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끝과 시작
타자들이 베이스를 돌고 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것 같은 관중의 함성이 뒤따른다. 가슴이 울렁인다.
주자들이 달리는 모습 사이로 괜히 마운드를 살피게 된다. 애스트로스 마무리 닉 코스비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투수여서 그런지 마음이 쓰인다.
‘굳은 어깨… 쩝! 기분 묘하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주자들이 차례차례 홈으로 들어온다.
‘1점 나고, 2점…’
마침내 타자 주자 알버트가 홈 플레이트을 밟자 이제껏 들어 온 함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알버트는 스타 기질이 있어.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꼭 필요할 때 쳐내는군.”
“그렇지. 어쩌면 이러다 진짜 대박 계약을 할지도 모르겠는걸. 프런트가 머리 좀 아플 거 같아. 이젠 에이전트가 웬만해선 눈 하나 꿈쩍이기나 하겠어?”
아직 신인 자격을 가진 빅리그 2년 차라 시간적 여유가 많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한두 시즌만 더 지나면 몸값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뛸 것이다.
“열심히 하니까 적절한 보상이 따르는 것이라 생각해.”
이제 소르카는 급격한 감정의 떨림에서 진정이 좀 된 것 같다. 좀 무안한 기색이라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소르카가 울컥할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서양 사람들이 감정의 기복이 커.’
알버트를 앞세우고 주자들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알버트는 평소보다 동작이 크고 목소리도 크다.
“야! 너 완전히 미쳤네.”
“아! 몰라. 원래 내가 좀 멋지잖아.”
평소에 보이던 수줍은 청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뻔뻔한 광대의 모습만 남았다.
‘그래, 뭐든 어떻겠어. 경기를 끝낸 거나 마찬가지인데… 오늘은 니가 영웅이야.’
기분 좋은 떠들썩함이다.
따악-
“뭐야? 또 쳤어?”
베그웰도 치고 나갔다.
“지금 코스비 멘탈이 나갔을 텐데 공이 제대로 들어가겠어? 뭐! 애스트로스 벤치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지금 교체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이해는 된다. 피 말리는 1점 승부를 이어가다 교체 투입된 8회 말에 쓰리런 홈런을 맞으면 나라도 못 견딘다.
‘그것도 월드시리즈 최종전이 될지도 모르는 게임에서 그런다면…’
마무리 투수로서는 최악의 악몽이다.
애스트로스 벤치에서 다시 마운드에 오른다.
“정신이 좀 돌아왔나 보네. 이럴 땐 감독이 뭐라고 할까?”
“글쎄, 짐작이 안 가네. 지금 준비된 투수도 없을 텐데 불펜에서 연습구나 몇 개 더 던지라고 그냥 시간이나 끄는 게 아닐까? 투수 바꿔줘야 하지 않겠어? 저 상태로 더 던지기는 무리겠지.”
투수나 감독이나 많이 난감할 것 같은 상황이다.
“어? 그냥 내려가는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 같지 않은데 감독이 투수 교체 없이 그냥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코스비가 그냥 던지겠다고 한 것 같네.”
어차피 지금 한두 점을 더 주나 안 주나 별 의미는 없다. 공격 기회가 한 번 남았는데 4점 차이면 승부는 이미 가려졌다고 봐야 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몸 덜 풀린 불펜투수보다는 지금 투수가 던지는 게 낫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 인식을 했다고 하더라도 야구는 사람이 하는 게임이다.
“대단하네, 코스비. 보통 심장이 아냐.”
“리그에서 오래 뛰었잖아. 이렇게 내려가면 더 비참할 것 같기는 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나 보지.”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저런 상황에 빠진다면 난 더 던지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괜히 우리 마무리를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완전히 늘어졌네. 이러면 좀 곤란한 것 아닌가?’
우리 더그아웃 분위기는 밝음 그 자체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체이스 역시 이미 게임을 끝낸 얼굴이다.
따악-
“뭐야? 설마 또?”
4번 레블론이 친 타구가 뻗어 나간다.
우… 아아-
환호라기보다는 놀람이었다. 관중의 감탄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구는 중앙 담장 바로 앞에서 잡히고 말았다. 함성이 조금 모자란 탓이었을까?
좋은 타구였지만 좋은 수비에 막혔다. 주먹 쥔 한 손을 번쩍 들고 1루로 향하던 레블론이 멋쩍은 듯 바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섰다. 본인은 확신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많이 무안할 것 같다.
“크크큭, 레블론 흥분했네.”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안 웃을게.”
수비를 위해 글러브를 찾아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려는 레블론에게 선수들의 농담이 마구 쏟아졌다.
‘에구, 아저씨…’
짝짝짝-
관중에게서 박수가 간간이 나오고 있다. 어긋난 박자의 박수 소리가 어느새 맞아지며 점점 커져간다.
체이스가 마운드에 오르자 격려는 절정이 되었다. 홈 경기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런 격려의 박수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큰소리는 처음 들었다. 이전엔 상상하지 못한 열광적인 박수와 함께 새로운 이닝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프로스포츠는 지역밀착형이다. 미국 야구에 합류한 지 오래지 않은 내 시각으로는 조금 어색하다.
