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태클은 사양함
신발끈을 풀었다 묶으면서 흥분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려 할 때 주로 써먹던 애국가 부르기, 부모님 생각 이런 걸 해보려고 했는데 애국가 가사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에 얼핏얼핏 떠오르는 건 오늘 경기의 중요장면밖에 없다.
‘아까 그래서 어떤 구종을 던졌었지? 그때는… 아니야. 결과가 좋았잖아.’
생각이 자연스럽게 현재 상황을 정리해 보는 쪽으로 흐른다.
‘베그웰 말을 들어야 해. 걔 말 들어서 나빴던 적이 없었어. 그렇지. 항상… 이거 그러고 보니 오늘 별다른 위기가… 없었네.’
아직까지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1점 승부라 홈런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맞나? 맞겠지?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이거 잘하면…’
뒤를 돌아 스코어보드를 보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생긴다. 지금 내 기억력을 스스로도 신용하지 못하겠다. 확인이 필요하다.
급하게 스파이크 끈을 묶고 일어섰다. 끈이 단단히 묶인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발을 두세 번 구르며 슬쩍 뒤를 바라봤다.
‘하! 진짜 맞네.’
이어지는 0의 행렬이 아찔하다. 월드시리즈에서 퍼펙트게임은 딱 한 번 있었다. 1956년의 일이니 멀고 먼 옛날이다.
‘내가 오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건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업적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거면 이대로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행이 가능할지도…’
내가 은퇴할 때까지 현재 스탯을 유지하더라도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없다.
1936년에 세워진 명예의 전당 초기에는 은퇴선수와 현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후보였었지만, 점점 규칙이 세분화되어서 지금은 메이저리그 선수, 구단 관계자 및 감독과 심판, 옛 니그로리그 선수들로 한정되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리그에서 최소 10년 이상 선수 생활을 경력을 가져야 하고, 은퇴 후 5년이 지나야 한다. 그 조건이 갖춰지면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에서 6명으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 후보가 된다.
‘내가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7시즌 정도를 더 뛰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단순히 리그에서 1인분의 역할을 하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하면서 7시즌을 보내야 한다. 그건 자신 없다.
‘냉정히 판단해 보면 그건 어려운 일이지. 지금이라면 몰라도 30대 중반이 넘어서는 좀…’
이렇듯 후보가 되는 자격요건부터 갖춰내기가 만만하지 않다.
후보가 된 이후에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 위한 기자투표 가이드라인은 선수의 기록, 능력, 정직함, 스포츠맨십, 인성, 소속 구단에 대한 공헌도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기준으로 삼는다.
미국야구기자협회 소속의 10년 이상 야구를 취재한 전문기자 약 400여 명에게 75% 이상 득표를 해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다.
‘난 최악이지. 자격요건도 될지 안 될지 모르고, 기자들과 좋은 관계도 아니고…’
결국 정상적인 경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별해지면 된다. 새로운 첫 사례가 되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예외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누구도 따르지 못할 업적을 만들어 내어야 하지. 지금 같은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오늘 1승은 단순한 1승이 아니듯 오늘 퍼펙트도 많이 특별하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승리와 퍼펙트. 이 정도의 임펙트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
‘생각해 보니까.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잖아.’
의욕이 치솟는다. 몸이 가볍다.
‘그래 이거야 인생 한 방이지.’
빅게임 피처로서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흐흐흣,’
주심의 게임 재개 신호에 오른발로 투수판을 밟았다.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타자에게 투구에 들어감을 알린다. 이어진 스텝 백(step back) 와인드업을 위해 왼발을 한 발 뒤로 물렸다. 와인드 업(wind up)을 따라서 자연스러운 레그 리프팅(leg lifting, 키킹). 곧 올린 다리가 최고점에 이르고 테이크 백과 스트라이트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브레이킹, 플렉스 T, 이제 코킹(cocking)…’
투구동작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물 흐르듯 완벽한 연계에 가슴이 뿌듯하다. 릴리스 포인트(release point)에서 기가 막히게 공이 빠졌다.
‘팔로우 스로우(follow through)까지 이대로…’
이 모든 동작이 부드럽게 연계되어야 한다. 온 힘을 모은 릴리스 후 그 뒤 동작이 부자연스럽다면 몸에 무리가 된다. 어깨와 팔꿈치에 부담이 가중되면 어느 순간 부상이 찾아온다,
타악-
‘OK. 이거지.’
좀 막힌 타구음이다. 낮은 쪽으로 빠지는 싱커였는데 이런 타구음이라면 내야 땅볼이다. 마음이 놓인다.
‘어? 대시(Dash)해야지. 그렇게 뒤에서 받으면 어떻게 해!’
타석 바로 앞에서 강하게 튄 타구가 3루수 방향으로 향했다. 조금 애매한 구석은 있었지만, 당연히 앞으로 나와 잡아야 할 타구다.
‘이 타구를 기다리면…’
보통 타자라면 몰라도 상대 타자가 1번이었다. 보통 팀에서 1번 타자가 가장 빠르다.
‘아! 안 돼!’
3루수의 1루 송구 시야를 터주기 위해 옆으로 비켜나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안전하게 타구를 잡은 3루수의 빠른 송구가 내야를 갈랐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다.
‘아! 살았어.’
