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넘치는 것보다 모자람이 낫다
어떤 누구도 내 공의 무브먼트에 대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그의 말 때문에 스스로 내 투구영상을 반복해서 살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게 어떤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 공을 가장 많이 받아본 포수다. 어떤 경우에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베그웰이 말하는 건 그냥 느껴지는 직감의 영역일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었지.’
나보다 내 공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베그웰이다.
‘이것 참! 미치겠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말을 꺼냈다는 건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하는 말이 내가 그만 던져야 한다는 뜻이야?”
“아직은 잘 모르겠어. 확신을 가지기에 공 두 개는 너무 적은 숫자야. 갑자기 회전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몇 개 더 보자고. 어쨌든 이번 타자는 마무리해야 되지 않겠어? 천천히 상대해 보자고. 경우에 따라서는 볼넷을 주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지.”
베그웰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몇 개 더 던져보고 아니면 내려가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휴! 쪼끔 섭섭해지려고 하네. 야! 그런 말 할 때는 위로도 좀 곁들이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뭐… 아쉽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
“현실과 위로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래. 너만 인정하면 되는 일인데… 위로 같은 건 게임 끝나고 해도 되는 거잖아. 왜? 지금 해줄까? 니 마음 진정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이미 늦었다. 유우머의 기본은 타이밍이다. 투구처럼.
“됐어. 그거 농담한 거지?”
“아니,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야.”
베그웰은 웃지도 않았다. 이제야 웃음이 난다.
“풋. 알았어. 조심해서 던질게. 사인이나 똑바로 내.”
위험한 타구가 있었지만, 단지 위험했을 뿐이다. 현실은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절대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볼카운트이다.
오른쪽 타자의 인코스 낮은 쪽으로 싱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볼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면 대개 유인구를 가져가지만, 가끔 인코스 낮은 스트라이크 존을 패스트볼로 바로 공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중의 덫이다. 애스트로스의 유능한 5번 타자가 볼카운트에 따른 그런 패턴을 숙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쩌면 좋은 타자라서 먹힐지 모르는 볼 배합이다.
생각 없는 타자라면 가끔씩 나오는 이런 볼 배합에 대한 대비 자체가 없을 것이고 대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타격 능력이 떨어지면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어낼 수 없는 코스다.
‘승부구처럼 타자에게 보이려면 최대한 빠르게…’
90마일에 이르는 패스트볼의 스피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싱커를 최고 구속으로 던지면 85마일은 찍어낼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던지면 싱커의 무브먼트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지금 이 볼 배합의 핵심은 스트라이크처럼 느껴지는 볼이다.
타자가 90마일과 85마일을 순간적으로 구별하기는 무척 힘들다. 그게 가능했다면 체인지업의 출현은 불가능했다.
패스트볼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순간 떨어져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야 한다. 상당히 힘든 미션이다.
‘베그웰 이 자식은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 볼을 던지라고 해.’
테스트인 것 같다. 타자들에게 어퍼스윙이 보편화 된 후 몸쪽의 낮은 스트라이크는 홈런이 가장 많이 나오는 코스다.
현재 일반적인 통계로 보면 패스트볼은 낮은 코스가 투수에게 불리하고 변화구는 높은 쪽이 위험하다. 패스트볼은 몸쪽으로 붙을수록 타격지표가 떨어지고 변화구는 타자의 몸에서 멀어질수록 같은 결과가 나왔다. 강점과 약점은 서로 붙어있다.
‘이거 자신 없으면 스스로 내려가라는 얘기지? 빌어먹을… 내려갈 때 내려가더라도 이건 꼭 넣고야 만다. 베그웰 잘 받아라.’
나의 와인드업을 바라보는 타자의 눈초리가 매섭다.
틱-
‘아!’
좀 빗맞았지만, 유격수 쪽으로 제법 빠른 타구가 나왔다. 유격수 테일러는 견고했다. 가벼운 풋워크로 타구를 따라잡은 뒤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하아! 확실히 정상이 아니긴 한가 보네.’
타자는 볼 배합에 완전히 넘어갔다. 싱커가 정상적으로 들어갔다면 헛스윙이 나왔어야 했다. 확실히 덜 떨어졌다.
유격수의 1루 송구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마음을 굳혔다.
‘확실히 덜 꺾이는 게 맞네. 손아귀 힘이 떨어진 것이겠지. 점수 차가 좀 있다면 몰라도 1점 승부에서 이건 아니야.’
이대로 계속 던지는 건 고집부리는 것밖에 안 된다. 물론 운이 좋다면 남은 아웃카운트 4개는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체경기의 결과를 내 개인의 운에 맡겨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규시즌 게임도 아니고… 아니, 그런 경기라도 아닌 건 아닌 거지. 기록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차라리 잘된 건가?’
날 주시하고 있던 베그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임 요청과 함께 더그 아웃에서 기다렸다는 듯 감독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월드 시리즈 6차전 아웃 카운트 네 개를 남기고 잔루 없이 마운드를 넘겼다. 7과 3분의 2이닝 무실점.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
“어! 투수 교체입니다. 라드 감독 So에게서 공을 건네받았습니다. 오늘 무적의 구위로 애스트로스를 압살했고, 아직 투구 수가 90개도 되지 않았는데 투수 교체라니요. 그 에러성의 내야 안타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무안타였을 겁니다. 누가 나오든 더 잘 던질 거란 보장이 있나요? 이건 아니죠.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요?”
