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53화 (153/200)

153화. 무엇이 문제인가!

‘정말 다행이네.’

더그아웃으로 향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3루수 브렛과 유격수 테일러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연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브렛은 비로소 웃고 있다.

그는 자격을 갖췄다. 스스로 빠진 지옥에서 혼자 힘으로 기어 올라왔다.

‘후훗. 마지막엔 날아서 온 건가? 한 회에 타구 세 개가 다 3루 방면으로 향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게 그렇게 될 줄이야.’

아까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브렛을 가볍게 질책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냈지만, 아마 대체자원이 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브렛은 바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팀 내에서 입지는 끝났겠지.’

예측이 안 되는 선수를 쓰는 감독은 없다. 불안해서 못 쓴다. 특히 라드 감독은 안정적인 선수를 좋아한다. 그래서 신인보다는 묵은 선수들이 기용 1순위다.

‘그 아래서 알버트가 주전으로 발돋움한 게 기적적인 일이야.’

그리고 한 번 믿음을 얻으면 여간해선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신인들은 적응을 위한 기간이 필요한데 고참들이 난조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나 그게 그거라고 믿는다. 같은 조건이라면 경험 많은 쪽을 선호한다.

그런데 그런 성향의 감독에게 대체선수가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면 답이 바로 나온다.

입지를 잃은 선수가 25인 로스터에 계속 머물기는 불가능하다. 유틸리티 선수가 흔하진 않지만, 자금력을 갖춘 빅마켓 팀이 구하려 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는 중요한 시점에서의 파인 플레이로 시간을 좀 더 얻었다.

‘브렛도 경쟁력을 가지려면 타격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어. 수비로 겨뤄보기에는 우리 주전 내야수들의 수비 능력이 너무 막강해.’

어느 순간이든 올라서지 못하면 대체선수로서는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그건 과정이어야지 결과여서는 선수로서 수명이 길 수가 없다. 물론 그것을 전문으로 삼는 선수도 소수 있지만, 그들도 그것을 처음부터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정일 줄 알았다가 치고 올라가지 못한 탓일 테지.’

오늘의 트리플 플레이를 계기로 브렛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누구에게 기울고 그런 사적인 감정은 없다.

‘음. 오늘 그런 게 생긴 건가? 삼중살은 너무 멋있었어. 우승을 위한 7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그 주역을 좀 응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어찌 되었든 후반 흐름은 우리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이제 두 이닝 남았다.

***

“숨넘어가는 줄 알았어요. 진정 좀 하세요.”

해리스 사장은 7회 초가 끝났음에도 앉을 줄을 몰랐다. 괴로움에 함부로 움켜쥐었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늘 단정하던 모습이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사장을 달래는 단장의 몰골도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윌리스 단장의 회복이 조금 더 빨랐다.

“휴우!”

해리스가 긴 한숨과 함께 털썩 주저앉아 의자 등받이로 겨우 몸을 지탱한다.

“진짜… 이런… 다 이겨있는 경기가… 하마터면…”

“큿. 완벽하게 이기진 못했죠. 이런 걸 박빙이라고 표현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장의 부드러운 반박에도 사장은 전혀 굽힐 생각이 없었다.

“무슨 말씀을… 우리 에이스에게 득점하는 게 그리 쉬운가요? So는 5회 이후 평균자책이 그 이전보다 낮은 투수입니다. 통계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이죠. 지금 투구 수도 얼마 안 되고…”

고비를 넘기고 난 경기가 해리스 사장에게는 이제 다 이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거야 그에게 한계 투구 수를 확실하게 해준 팀의 몫이 크겠죠. So는 영리하게 마지막 20구 정도에 초반부터 아껴둔 힘을 쏟고 미련 없이 내려오는 패턴으로 의도적 통계의 오류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으음. 무엇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해리스 사장의 눈에 잠깐의 의문이 스쳐 갔다.

“So의 한계 투구 수는 90~100개 정도입니다. 그것도 전력투구 비율이 50% 미만일 경우인데 오늘은 초반부터 정말 진심으로 던지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지금 투구 수는 적지만 끝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투수든 힘이 떨어지면 얻어맞기 마련입니다.”

“그런 거야 라드 감독이 조절하겠죠. 우리 팀 마무리 투수가 약한 것도 아니고 연투든 뭐든 시켜서 오늘 끝낼 수 있으면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장의 말이 맞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종종 알고도 행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So가 순순히 내려오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예? 상당히 냉철한 구석이 있는 친구인데 그럴 리가요. 스스로 안 되겠다고 느끼면…”

“이런 경기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상태일 테니까요.”

아드레날린은 척추동물의 부신 속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극적인 상황에서 위험으로부터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교감신경 전달물질 중 하나이다. 주로 교감신경을 자극한다.

“So는 지금 흥분 상태일 겁니다. 극적인 상황이 지속되다 결국 극복해냈지요. 저장된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뇌로 가는 혈류량이 늘어나고 진통 효과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엔도르핀이 분비됩니다. 지금 하나도 피곤하지 않고 몸이 아주 가뿐하게 느껴지겠죠. 그런 상태에서 감독이 교체를 이야기한다고 순순히 응하겠어요? 본인이 자신 있는데…”

“너무 앞서가는 생각이 아닐까요?”