관중석의 소란함 때문에 1루심의 콜은 안 들렸지만, 두 손이 양옆으로 향하는 것이 가슴 아프게 두 눈에 박힌다.
“하아!”
참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갑자기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빌어먹을… 수비를 그따위로 하면 어떻게 해. 그러니 니가 백업이지. 아! 미쳐 버리겠네.’
이건 일종의 에러다. 하지만, 기록은 내야안타가 될 것이 틀림없다.
뒤를 돌아보기가 싫다. 지금 고개를 돌리면 내 감정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불안불안하더니… 여기서… 하아!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잖아. 웃어. 웃으라고.’
계속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아무리 애써도 맑아지지 않고 흐리기만 했던 정신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아무래도 난 제대로 된 자극이 있어야 똑바로 생각을 할 수 있나 보다.
‘여기서 열 내봐야 나만 손해지. 지금 브렛보다 나은 내야 자원이 누가 있어.’
대안 없이 일 저지르기는 싫다. 화를 내어도 이 상황을 종료시키고 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입지가 불안한 유틸리티 선수에게 부담을 주면 플레이를 더 위축시킬 뿐이다.
‘자기 딴에는 안전하게 볼 처리를 하려고 그렇게 플레이를 했겠지?’
나름 생각은 있었겠지만 결과가 나빴다. 프로레벨에서 계획과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지금은 생각보다 수습이 먼저다. 선두타자가 출루했다. 이건 위기상황이다. 마침 알맞게 베그웰이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걸어오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내야수들도 불렀는지 모두 마운드로 모여들고 있었다. 슬쩍 더그아웃 쪽을 봤지만, 감독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애스트로스가 2번 타자에게 번트를 시킬까?”
베그웰이 태연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어지간히 할 말이 없나 보다.
“하겠다면 시켜주면 되지. 차라리 그게 속은 편할 것 같은데… 어차피 이 상황에서 점수가 나려면 안타가 나와야 하잖아. 그건 확률이 너무 떨어지지 않겠어? 아! 공격 측의 입장에서 말이야.”
필도 배그웰의 말을 대충 받아주는 티가 역력하다.
“그렇지?”
모두 분위기가 그렇다면 나도 동참해야 한다. 지금 모인 목적은 대화나 의사소통이 아니다. 3루수 브렛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기 위함이다. 아무도 조금 전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내가 느낄 정도면 내야수들이 모를 리 없다
지금 가장 괴로울 것 같은 사람은 3루수 브렛이다. 얼굴이 상기되어 벌겋다.
‘지금 자괴감은 도움이 안 돼.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계속 자책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모두의 마음은 그렇지만 브렛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평정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런 식의 배려를 받는다는 것부터 본인에게는 엄청나게 괴로운 일일 수 있다.
“1루가 비면 1루를 채울 생각이야?”
2루수 크로포드도 분위기에 맞춰 끊어질 것 같던 대화에 살을 붙였다.
“그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다음 타자에게 병살타가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럼 정상수비로 가면 되겠네.”
모두 한 마디씩 말을 보탠다.
“응. 혹시 벤치에서 다른 지시가 있으면 바로 알려 줄게.”
베그웰이 슬슬 정리를 했다. 주심이 빨리 끝내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어느새 붉었던 브렛의 얼굴이 좀 가라앉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들 가볍게 나와 눈을 맞추고 자기 자리로 발을 옮겼다.
브렛에게 괜찮다고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말이 더 부담될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 볼.”
1루 주자가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실제로 도루를 시도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경기도 후반으로 흘러가는 이때 도루는 너무 위험도가 높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면 2번부터 이어지는 중심타선에게 기대하는 것이 옳았다.
언더스로우라는 도루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내 딜리버리 타임은 아주 느린 편이 아니다. 간신히 기준 안에는 들어간다. 그리고, 내게는 베그웰이라는 리그 최정상급의 포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이어스와 비슷한 처지인가?’
타자는 정상적인 타격 자세. 견제구 하나와 눈으로 주자를 묶어놓고 패스트볼을 타자 무릎 쪽으로 하나 붙였다.
딱-
초구부터 타자의 배트가 날카롭게 돌아갔다.
“파울.”
제법 빠른 타구가 3루 쪽 라인을 벗어났다.
‘비슷하면 치겠다는 건가?’
굉장히 적극적인 타격이다. 흡사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나 나올 것 같은 배팅이다.
‘너무 아쉬운 척하지 마. 치면서 파울될 걸 알았으면서…’.
스트라이크 존에서 몸쪽으로 공 한 개 정도 더 붙는 공이었는데 투심성의 그 공을 그런 식으로 당겨 치면 대개는 파울이다.
의외로 다음으로 던진 싱커에는 배트를 내지 않는다.
‘존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타이밍을 빠른 공에 맞추고 있었나?’
조금 헷갈린다. 내가 패스트볼 구사 비율을 올렸다고 해도 30% 남짓 될 뿐이다. 한 타석 내내 1~2개 정도인데 1구를 패스트볼을 치고 계속 그 구종을 노린다는 게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패스트볼은 대개 존 밖으로 던진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에 여유가 있다. 빠르게 승부를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한번 수위를 살펴볼까? 이번엔 싱커를…’
틱-
“그래! 이거지.”
아웃코스 존 밖으로 떨어지는 공을 타자가 억지로 끌어당겼다. 적당히 느린 바운드에 마음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