그래엄은 답답했다. 자주 이 정도 투구 수에 교체가 이루어지긴 했었지만 오늘 게임은 월드시리즈 최종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기고 있고 이기면 그대로 월드시리즈가 끝난다. 그런데 교체라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았다.
“드문 경우지만 So가 100구 이상 던진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의 기록이 증명합니다. So는 후반에 어이없이 무너지는 투수가 아닙니다. 이 교체는 정말 바보짓이 될지도…”
“밖에서 보는 상황과 직접 경기 안에서 겪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죠. 잘 막아내긴 했지만, 맞아 나가는 타구 질이 달라졌다고 벤치에서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캐스터 그래엄이 열을 내며 급하게 말을 내뱉다 호흡을 위해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해설자 윌리엄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월리엄은 말을 이어가면서도 연신 손짓으로 그래엄에게 컴 다운(calm down)을 주문한다.
지금 그래엄의 말은 자이언츠 골수팬이나 할 만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역 방송의 특성상 자이언츠 쪽으로 쏠림이 나타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의도하기도 하지만 이번엔 너무 과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캐스터의 오버로 그냥 넘어가겠지만, 만약 경기 결과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 설화로 번질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중계방송을 하면서 감독, 코치를 비난하다니 안 될 일이다.
“하핫. 제 팬심이 예기치 않게 드러나 버렸네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분들도 저와 똑같은 심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 과한 표현을 했습니다. 이 점 사과드립니다.”
그래엄도 윌리엄의 신호에 바로 실수를 깨달았는지 자기 발언을 수습했다.
“아! 바로 클로저 체이스 선수가 나오는군요. 정규시즌에서 8회 등판은 없었는데 라드 감독이 강수를 구사합니다. 올 정규시즌에서 1승 1패 35세이브 2블론 평균자책 1.55를 기록했었고, 포스트 시즌에서도 이전까지 7경기에 등판해 블론세이브 없이 6개의 세이브를 올리며 맡은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서 아직까지 실점이 없습니다.”
“체이스 선수가 실점이 없어요? 아! 그랬나요? 역대 포스트 시즌에서 무실점을 기록한 선수가 있었나요?
모르는 척 그래엄이 해설자 윌리엄에게 질문을 던졌다. 체이스가 마운드에서 연습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면을 내보낼 수 없는 라디오 중계의 속성상 무엇인가 빈 시간을 메울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허헛. 그런 기록을 논하기에는 체이스 선수의 표본이 너무 적어요. 포스트 시즌의 마무리투수를 이야기하자면 마리아노 리베라 선수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되죠. 그의 2009년 포스트 시즌 기록을 살펴보면 총 12경기에 등판해 16이닝을 던졌거든요. 그리고 단 1실점만 했지요. 그래도 평균자책이 0.56이 되지요. 그런데 체이스 선수는 7게임서 도합 7이닝만 던진 거니 지금까지 무실점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요.”
“하핫. 그건 그렇겠네요. 그럼 리베라 선수는 포스트 시즌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인 건가요?”
“리베라의 포스트 시즌 통산 성적은 총 96경기에 등판했습니다. 도합 141이닝을 던져 8승 1패 42세이브를 했죠. 평균자책은 0.70인데 WPA(승리 확률 기여도)라는 지표로 따져보면 더 어마어마하지요. 그의 통산 포스트 시즌 WPA는 11.7인데 불펜투수 2위 기록이 2.7이거든요. 선발투수 중 가장 높은 커트 실링도 4.1입니다. 타자까지 범위를 넓혀도 타자 1위인 데이비드 오티스가 3.2니까 사실상 포스트 시즌에서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가 없는 셈이죠.”
그래엄이 흘깃 바라본 마운드에서 아직 체이스의 연습 투구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체이스 선수에게는 올 시즌이 처음 경험하는 포스트 시즌일 텐데 처음부터 이런 좋은 모습을 보였다면 앞으로 그런 기록들을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음. 엄밀히 말해서 첫 포스트 시즌은 아니고… 지난 시즌에 1이닝을 던진 기록이 있기는 하죠. 그 정도라서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이긴 한데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던지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포스트 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킨 선수라면 K-로드가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선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약칭 K-로드는 2008년 62세이브라는 역대 한 시즌 최다세이브 기록을 가진 레전드다.
“그렇습니다. 그는 2002년 애너하임-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었죠. 정규시즌에서는 단 5와 3분의 2이닝만 던졌지요. 포스트 시즌에 마무리는 아니었습니다만, 마무리 앞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기용되어 ALDS에서부터 월드 시리즈까지 18.2이닝을 던지면서 5승 1패를 거두었습니다. 아마 이게 루키 불펜투수가 거둔 최고 성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씀 듣고 보니 체이스 선수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군요.”
“그럴까요? 전 그가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리베라가 양키스 소속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들 그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거의 매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팀의 투수였기에 가능한 기록이었죠. 작년부터 자이언츠의 전력 상승이 놀랍습니다. 신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최소 몇 년간은 상승세가 꺾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체이스 선수가 이런 팀에서 뛸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죠. 잘할 겁니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