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경기하는 게 제일 쉽다
“좋은 시즌을 보내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MLB에서 투수에게 주는 가장 공신력 있다는 상을 받게 되었네요. 저를 낳아 주신 것은 부모이나 알아봐 준 건 고 감독님이십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랜만에 고전소설 속 비룡이의 말투를 흉내 내어 고풍스럽게 문장을 썼다. 쓸 때는 많이 간질거렸는데 쓰고 나서 보니까 꽤 그럴듯하다. 그 장문의 메시지를 고 감독에게 보냈다.
아버지께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모든 행동이 선의로 해석될 수는 없다. 세상의 그 누구도 관심법 같은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좋은 마음에는 적절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형식의 기준은 내가 아닌 받는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아니면 해주고도 욕먹는 수가 있다.
쌀과 물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다 밥이 되는 건 아니다. 밥이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물의 양과 열을 가하는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그게 형식이다.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평소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자꾸 잊는다. 물론 안다고 실천하진 못했지만.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나도 나름 괜찮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이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에 차지 않는 기사로 달아올랐던 가슴이 정화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사의 문제가 아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기레기들이 문제다.
세상사가 100% 실력만을 반영해서 돌아가지 않고 투표의 결과가 꼭 옮은 것만도 아니지만, 나는 정당한 기준으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무리 지표를 평가하는 기준에 개인차가 있다지만, 30명의 투표단 중 17명만 내게 1위 표를 줬다는 건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이건 머리 굳은 보수적인 노인네들의 차별적인 시각이 드러났다고밖에 해석이 안 된다. 투표단은 리그 팀의 연고지마다 두 명씩 배정되고 미국 야구 기자 협회의 고참 기자들로 구성된다.
‘노골적인 외국인 차별, 지역 차별이야.’
내가 아무리 언론과 접촉이 부족해 그들과 별로 친하지 않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음.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닌가?’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반 이상의 1위 표를 받았다는 건 사적인 감정으로 아무리 기록을 낮추어 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크게 존재했다는 반증(反證)일 수도 있다.
‘흐흣. 너무 빤한 자기위로네. 그래도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어. 뭐! 내가 좀 잘난 면이 있긴 하지.’
따다다다 딴-
오늘따라 전화가 잦다. 고 감독이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참고 감동적인 글을 보냈더니 바로 반응이 온다. 바로 이거다. 세상의 이치가 다 이런 것이다.
“여보세요.”
“영수야! 너 어디 아프냐?”
“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언젠가 내가 너 애는 착한데 싸가지는 없다고 해서 그게 마음에 걸렸니? 아무리 본인의 과거 행동이 후회스럽다고 하더라도 평소 하던 대로 살아라.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어떻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너도 들어봤지?”
갑자기 조금 전 보낸 메시지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흠. 고 감독이 원래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을 잘했지. 생각보다 쑥스러움도 많고… 아마 그래서 이런 반응이… 너무 부끄러워 안 해도 돼요.’
억지로 지금 들은 말에 대해 내가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생각해냈다. 순전히 내 기분 때문이다. 지금 이 정도로 열 내면 미래를 위해 심은 사과나무의 꼴이 뭐가 되냐 말이다. 아무리 극단적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묵묵히 내 할 일 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란 희망의 사과나무다.
“그냥 갑자기 지나간 일들이 떠올라서 보낸 거예요.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일을 해야죠.”
고 감독의 반응에 구애받지 않고 할 말을 했다. 좋은 날이라서 그런지 언변 능력 게이지가 맥스다.
“특별한 날은 무슨… 너 사이영상 받을 줄 몰랐니?”
“예?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이게 팩트다. 그동안 유력 수상 후보자였지 수상자는 아니었다. 내가 설레발을 싫어하다.
“오호라! 진짜 그런 마음뿐이었니? 아마도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내가 받겠지 같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 내 생각엔 너 스스로도 80~90%는 내가 받겠지. 아니, 니 성격이라면 올해 나한테 안 주면 그건 부정이 개입된 거다 쯤으로 확신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야?”
“전혀 없다고 말씀드리긴 어렵겠죠.”
부인하려다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아 일부분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거봐!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무리 냉정하게 봐도 니가 수상하지 못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 주변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 비슷한 대답만 들었어. 올 시즌 니 성적이 아주 특별하진 않은데 경쟁 구도가 안 잡힌다고 다들 그러더라.”
‘음. 올 시즌 내가 좀 그렇긴 했지.’
내가 별다른 반박 없이 입을 다물자 고 감독은 동조의 의미라고 생각이 들었나 보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 봐. 누구든… 내 경우는 열 명 중에 열 명이었어. 내가 그런데 네 주변이라고 별다르지 않겠지. 누구나 다 똑같이 생각하는 일이 특별한 일일까? 평범한 일 아니야?”
듣고 보니 그렇다.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말문이 막혔다.
“그게… 저… 그렇죠.”
“거봐라. 너도 찬찬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지? 그런데 넌 평범한 날 평범한 일을 가지고 평소에 거의 하지도 않던 낯간지러운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어? 이건 평범한 반응이 아니잖아. 자! 누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음. 제가 좀 과했네요.”
