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52화 (152/200)

152화. 위기를 넘어

“악!”

타구 처리에 대한 큰 감정표현은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처럼.

고함을 지르고 바로 실수를 깨달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 내 비명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관중의 커다란 탄식에 묻혀버렸기를 바랄 수밖에….

3루수 브렛이 펌블을 했다. 평범하게 보이는 땅볼이었는데 그래 버렸다.

‘그걸 한 번에 못 잡으면 어쩌냐구. 정말 맛이 가네.’

글러브를 맞고 옆으로 떨어져 구른 볼을 다시 따라가 잡았지만, 이미 송구 타이밍이 늦었다. 그나마 억지로 송구하지 않은 게 침착한 대응이었다. 급한 마음에 그렇게 송구하면 대개 엉뚱한 방향으로 공이 날아가기 마련이다.

‘거기까지 생각했겠어? 넋이 나가버려서 송구를 못했겠지.’

3루수 쪽으로 향하려던 시선을 억지로 돌렸다.

‘이유? 무엇이든 있겠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마지막에 불규칙 바운드가 있었다든지 더블플레이 타이밍을 잡기 위해 서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

충분히 이해할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야구는 단체경기이고 지금 우리는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한 토너먼트의 결승을 치르고 있다.

여기서 실수는 죄악이고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만년 대체선수가 기회를 잡았는데 앞선 실수가 부담이 되어… 그런 걸 인간적으로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고의 무대에는 최고의 팀이 필요한 거지. 그 구성원이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해. 거기 실수 따위는 존재할 수 없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옛날 도공들은 도자기가 완성된 후라도 마음에 안 들면 깨 버렸다고 하던데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열이 너무 올라 어쩔 줄을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뜨겁다. 모자를 벗었다.

시원하게 내 안의 열을 외부로 분출하고 싶지만,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제나 현실이라는 장애가 있다.

‘지금 브렛보다 나은 대체자원이 없잖아. 어떻게든 달래서 데려가야 해.’

이런 현실적인 생각이 나를 자제시키고 있었다. 지금쯤 브렛의 정신은 이미 토막 났을 텐데 여기서 내가 스스로의 성질에 못 이겨 질러버리면, 그 토막이 가루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다시 마운드에 선수들이 모였다. 이번에 엉덩이가 무거웠던 감독까지 등장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안쓰럽다.

‘나도 이 정도로 머리가 아픈데… 경기 결과에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하는 감독이라면…’

장수하고 싶으면 은퇴하고 감독, 코치는 하지 말라고 하던데 그 말이 정말 피부로 느껴진다.

“야! 브렛. 똑바로 안 할래?”

라드 감독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헉! 지금 무슨 소리를…’

말하는 투로 봐서는 교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노골적으로 선수를 나무라면 곤란하다.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음. 그게…”

백지장 같던 브렛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변했다.

“더 잘하려고 하지 마. 내가 이번 시리즈 시작 전부터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했었잖아. 왜 그렇게 안 해?”

‘지금 이 이야기는 뭐야?’

방금 일어났던 플레이에 대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지금 2루 주자인 전 타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하란 말이야. 넌 대체선수잖아. 니가 수비에서 날았으면 벌써 주전이었지. 내야수들 타격이 다 거기서 거긴데… 내가 너한테 바라는 플레이는 딱 그만큼이야. 안정적으로 하라고. 지금 플레이는 뭐 하자는 거였지? 너 더블플레이 때문에 대시해서 잡으려다 놓친 거잖아.”

감독은 거침없었다.

‘하! 하필이면 왜 지금 그런 말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그렇게 선수 기죽여서 도대체 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무리하지 않고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아도 충분했었어. 지금 우리 투수가 누구냐고. 원 아웃 2루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애스트로스가 득점을 할 가능성은 희박했었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야? 브렛. 아무 생각 없어? 대답 좀 해보라고.”

‘그건 그렇지. 내가 좀 하긴 하지. 야수들은 투수를 믿어야지. 원 아웃만 잡았어도…’

“그게… 음.”

브렛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브렛의 입장이라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못 치는 내야수 중에서 난 빼주세요. 전 좀 치잖아요.”

1루수 필이 슬쩍 엉겨 붙었다. 무거워진 분위가 마음에 차지 않았나 보다.

“너도 마찬가지야. 니가 오늘 시원하게 홈런 한 방 쳐줬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났겠어?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 못해서 이 모양인 거잖아.”

감독이 필을 흘겨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가벼운 농담조의 말이었다.

“그거야… 오늘 마이어스 던지는 거 봤잖아요. 나만 못 친 게 아닌데…”

“그 마이어스보다 우리 투수가 더 잘 던지잖아. 그 결과로 이기고 있고… 아마 삼진 3개로 이번 이닝이 끝날지도 몰라. 좀 전에 누가 원 아웃만 잡았어도 두 개면 되는데 세 개보단 두 개가 쉽잖아. 야! 브렛 그렇지 않아?”

“뭐가…”

감독이 사정없이 브렛을 다시 몰아세웠다.

“연속 삼진 두 개가 쉬워 세 개가 쉬워? 내 질문이 어렵나?”

“그거야 두 개가…”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잖아. 그렇게 좀 플레이를 해. 할 수 있을 만큼만.”

감독은 브렛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내게 은근하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삼진이 그렇게…”

“번트 수비는 없어. 이제부터 타순이 3번부터라서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혹시 번트가 나오면 So. 그건 자네가 맡아. 시프트는 없어. 에이스를 믿어야지. 정상 수비. 이상이네.”

내 말을 자르고 자기 할 말만 하더니 감독이 휘익 더그아웃을 향해 가버렸다.

