 센스가 있을 줄이야. 아! 그런데 그거 버번(Bourbon)을 섞었더라구. 역시 위스키는 영국산이지. 스카치 위스키가 최고야. 무슨 옥수수 같은 걸로 술을 만들어. 아무튼 미국은… 가져다줄 거면 진(Gin) 종류가 좋겠어."
정말 미치겠다. 기껏 마음 써서 가져다줘도 까탈을 부린다. 그런데 버번은 뭐고 진은 또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술은 잘 모르지만 스카치 위스키라는 건 스코틀랜드 산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널려 있는 칵테일 한 잔 가져다주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까운 테이블에도 있다. 하지만, 왠지 순순히 그렇게 해주기가 싫었다.
“야! 영국이나 스코틀랜드나 거기가 거기 아니야? 뭐가 달라?”
다르긴 다른 것 같은데 정확하게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바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냥 진 종류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저 술 못 마시는 거 알면서…”
난 주신의 축복을 못 받았다. 흔히 말하는 알쓰(알콜쓰레기)다. 가장 최근에 마신 술이 3년 전 엄마 찾아갔을 때 마신 거다. 그때도 소주 몇 모금에 취해서 야외에서 기절하고 일어나서도 몸을 못 가눠 비탈에서 굴렀었다.
‘그래서 손목을 다치고…’
지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영수야! 진은 말이야. 투명해. 소주처럼 투명해 보이는 걸 짚으면 대충 맞아. 진을 베이스로 만드는 칵테일은…”
내 생에 앞으로도 술을 즐기는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나에게 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니 정말 무신경한 사람이다.
“아! 알았어요. 이거면 되죠?”
앞에 보이는 테이블에서 투명해 보이는 액체가 담진 잔을 하나 잡아서 그에게 넘겼다. 긴말 듣는 게 싫었다.
“그래. 그거 맞아. 너도 참! 처음부터 똑바로 했으면 이렇게 두 번 일하지 않잖아.”
진짜 얄미운 말만 쏙쏙 골라 하는 진정한 스승이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었지만, 일단 목적 달성을 해야 했다.
“흠. 아까만 해도 되게 재미없는 표정으로 영화를 보시더니 여기저기서 뭘 그렇게 열심히 듣고 있었던 거예요?”
고 감독에게 다짜고짜 용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자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긴 시간 동안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사근사근한 말을 못한다. 일상에서 그런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을 경우다. 그래서 그의 진심을 듣는 건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가 진심으로 상대를 물어뜯고 할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 내가 알 수는 없다. 아마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고의든 아니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아픈 건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주변을 먼저 건드렸다.
“아! 여기 온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업계 관계자들인 것 같더라. 평소에 어디서도 못 들어본 이야기를 하던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고 감독도 야구판에서나 전문가지 그걸 벗어나면 일반인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다.
“수익 배분율 같은 이야기를 하던데… 너도 계약할 때 그거 다 이해하고 도장 찍었니?”
계약서를 읽어보긴 했었다. 그때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내린 결론도 하나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지.’
무슨 암호문 보는 것 같았다. 수익 배분에 대한 조항을 얼핏 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른다. 봤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충은 알죠.”
“그랬니? 난 마일리 말을 들어봐도 잘 모르겠던데 아무튼 보통 인센티브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 보통은 1분당 시청요금으로 계산한다는데 각종 수상 실적을 반영하기도 한대…”
“그래요? 그렇겠죠.”
작년 같으면 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젠 처지가 달라졌다. 나도 총액 1억 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은 몸이다. 후원 계약도 빵빵하다.
“그게 현재 예상 추정 금액이…”
“헉! 뭐라고요?”
고 감독에게 왜 왔는지 아무 생각이 없다. 환경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있어? 다 맞춰 사는 거지. 그게 그렇게나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