뭘 잘못한 것도 없이 사과 비슷한 걸 하고 말았다. 말발이 달리는 게 한이다. 분명히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예. 예. 하다 보면 늘 이렇게 된다.
“알면 됐다. 그래도 나름 인간다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은 인정해 줄게.”
마무리까지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정말 그와의 대화는 늘 마지막에 찝찝함이 남는다.
‘내가 다시는… 저 양반은 뭘 줘도 제대로 받을 줄을 모른다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나 봐라. 그런 성격 가지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좀 쉬었다가 주변이 좀 정리되면 정말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하려고 했는데 취소다.
생각할수록 묘한 양반이다. 엄청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것들이 대부분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었다.
한때 KBO에 작은 족적 정도는 남긴 대단한 선수였는데 지금 함께했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별로 친한 동료를 봤던 기억이 없다. 그 정도 선수 경력이면 지도자로서도 프로팀에 몸담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대학팀 코치와 감독으로 지냈었고 그마저 이상한 사건에 연류되어 끝이 안 좋았다.
‘최고 경력이 대표팀 감독 잠깐 했던 거지.’
그것마저 내게는 도약의 발판이 되었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선수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던 것도 고 감독이었고 미국까지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곰곰이 따져보면 내 야구 인생에 은인과 같은 존재인 건 분명한데 솔직히 별로 존경의 마음이 들거나 고맙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
‘정말 내가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가? 아니면 인성에 문제가… 음.’
그와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우리 관계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도 하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주변에 머물기만 해도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는데 내가 왜 그와의 관계를 중단해야 하겠는가!
‘이런 게 인간관계에서 상성이 좋다는 건가?’
그와 함께한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증명한다. 그와 함께했던 일은 과정이야 어쨌든 늘 결과가 좋았다.
“내 말에 감명받았냐?”
가끔 이런 깨는 소리를 참아내야 하는 게 고역이긴 하지만 메리트가 없는 일은 없다.
“어휴! 감명인지 뭔지 전 잘 모르겠고, 저보다 오래 사신 분이 더 잘 아시겠죠. 음. 이 정도 생각? 이건 괜찮았나요?”
“넌 어떻게 생각에 발전이 없냐? 니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게 싸가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거야. 좀 못마땅하더라도 예 하든가. 아니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니가 살아오면서 그런 사족 같은 말만 좀 덜 달았어도 우여곡절이 지금보다는 적었을 거야.”
또, 시작이다. 모처럼 한 건 올렸다고 나를 아주 잡아먹을 기세다.
“알았어요. 됐죠?”
이제 대충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정말 기 빨리는 기분이다.
“됐죠? 이 말만 빼면 완벽한데 어이구! 그게 니 천성이니 어쩌겠니. 으음. 너처럼 평범한 일로 구라치는 게 아닌 정말 특별한 일이 어떤 건지 이야기를 좀 해주마.”
또 나만의 생각이었다. 고 감독은 전혀 전화를 끊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먼저 알려줄 일은 너 컵스전에서 노출되었던 약점이 뭔지 알아냈어.”
그 문제를 디비전 시리즈 이후 가슴에 묻어두고 계속 찝찝해했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다.
‘흠. 이건 특별한 이야기 인정, 거봐!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니까.’
“좀 늦었지만,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팀에서 연락이 없어 답답하던 참이었어요. 어디서든 찾아냈으면 되는 거죠. 무슨 문제이던가요? 이번 동계훈련에서 수정할 생각인가요?”
“알아낸 건 한 삼사 주 전이지.”
“예? 그럼 왜 이제야…”
미리 좀 이야기했으면 그동안 가지던 부담감이 적었을 테고 어떻게든 수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끌었는지 모르겠다.
“월드시리즈 들어간 후였고 애스트로스가 모르는 것 같은데 굳이 서두를 건 없어 보였어. 그 내용이 투구 밸런스에 관련된 거라서 바로 수정하다가 밸런스가 흔들리면 월드시리즈에 문제가 생기잖아. 정규시즌 중이면 몰라도 월드시리즈에서 시도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그리고 팀에서 이야기 안 한 건 그 문제 해결을 우리 회사가 의뢰받았거든.”
“아! 그렇군요.”
이제 시간은 많다. 내가 경기에 출전하는 건 빨라도 내년 3월이다.
“동계훈련에서 밸런스 조정하고 시범경기에서 테스트하면 될 거야.”
“그럼 그렇게 하죠. 이제…”
좀 흥미를 끄는 내용이 나왔지만 이제 진짜 대화를 끝내야 할 시점이다. 듣고 말하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기다려. 아직 할 이야기 남았다.”
‘하아! 또 뭐… 이제 좀 끝냅시다.’
“버나드 변호사에게 연락을 받았어, 네 영화 마지막 작업 중이래. 12월 크리스마스 시즌 앞에 OTT 서비스를 통해서 공개된다고 하더라.”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잊고 있었다. 정말 이것 역시 특별한 소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그거 공개 전에 볼 수 있는 건가요?”
“응. 12월 초에 가능하다고 해서 그거 알려주려고 전화한 거야. 그거 보고 동계훈련 가면 될 것 같아.”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