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56화 (156/200)

156화. 도착 5분 전

브렛은 정규시즌에서 출장 경기 수가 아주 적었다. 선발 출장은 몇 경기 되지도 않고 승패가 거의 드러난 게임에서나 중반 이후 기용되는 정도로 시즌을 보냈다.

그런 환경에서 타격감은 들쑥날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포스트 시즌에서의 선발 출장도 주전 패터슨의 부상 이후 월드시리즈에서만 이루어졌다. 월드시리즈에 올라올 만한 팀의 투수력이 약할 리가 없다.

‘이래저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이런 상황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브렛에게 좋은 타격까지 바란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따악-

‘어? 진짜 되는 날인가?’

바로 전 이닝 수비에서 에러성의 플레이 두 개를 연속으로 범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끝날 것 같더니 파인플레이 하나로 완전히 기세가 반전되었다.

타석에 들어서기 무섭게 초구를 공략해 깨끗한 우전 안타를 쳐낸다.

“거 보라니까. 되는 놈이 되는 거라고.”

소르카가 마치 자신이 안타를 만들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인다.

투 아웃 이후이긴 하지만 우리 팀의 강점인 상위타선으로 연결되었다. 조용하던 관중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가라앉던 분위기가 다시 급변하고 있었다.

1번 크리스의 등장 음악에 맞춰 관중의 환호가 하늘을 찌를 듯 커졌다.

“어?”

“투수 교체를 하려는 것 같은데…”

애스트로스의 감독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좀 더 두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프라이머리 셋업맨은 클로저에 이은 불펜의 2인자다. 가장 확실한 투수인 클로저가 등판 전이긴 하지만 애스트로스 입장에선 9회에 어떻게 동점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클로저가 불펜에서 가장 구위가 좋은 투수이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 힘을 집중시키는 것에 능한 투수다. 이닝을 길게 가져갈 수 없는 유형의 투수다. 이렇게 불펜을 소모하면 막상 연장으로 경기를 끌고 가게 되더라도 이후 대책이 없어진다.

“투구가 계속 맞아 나가긴 했잖아. 그것도 가장 형편없다고 하는 우리 하위타선에게… 구위가 떨어졌다고 판단했을 수 있지. 내가 보기에도 정상 컨디션은 아닌 것 같아.”

월드시리즈 6차전까지 왔는데 100%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불펜투수가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지금쯤 연투 등으로 쌓인 피로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 팀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역으로 말하면 스탭들이 그만큼 관리를 잘했다는 뜻도 되지만… 애스트로스가 투수 교체를 한다면, 우리 팀이 여기서 점수를 못 뽑는다고 해도 나쁠 게 없겠지.’

만약, 동점이 되면 내일 선발 투수라도 당겨쓸지도 모른다. 애스트로스가 점점 수렁에 깊게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투수 교체가 이루어졌다. 애스트로스의 클로저인 닉 코스비가 마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가리는 게 없네.”

“어쩌겠어. 여기서 지면 끝인데… 내일은 오늘 이겨야 오는 거라구.”

여유 전력이 있다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한 일인 줄 몰랐다. 정말 만에 하나 있는 경우가 생겨 오늘 경기에 지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내일 우리는 로저스와 존슨이라는 든든한 자원을 모두 투입할 수 있다.

드로이넨의 부상이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도 투수 전력은 모자람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선 안 된다.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때 끝을 내야 한다. 상대에게 단 1%의 가능성도 주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도루와 같은 작전을 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브렛은 리드를 길게 잡지 않고 있었다.

“브렛도 상당히 빠른 편이잖아. 냉정하게 판단하면 지금 연속 안타가 나오는 걸 바라기에는 확률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왜 작전을 걸지 않는 거지?”

“우리 팀이 급할 게 뭐가 있겠어. 우리가 이기고 있는 팀이라고. 착실하게 상대 투수력만 소모시키면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유리한데 서둘 것 없잖아. 모험은 지고 있는 팀에서 해야 맞는 거겠지.”

1번 타자 크리스는 쉽게 승부를 해주지 않고 있었다. 적극적 타격 대신 공을 골라내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선두타자로서 해오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탁-

“파울.”

하나둘씩 공을 골라내며 커트에 주력하는 타자와 여기서 무조건 상대의 공격을 끊어내겠다는 투수의 의지가 불꽃을 튀긴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먼 쪽의 패스트볼이 튕겨지고 서로를 노려보는 타자와 투수의 눈길이 매섭다.

“아! 뛰었어.”

투수의 관심이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되는 순간 느닷없이 1루 주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투 아웃 이후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런 앤 히트의 장면이었다. 그런데 타자는 스윙을 참았다. 스윙을 하기에는 공이 너무 존을 벗어났다.

주심의 콜을 기다릴 새 없이 번개처럼 포수의 2루 송구가 이어졌다.

‘살겠네.’

공이 포수의 손을 벗어나기 전부터 결과가 환히 보였다. 그의 스플리터가 홈 플레이트 앞에서 바운드를 일으켰다.

투수에게 가끔 나올 수 있는 평범한 실투였지만 이번 경우엔 치명적이었다. 브렛은 넉넉한 차이로 2루에 안착했다.

