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급하면 조막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평소 같으면 아이싱을 하러 가야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어 그냥 벤치에 눌러앉았다.
급격한 운동은 사용 근육의 온도 상승과 함께 조직에 미세한 손상을 피할 수 없다. 보통은 휴식과 영양 섭취를 통해 자연스럽게 회복되지만, 충분한 휴식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근육과 인대에 부하를 주거나 하면 손상된 세포에 염증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부위로 혈액이 몰리게 된다.
‘멍든다는 말을 너무 길게 했네.’
투구는 국소부의 근육에 과부하를 주는 단시간의 과도한 운동이다. 그렇게 부하가 걸린 근육의 온도를 아이싱을 통해 바로 낮추게 되면, 혈관을 수축시켜 혈류량이 낮아진다.
‘염증 원인 물질의 분비량을 줄여 통증과 부종을 예방하기도 한다지.’
평소에는 4일이라는 투구 간격 때문에 회복 기간을 단축시킬 필요가 있지만, 난 이제 올 시즌 등판이 없다. 즉, 자연적인 회복시간을 아주 길게 가질 수 있다.
‘그래도, 늘 하던 걸 안 하니까 좀 찜찜하긴 하네. 이것도 루틴인가?’
그런 아이싱이지만 안 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게 있다. 선수 생활 내내 전혀 하지 않았지만 길게 선수 생활을 했던 투수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싱 무용론과 같은 주장도 있다.
‘개인 간에 회복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큰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음.’
사실은 그런 이유로 내가 아이싱을 해왔던 건 아니었다.
‘일종의 강제 습관화가 되었다고나 할까?’
어릴 때부터 으레 해왔던 것이라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 해왔었다. 그래서 지금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너무 인상 쓰는 것 아니야? 교체가 그렇게 불만스러워?”
소르카다. 투구 중엔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었는데 자연스럽게 소르카가 말을 건네 왔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기는 해도 별로 불만은 없어. 왜 아닌 것 같아?”
“하핫. 교체 후에 마운드를 그렇게 쏘아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겠어?”
“내가 그랬나? 그랬다면 그냥 평소와 좀 달라서였을 거야. 아이싱도 안 하고… 지금 더그아웃도 너무 조용하잖아.”
그랬다. 대부분 이기든 지든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애써 환호를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설레발은 뭐다 이런 건가?’
긴장감 속에 억누른 숨죽인 환희와 얼핏얼핏 삐져나오려 하는 확신이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더그아웃의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좋기는 한데 조금의 불안함도 있고… 뭐 그런 거지. 체이스가 잘 해낼 거야. 이제 작년의 그 애송이가 아니라고.”
소르카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그렇게 희망을 토로했다.
8회 초 2사 볼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아직까지는 투수가 유리한 볼카운트이지만 그렇게 많은 여유는 없다. 풀카운트가 되면 타자에게 플러스가 있다.
투수와 타자의 의지가 부딪쳐야 할 때다. 보통 이럴 때 투수는 가장 자신 있는 위닝샷을 던진다. 타자가 알고도 못 치는 그런 공을 이 타이밍에 던질 수 있느냐에 따라 평범한 선수로 남느냐 일류로 발돋움할 수 있냐가 결정된다.
체이스의 그 공은 슬라이더다. 강력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조합.
체이스가 지난 시즌과 올해에 걸쳐 발전한 것이 그 부분이다. 원래 패스트볼의 제구는 괜찮았지만 슬라이더의 제구가 불안했었다. 그러나 점점 슬라이더를 의도적으로 볼, 스트라이크로 구분해 던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면서 성적 역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금은 슬라이더 열 개를 던지면 일곱, 여덟 개는 의도한 곳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왔다.
“존 안으로 넣을 수 있을까?”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 비슷하면 배트가 따라 나올 텐데…”
소르카가 파워 피처치고는 유인구에 능하지만 이럴 땐 파워 피처로서의 본질이 드러난다. 피네스 피처와 파워 피처는 생각하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
강력한 키킹에 이은 가속, 완벽한 와인드업 자세에서 돌연히 뻗어 나온 휜 선 하나가 공간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망설임 없는 주심의 콜이 떨어졌다.
“우와와!”
“그래 그거지.”
숨을 죽이던 선수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참았던 숨과 함께 환호가 터진다.
“헐! 슬라이더가 아니야?”
강력한 하이패스트볼이 인코스로 향했다. 이 코스의 공략을 타자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힘없이 끌려 나온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하핫. 체이스 정말 나날이 좋아지네. 나도 그렇고 소르카도 아웃코스 낮은 쪽만 예상했었는데 타자인들…’
마지막 공이 벤치의 지시였는지 베그웰과 체이스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자의 허를 찌르고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것이면 족하다. 체이스가 한쪽 손을 번쩍 쳐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라운드에 관중들의 함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한 점만 더 내자.”
“그럼 끝나는 거야.”
“무조건 선두타자 진루해야 해.”
8회 말을 맞이해 공격에 나서는 타자들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온다. 나도 제발 이번 공격이 우리 팀의 마지막 공격 기회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능할까?’
상대 투수가 바뀌긴 했다. 오늘 쾌투를 이어가던 마이어스가 내려갔다. 그도 3일 휴식 후 등판에서 할 만큼 했다. 그에게도 아마도 나처럼 급격한 스테미너의 하락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대단했지. 7이닝 1실점이면… 상대 투수가 나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야. 자화자찬 같지만, 내가 좀 유능하잖아.’