해리스는 So가 끝까지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트리플 플레이가 메이저리그에서 몇 번이나 나왔을까요?”

“글쎄요. 그렇게 많지는 않겠죠.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건 같은데…”

윌리스 단장이 갑자기 트리플 플레이 이야기를 꺼내서 좀 이상했지만, 사장은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총 700여 회 정도 나왔죠. 그리고 월드 시리즈에서 나온 건 1920년 브루클린 로빈스(다저스의 전신)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 나온 것이 유일합니다.”

“그렇게나 드문 거였나요? 흔한 기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적을 줄은 몰랐습니다.”

참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해리스 사장의 머리를 스쳤다.

“So가 이 기록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야구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겁니다. 에러 두 번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천국을 맛봤죠. 불규칙한 이런 극적인 변화로 인해 지금은 일종의 도핑 효과를 누리고 있지만, 그 역작용으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8회를 주의해야 합니다.”

“감독이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라드 감독의 지휘 스타일로는 강제로 에이스를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에이스가 지금 자신감이 맥스에 이르렀고 처음 경험하는 트리플 플레이에 되는 날이라는 확신도 생겼다면…”

윌리스 단장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받았지만, 해리스 사장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장님께서 너무 낙관적인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저도 이 게임에서 우리 팀이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이길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우린 긍정적인 경우보다 부정적 결과가 나왔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았다. 프런트는 만에 하나 우리 팀이 졌을 때를 생각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냉정한 머리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7차전을 준비해야 한다.

끼익-

급하게 벌떡 일어나려던 해리스 사장이 앉아 있던 의자를 밀치고 말았다. 듣기 싫은 마찰음이 사방이 막혀있는 특별관람실을 메웠다. 일어난 해리스 사장은 뒤쪽에 마련된 바에서 싱글 몰트 위스키 한 병을 꺼내 5온스 잔에 절반쯤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제정신으로 경기 보기가 좀 어렵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

해리스 사장은 바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윌리스 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이언츠의 7회 말 공격이 무득점으로 마무리되었다.

***

“스트라이크.”

‘어? 왜 이러지?’

분명히 조금 더 아래쪽을 보고 던진 싱커였는데 덜 떨어졌다. 타자가 볼이라 판단했는지 스윙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끔 의도적으로 덜 떨어트리긴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집중력이 떨어진 모양이네.’

첫 번째로 꼽을만한 주의 대상인 4번 타자를 선두 타자로 맞이해 갖은 애를 써가며 범타 처리했다. 그런 후 맞이한 애스트로스의 5번 타자는 상대적으로 좀 쉬워 보였다.

‘조심해야 해. 쟤도 이번 시즌 홈런이 30개라고.’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내 마음이 춤추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원 아웃을 잡고 나서부터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린다. 이제 아웃카운트 다섯 개가 남았다. 마지막 고비다. 이번 회만 넘기면 마지막 이닝은 하위 타선이다.

현재 투구 수는 82구. 경기 시작 전 생각했던 것보다 투구 수 조절이 잘되었고, 힘이 그다지 떨어진 것 같지도 않았다. 7회를 마치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감독의 시선을 무시했다. 올 시즌 코칭 스탭과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내가 요청하지 않는 한 90구 이전에 교체는 없다.

‘오늘은 웬만하면…’

아니, 웬만하지 않아도 반드시 끝까지 가고 싶다.

‘이번 회를 90구 안쪽에 마칠 수 있으면 가능성 있지.’

꼭 90구가 넘지 않더라도 대개 비슷한 투구 수에 이르면 새로운 이닝을 맡기지 않고 교체하곤 했었지만, 오늘은 끝까지 한번 던져볼 생각이다.

몸 관리가 중요하긴 하지만, 오늘 같은 경기라면 예외로 할 만하다는 생각이다.

‘오늘 끝내면 며칠 휴식이 아니라 한두 달 쉴 수 있는 건데… 반지도 얻을 수 있고… 아! 그동안 잊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꼭 반지를 얻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몸이 멀어져서 마음이 멀어진 건가? 그럴 리가… 큰 승부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지. 아무튼 오늘 경기만 끝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일단은 앞에 타자부터 처리하고…’

2구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다.

따악-

‘헉!’

총알 같은 타구가 1루 베이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파울.”

1루심의 수신호를 확인한 심판이 파울임을 확인해준다. 내 위치에서 보기에는 라인 안인지 밖인지 얼핏 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라인에 근접한 타구였다.

‘이거 뭐야. 왜 맞은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는데 베그웰이 마운드로 걸어 나온다.

‘왜? 뭐지?’

베그웰은 좀처럼 마운드에 오지 않는다. 포수의 잦은 마운드 방문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그런데도 지난 이닝에 이어 연속적인 방문이다.

“지금 네 공 상태가 이상해.”

“무슨 말이야? 공이 어떻게 이상한데?”

“네 특유의 무브먼트가 나오질 않아. 어떻게 된 거야?”

이유가 궁금한 건 나인데 베그웰이 내게 되묻고 있다.

“어느 공이 그렇다는 거지?”

“앞에 싱커도 그렇고 이번 슬라이더도 마지막 순간 밋밋해졌어.”

예전에 들었던 베그웰의 말에 따르면 내 브레이킹 볼의 무브먼트는 마지막 순간 한 번 더 꺾이는 것 같은 독특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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