‘우리 지역 팀이 최고, 나머지는 다 나쁜 놈들이라니… 좀 그렇잖아.’.
미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가장 먼저 남북의 대립이 느껴졌다. 남부와 북부 간 대결 현상은 미국 남북전쟁의 영향이라는데 그때 공화당이 이끄는 정부가 남부의 제도들을 가혹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오랫동안 남부의 주들은 민주당의 텃밭이었다고 한다.
6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전쟁은 비참했을 테지만 벌써 150년도 넘은 사건이다.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가 곤란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지금은 대체적으로 농촌 지역인 남부의 주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민주당은 도시 지역이 정치적 근거지라고 한다.
‘뭐가 이상하냐고?’
이렇게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지역주의도 흐려질 만한데 그건 그대로란다.
‘너무 모순이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다? 이게 완전히 따로국밥이지. 에고, 미국 시민도 아닌 내가 무슨 생각을…’
어쨌든 그 지역주의는 홈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반적인 경우 원정팀은 야유나 안 받으면 다행이고 지금 같은 경우엔 거의 무시나 적대의 대상이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그라운드의 우리 선수들은 기세등등하다.
이제 진짜 끝이 다가왔다. 관중과 양 팀 선수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8회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이제 이 시리즈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가 해야 할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점수 차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마음이 힘들었었다. 물론 지금 완전히 게임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까지 된 상황이면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홈런이 터진 직후에 우리 투수들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지금 던질 수 있는 거의 모든 투수가 불펜에 있다. 이런 분위기와 상황에서 공격 한 번에 4점 차가 뒤집히는 건 상상이 안 된다. 아마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폭동이 날지도 모른다.
‘시원섭섭하네.’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곧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인데 일방적으로 기쁘기보다는 허탈함이 섞인 묘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거의 결정된 경기의 그라운드에 다시 나와야 하는 애스트로스 타자들이 대단해 보인다.
“쟤들은 지금 무슨 생각할까? 역전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을까? 아니면 그냥 무의미하다고 느낄까?”
“무슨 생각이 있겠나. 그냥 멍하겠지. 카운터 펀치가 너무 정타로 들어갔어. 희망을 가진 팀의 벤치 분위기가 저렇진 않잖아.”
마주 보이는 애스트로스의 더그아웃은 전체적으로 조용하다. 하지만 몇몇 선수들은 여전히 일어서 타자들에게 박수를 쳐주며 독려하는 듯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의 확실한 패배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는데 저렇게 박수를 치며 희망을 가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부럽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인사를 하기에 늦은 건지 빠른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 잘 던졌어. 넌 진짜 멋진 놈이야.”
소르카에게 난데없이 한 방 맞았다. 냉정함의 화신 같았던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이대로 끝나긴 할 모양이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이 찾아왔다.
“하핫. 너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조금 당황스럽네. 오늘이 특별한 날은 날인가 봐.”
덕담에 대한 답례를 위해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팔을 뻗었지만 방금까지 멀쩡했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거야 원… 긴장이 풀리니까 갑자기 엉망이네.’
오늘 좀 무리해서 던지긴 했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고마워, 소르카. 너도 멋졌어.’
하이파이브는 포기하고 그냥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탈진모드 단추가 눌러진 것 같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나른해졌다.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다.
“조금 아쉽긴 하네.”
소르카에게 엉뚱하게 느껴지는 말이 나왔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아쉬울 게 뭐가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뭐가 아쉬워?”
“월드시리즈 MVP 말이야, 난 네가 받았으면 했어. 상당히 유력했는데 상황이 바뀌어 버려서… 아마 알버트가 받게 되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다. 정말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런 거야 운이 따라야지. 그리고 알버트는 충분히 받을만한 일을 해냈잖아. 솔직히 오늘 경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였는데 정말 너무 결정적인 한 방이었어.”
끝내야 할 때 끝내야 한다. 만약 오늘 역전패라도 당했으면 7차전을 아무리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야구라는 의외성이 많은 경기 특성상 승리를 100% 장담하기 어렵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생각한 거지만, 이번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임펙트 있었던 한 방이었던 것 같다.
“너도 시리즈가 이어질 때마다 정말 많이 애썼잖아.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줬는데 그런 건 지표에 드러나지 않아서…”
오늘 정말 놀라겠다.
‘소르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냉철한 겉모습 안에 이런 곰살맞은 성격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힘들긴 했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안될 것 같은 경기가 있었으면 빨리 내려왔겠지. 어쩌다 상황이 맞아떨어져 그렇게 된 걸… 좀 쑥스럽네.”
몸을 좀 사리기도 했었는데 조금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노력했을 뿐이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도 승수는 나만큼 올렸잖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도 똑같은 찬사를 받아야겠지.”
“그건…”
“다 같은 거잖아. 어? 투 아웃이야. 진짜 끝이네.”
다시 말하려는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막았다. 그가 생각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그리고, 곧 타구 하나가 하늘로 날아갔다. 평범한 플라이 타구였지만, 중견수 레블론은 조심스러웠다. 두 손을 올려 부드럽게 타구를 받아냈다.
퍼버펑-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 축포가 터졌다. 우승이 결정된 순간인데도 내 감정이 너무 무덤덤해 그것에 놀랐다.
‘다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