아무리 생생한 불펜투수라도 마이어스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이번 공격은 7번 타자부터 시작된다. 우리 팀의 7, 8, 9번은 멘도사 라인에도 잘 걸치지 못하는 내야수 트리오다. 멘도사 라인은 대개 리그 평균 타율에 미달하는 1할에서 2할대 극초반 정도의 타율을 말한다.
‘그런 선수가 있었어. 마리오 멘도사라고…’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유격수와 3루수로 9시즌을 뛰면서 5시즌이 1할대의 타율이었다. 그 외의 시즌은 2할 초반의 타율을 기록한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대단한 선수다. 그 정도의 타격 실력을 가지고 9시즌이나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히 출전할 수 있었던 선수는 거의 없다.
우리 내야수들도 그와 별 차이가 없었다. 결의에 차서 타석으로 나가는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별 기대가 안 생긴다.
“너무 티 내지 마. 오늘 왜 그 모양이야?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소르카가 살짝 웃으며 주변에 들리지 않게 살짝 속삭였다.
“내가 뭘?”
못 알아듣는 척하는 이것이 내 필살기다. 관심법 같은 건 허황된 이야기다. 시치미 떼기는 최고의 옵션이다.
“너무 그러지 마. 테일러 같은 경우에는 챔피언십에서 날았던 게임도 있었잖아. 혹시 알아? 그리고 너무 막연한 이야기 같지만, 게임에서 운이란 게 연속적으로 터지는 경우도 많고… 팀플레이 해야지. 너도 간절히 기원해 봐. 안된다고 손해날 건 없잖아.”
소르카의 말이 조금 솔깃하게 다가온다. 그렇긴 하다. 챔피언십 시리즈를 그렇게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에는 테일러의 활약으로 이긴 경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가 그렇게 활약했던 건 그 딱 한 경기뿐이었다.
포스트 시즌에서 열몇 경기를 치르는 동안 한 게임이라면 너무 확률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예가 있었다는 것과 그런 적이 아예 없는 건 완전히 다른 경우다.
‘그래. 그런 것도 있고, 월드시리즈에서 트리플 플레이가 백 년도 넘은 기록이었다는데… 브렛도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멘도사도 통산 홈런이 4개인가 있었다는데 혹시…’
내가 기도하면 일가견(一家見)이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절, 선녀보살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을 방문해 봤다.
‘급한데 어딘들 어떻겠어.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밑져야 본전이지. 자! 그러면 누구부터 시작해야…’
타악-
갑자기 심상치 않은 타구음이 귓전을 때린다. 기원에 대한 응답이 너무 빠른 것 같다.
‘헉! 바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이렇게…’
“가라!”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큰 타구였다.
“어어어…”
맞아 나가는 타구음과 초반 궤적으로는 담장을 넘어갈 것이 확실해 보였던 타구가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낙하하고 있었다.
“안 돼! 하아!”
너무 허탈하다. 타구가 우중간의 가장 깊은 곳 바로 앞에서 잡혔다. 오라클 파크에서 그곳은 홈 플레이트에서 126m 떨어져 있다.
“124~5m는 날아갔겠지?”
“아마도 그 정도는…”
소르카가 넋이 빠진 목소리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세상에 120 몇 미터짜리 우익수 플라이라니 그런 게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타구가 너무 떴어. 발사각만 좀 낮았어도…”
“담장을 앞으로 더 당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홈구장이 배신을 때리면 곤란한 거잖아. 이런 빌어먹을… 음.”
말하다 보니 이런 발언은 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말끝이 흐려졌다. 바로 얼마 전 챔피언십 경기에서 내가 지금과 반대 경우의 당사자였다.
‘어휴! 그때의 행운이 이런 식의 반대급부로 돌아오는 건가?’
그냥 짜증스럽다.
‘가만… 기도의 효과가 좀 부족했나? 막 시작하려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
좀 심화된 내용이 저 위쪽에 전달되었으면 몇 미터쯤은 더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짜증을 넘어 좀 진지하게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뉘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지금 자세한 걸 약속하긴 어렵지만, 우승만 하면 무엇이든 못해드리겠어요. 바로 홈런이 어려우면 짧은 안타라도 한 개 우선 보여주세요. 서로의 신뢰가 쌓여야…’
7번 타자 테일러는 포스트 시즌에서 드문 경우이긴 했지만 실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8번 크로포드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리고 그는 올 정규시즌 홈런이 없었다. 통산 홈런이 몇 개 있긴 했지만 그건 다 그가 FA가 되기 전 로키스에서 뛰었을 때 있었던 거라고 한다.
한때 그에게 FA 계약을 주고 프런트가 속았다고 펄펄 뛰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그가 로키스에 있을 때 아주 잘 쳤던 건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훌륭한 타자였다고 한다.
‘연간 1~2개 정도의 홈런이야 못 쳐도 상관없고, 쿠어스 필드나 오라클 파크나 짧은 안타를 쳐내는 능력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판단해 계약을 맺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그 원인이 무엇이든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하는 6년 동안 그렇게 홈런 못 치기도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홈런을 바라는 건 너무 과한 희망인 것 같아 기도의 바람 수준을 조금 낮췄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다.
‘크로포드에게 홈런이라니 그건 좀…’
틱-
간절한 기도에도 이번엔 별 반응이 없었다. 빗맞은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투 아웃.
지금 한 점이면 경기 결과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데 많이 아쉽다. 득점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여러 신님들도 물 건너오기는 힘든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