애스트로스의 마무리 닉 코스비는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조합의 투피치 투수였다. 우리 마무리인 체이스와 비슷한 유형이다. 아니, 두 명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마무리 투수 스타일은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마추어 때나 마이너리그에서부터 불펜으로 훈련받았던 선수는 냉정히 말해 선발 투수가 되지 못하는 결격사유가 어딘가 한 곳은 있는 선수라고 봐도 무방하지.’

과거의 투수 유망주가 선발에 적당하지 않다는 최종 판정을 받아 불펜이 되고 클로저는 그들 중에 가장 좋은 투수다. 이건 부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팩트다. 체력이나 서드 피치의 장착 등의 문제가 있는 투수가 불펜투수가 된다.

인적 자원의 풀(Pool)이 그런데 비슷한 유형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다양한 구종을 던질 수 있고 체력이 좋으면 불펜투수가 되지 않는다. 절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비율로 그렇다.

클로저는 야수나 선발 투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것 같은 인상이 있는데 태생 때문에 그렇다. 불펜과 선발의 대우에 차이가 없었다면 나부터라도 굳이 선발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애초 유망주 시절부터 전문 마무리를 목표로 훈련받은 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선발 경쟁에서 탈락하고 마무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많기 때문에 곧 대우가 하향 평준화되기 마련이다.

메이저리그에서 FA 시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1당 500만 달러에서 7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상위권 FA 선수들의 총 계약금액을 전체 WAR로 나눠보면 그 정도가 나온다. 과거의 일이지만, 2022시즌을 앞두고 ML 사무국은 선수 노조에게 WAR로 연봉산정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

세이버메트릭스로 마무리 투수를 평가해보면 리그를 대표하는 수준의 마무리의 WAR은 3~4 정도가 나온다. 리그 최상위권의 투수가 6~8 정도가 나오는 것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세이버메트릭스의 이용이 확대될수록 불펜의 대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해졌다라는 좀 우스운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었다.

최상위권 선발 투수의 총액 2억 달러 계약은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활약했던 마무리투수들의 연봉은 아롤디스 채프먼의 5년 8,600만 달러 계약이 역대 최대 규모의 계약이었다.

‘조금 앞 시대이긴 하지만 그 위대한 마리아노 리베라도 3년 4,500만 달러 정도밖에 못 받았었지.’

어쨌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양한 구종을 장착한 마무리투수는 존재할 수 없고 대개의 마무리 투수 스타일은 비슷하다.

주자를 2루에 두고 풀카운트가 되었다. 그리고 닉 코스비의 선택은 정면승부가 아닌 코너워크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타자의 스윙이 따라와 주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계산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는 오히려 타격 존을 좁혔고 그 결과 1루가 채워졌다. 서로의 고집이 부딪쳤지만, 여유 있는 팀의 고집이 우세했다.

“잘 참았어.”

“그래. 이거지.”

우리 더그아웃에 이제 앉아 있는 선수는 없다.

‘아! 체이스 넌 앉아야지.’

2사 1, 2루 이제 우리 팀에서 가장 정확한 타자들이 연달아 나오게 된다.

그라운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10월의 오후는 선선했지만, 선수와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어느 사이 조용히 다음 회를 준비하며 멘탈 관리 중이던 체이스 마저 관심 어린 눈으로 이 투타대결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정말 어렵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말로 흘러나와 버렸다.

“그럼 월드시리즈인데 쉽기야 하겠어?”

침착하던 소르카마저 냉정을 유지하는 데 실패해 안절부절못하는 듯이 보였다. 그의 손이 더그아웃과 그라운드를 구분하는 철제 난간 위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뭘 그렇게 떨어. 팔짱이라도 껴. 정신 사나워. 어떻게든 되겠지.”

태연한 척 말을 했지만, 나도 이미 팔짱을 끼고 필사적으로 몸의 떨림을 참고 있다.

“알버트 녀석. 생각보다 태연하네.”

지켜보고만 있어도 이 정도인데 어떻게 타석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쟤라고 제정신이겠어? 투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소르카. 혹시 이런 승부해본 적 있어? 질문이 좀 이상했나? 그냥 알아서 들으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라도 해야지 그냥은 못 보겠다.

“승부야 늘 했지. 그렇지만, 이 정도 부담감을 가지고 마운드에 섰던 적은 없었던 것 같군.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긴 해.”

“난 하기 싫어. 내년엔 좀 편하게 이겼으면 좋겠어.”

정면을 주시하던 소르카가 고개를 돌려 빤히 나를 쳐다본다.

“풋. 너도 참 신기한 머리구조를 가졌네. 올 시즌 우승도 아직인데… 내년 생각이 나?”

“몰라. 아무튼 올해 할 수 있으면 내년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그냥 떠올랐어. 지금 내 머리가 정상이 아니어도 할 수 없지.”

나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따악-

돌연히 들려온 타격음이 오라클 파크의 소란함을 뚫고 날아왔다.

“만세!”

“끝났어.”

“알버트! 이 미친놈이…”

저물어 엷어져 가는 햇살 사이를 한 줄기 하얀 선이 비상하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다. 오라클 파크의 함성이 갑자기 열 배쯤 커졌다.

“아! 미치겠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흐흣… 하하핫.”

작게 시작된 웃음이 몸집을 키워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죽어도 여한이… 많겠네.’

반지를 얻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벌써 갈 수는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관중의 광란의 환호가 오라클 파크를 덮는다. 이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 이럴 줄은… 아아!”

소르카의 목소리가 축축하다.

‘응? 뭐 하는 거야? 설마 울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