‘아이! 정말…’

애스트로스의 3번 타자는 올 시즌 20-20을 했다. 호타준족. 이런 사실에 미루어 짐작해 보면 번트 확률이 낮은 건 맞지만, 작전이라는 게 의외성으로 상대의 방심이나 약점을 찌르는 속성이 있다.

‘대비는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번트를 대비한 수비 위치 변형이 상당히 어렵다.

‘1루수를 당기면 그만큼 1루 주자의 리드폭이 늘어나지. 그러면 당장 견제구를 던지는 것도 어려워. 누군가 견제구를 받아줘야 하는데 1루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으면 답이 없어.’

3루수의 경우도 비슷하다. 베이스에서 멀어지는 순간 2루 주자의 도루에 취약해진다. 타자가 3루 방향으로 번트하는 척 3루수를 당기고 2루 주자의 도루. 이런 스토리는 가장 기본에 속하는 작전이다. 그런 경우 3루에서 누군가는 공을 받아줘야 하는데 유격수가 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결국 감독 말은 상대가 번트를 시도하면 주지 말라는 이야기잖아.’

주더라도 어렵게 대게 하라는 주문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감독이 마운드까지 직접 나타난 목적이 3루수 브렛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도 있었지만 날 다독이려는 것이 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무안타를 의식한 시점에서부터 내 상태가 좀 안 좋았던 것 같다.

‘언젠가 기회가 또 있겠지.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최소 몇 년은 갈 거잖아. 일단 여기서 막아야 해. 우승부터 해야지.’

아무 말 없던 베그웰이 내 팔을 툭 한 번 건드리고는 홈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다시 마운드에서 혼자가 되었다.

“플레이 볼.”

‘차근차근 가야겠지. 일단 아웃카운트를 하나라도 잡아야…’

타자는 정상적인 타격 자세다.

초구로 싱커를 선택했다. 느리고 각이 큰 싱커를 몸쪽으로 꽂아 넣었다. 일반 투수의 커브와 비슷한 궤적이지만, 발사각도 때문에 티 나고 그런 점이 없어서 좋다.

“스트라이크.”

예외에 예외를 더했다. 내 초구는 대개 아웃코스로 향한다. 거기에 내 싱커의 70%는 볼이다. 이건 절대로 게스 히팅이 안 된다. 역시 타자는 배트를 내지 않았다.

‘그렇지.’

첫 단추는 잘 채워졌다. 이제 정석적인 진행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변칙적으로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베그웰의 2구 선택은 하이패스트볼.

‘괜찮네. 느리고 빠르게라…’

천천히 투구판을 밟으며 투구를 진행하려는데 뭔가 찌릿하다.

‘아! 뭐지?’

이대로 패스트볼을 던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갑자기 엄습한다.

애스트로스의 3번 타자인 디에고 밀레토논 이번 시리즈 내내 타격감이 들쑥날쑥했었다. 어떤 날은 정규시즌에 보여줬던 호투준족의 모습이었다가 어떤 날은 무안타 경기를 하기도 했었다.

‘오늘은…’

가슴까지 올려진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급하게 바꿨다. 요즘 굳이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보지 않고 그립을 바꾸는 건 예전 고딩 때 가끔 하던 짓이다. 단순한 구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한 테크닉이었다.

지금 투구동작을 멈추면 보크(Balk)다. 베그웰에게 구종 변경을 알릴 수가 없다.

패스트볼 그립을 살짝 돌려서 커브그립으로 공을 잡았다. 자전거 타기처럼 몸으로 익힌 건 좀처럼 잊혀지지 않나 보다. 손끝으로 공의 실밥을 느끼며 원래 목표했던 존을 벗어난 상단보다 낮춰서 공을 뿌렸다.

‘베그웰. 잘 잡아줘.’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미친 짓을 하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왠지 모를 충동이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이젠 베그웰의 포구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빠트리지는 않겠지?’

밀레토의 타격 자세가 순간 바뀌면서 드래그 번트(drag bunt, 출루 목적의 번트)가 시도되었다.

탁-

패스트볼을 기다렸다는 듯 기민하게 기습적으로 감행한 번트다. 투구된 공이 떠오르고 배트의 위쪽으로 비켜 맞은 번트 타구도 떠올랐다.

‘업슛이었지. 하! 이거…’

3루 쪽으로 향하는 낮은 플라이볼이 떴다. 직감이 적중했지만, 타구를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는 없었다.

애매하다. 3루수 브렛이 미친 듯 달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요동친다.

‘잡아. 잡아야 해.’

못 잡으면 최소 진루타는 확정이고, 재수 없으면 무사 만루가 될 수도 있다.

상대 팀의 1, 2루 주자는 다음 베이스를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그들로서도 필연적 선택이었다. 인필드 플라이가 선언될 정도의 공이 아닌데 만약 멈칫하다 3루수가 일부러 공을 잡지 않으면 그대로 몰살이다.

우리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애스트로스도 마찬가지다. 브렛이 몸을 던졌다.

‘어허헉! 잡았어. 이건…’

심판의 콜이 나오기도 전에 벌떡 몸을 일으킨 브렛이 2루를 향해 번개처럼 공을 뿌렸다. 공을 받아든 2루수가 2루 베이스를 확실히 밟고 천천히 1루를 향해 몸을 돌렸다. 1루 주자는 2루 베이스 근처에 꼼짝하지 못하고 굳어 있다.

이윽고, 1루수에게 전달된 공이 트리플 플레이를 완성했다.

“우와아!”

마운드에서 감정표현을 자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지만, 이 장면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라클 파크가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관중의 환호를 등에 업고 더그아웃으로 날아갈 듯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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