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뒤는 없다 (5)
투아웃 후였지만 아주 오랜만에 주자가 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마운드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긴장감이 든다.
‘마음 비워라. 오늘 마이어스 컨디션을 봐서는 연속안타는 힘들어.’
보호 장구를 착용하려던 베그웰의 손길이 멎었다. 바로 다음 타자가 베그웰이다. 원래라면 대기 타석에 나가야 하는데 본인도 좀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루에 나간 크리스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점점 리드 폭을 늘여나간다. 투 아웃에 1루 상대 투수 컨디션은 아직 좋다. 그렇다면 발로 찬스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해서 짧은 안타라도 나오면 득점이 가능하다.
‘도루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3연속 안타를 바라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마이어스는…’
팝타임(Pop time)이라는 용어가 있다. 포수가 투수의 투구를 받은 후부터 2루 송구를 해 그 공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유격수 혹은 2루수의 글러브에 꽂힐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그렇게 말한다.
2루까지 송구를 위한 강한 어깨는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포구한 공을 글러브에서 꺼내 쥐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훈련으로 단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수준급(Plus)이라고 평가되는 팝타임은 약 1.92초 그 최대한도를 1.98초로 본다. 1.8초대면 최고 수준이고 2초대를 넘는 포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메이저리그에서 찾기 힘들다.
‘마이크 피아자가 2초를 넘겼다고 하는데 그는 역대 포수 중 최고라는 공격 능력으로 도루 저지에 대한 약점을 덮은 케이스지.’
팝타임이 빠를수록 당연히 도루 저지의 가능성은 커진다. 하지만 포수의 팝타임만 빠르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도루의 시작은 투수가 투구를 시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포수의 팝타임 만큼 투수의 딜리버리 타임도 중요하다.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투수의 퀵 모션 딜리버리 타임의 최소 한계는 1.3초다.
팝타임과 딜리버리 타임의 합계가 3.55를 초과하면 평균치 이상의 도루를 허용한다고 본다. 이럴 때의 도루 성공률은 77%가 넘는다. 그러면 거의 자동문 수준이다. 보통은 3.25초 정도를 맞추려 하는데 지금 애스트로스의 배터리는 그것을 초과한다고 들었다.
‘포수가 아니라 마이어스의 문제라고 하던데… 디셉션 동작 때문에 딜리버리 타임이 느리다고.’
애스트로스 투수 중 마이어스만이 전담포수를 쓰는데 그 이유가 팝타임이 빠른 포수를 써서 자신의 약점을 좀 완화시키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 도루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옵션이다. 설혹 실패하더라도 다음 이닝을 3번 베그웰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2번 타자 알버트가 선두 타자인 것이 낫다.
“세이프.”
마이어스의 견제구가 느릿하게 1루로 날아갔다. 저런 건 꼭 1루 주자를 잡겠다고 던지는 게 아니다. 주자의 발을 묶으려는 목적이다. 주자에게 느긋하게 다 보고 있다 경고를 보낸 것이다.
‘신경 좀 쓰네.’
크리스는 마이어스의 경고를 무시했다. 공이 투수에게 돌아가자마자 슬금슬금 다시 리드 폭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세이프:”
다시 견제구가 날았다. 이번엔 빠르게다. 살짝 중심이 무너져 넘어졌지만, 크리스는 마지막 순간 손을 쭉 뻗어 간신히 1루 베이스를 짚었다. 조금 위험했다.
1루에 빠른 견제구를 던지는 건 이런 상황에서 많이 부담될 텐데 마이어스는 흔들림이 없다. 빠르게 던지려고 하다가 자칫 겨냥이 빗나갈 수 있고 1루수가 공을 놓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견제구를 던진다.
‘본인 약점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 보강 차원에서라도 이런 훈련은 많이 했겠지.’
마이어스는 노련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견제 속도를 느리고 빠르게 조절하며 주자에게 좀처럼 타이밍을 주지 않는다.
“스트라이크.”
포심 패스트볼이 타자 무릎 근처를 파고들었다. 타자의 몸이 움찔 헸지만, 배트가 나가지는 않았다. 1루 주자는 뛰지 못했다.
‘커브 타이밍을 잡으면 좋은데…’
마이어스가 구종이 다양한 투수는 아니다. 주로 패스트볼과 커브를 던지고 서드피치로 슬라이더가 있지만 그건 그렇게 구사 비율이 높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커브를 던질 수 있을까?’
마이어스의 패스트볼이 위력적인 건 디셉션의 문제도 있지만 적절한 커브 구사로 타자의 타이밍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패스트볼 일변도로는 맞을 가능성이 있다. 슬라이더는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타자가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충분히 커트해 낼 수 있다.
“볼.”
애스트로스의 배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알버트도 섣부르게 배트를 내지 않고 있다. 아직은 각자의 계산이 수면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지만 곧 드러날 것이다.
‘이제 커브를 던질 타이밍이긴 한데… 그런데 너무 보이잖아. 역으로 가려나?’
찬스가 생긴다면 이번 이닝은 어렵고 상위타선에서 시작하는 다음 이닝 정도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단 출루가 이루어지자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었다.
“뛰어!”
“1점만 내면 이길 수 있어.”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발음이 뭉개져 불분명한 관중의 웅성임이 더그아웃 구석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려온다.
‘저… 저기요. 1점만 내면 이긴다고? 믿어줘서 고맙긴 한데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왕이면 여기서 홈런이라도 쳐서 2점 내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잘못 들은 거겠지.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생각하겠어?’
이런 일방적인 믿음은 양날의 칼이다. 적을 잘 벨 수도 있지만, 자칫 실수하면 내 몸을 베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삐끗하면 나 혼자 패배의 원흉으로 몰린다.
‘단체경기에서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없지.’
마음이 불안한 것 같다. 생각이 자꾸 비관적인 곳으로 향한다.
“악!”
1루 주자였던 크리스가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마이어스가 던진 공은 아웃코스 높은 쪽 존을 한참 벗어난 곳에서 포수의 미트와 만났다.
피치아웃(pitch out)이다. 공을 일부러 외곽으로 뺐다. 타자가 스윙할 엄두를 못 낼만큼 먼 곳이었지만, 포수의 2루 송구를 방해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타자의 스윙이 이루어졌다. 상대 포수는 도루 저지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면 거의 주자가 살기 어렵다. 저절로 한숨이 내쉬어진다.
“어? 뭐야?”
포수의 2루 송구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그곳에 공을 받아주어야 할 유격수가 없었다. 포수가 이럴 때 야수를 보며 송구를 하진 않는다. 보통은 약속된 지점으로 공을 던질 뿐이다. 2루 베이스 위를 지나간 공이 바운드 되며 중견수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왜?’
사인 교환이 안 되었든지 하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만, 지금 그것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일까?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
2루를 향해 슬라이딩했던 크리스가 벌떡 일어나 3루 방향으로 향한다.
‘내친김에 3루까지… 음. 가지는 않았네.’
3루 쪽 주루코치가 더 달리는 것을 막은 것 같다.
‘투아웃에 2루나 3루나 마찬가지지. 무리할 필요가 없긴 해.’
투아웃 이후라 주자의 스타트가 빠르다. 지금 주자인 크리스의 주력을 감안하면 짧은 안타로도 충분히 홈에 들어올 수 있다.
아주 좋은 결과가 이어져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보내기는 했는데 이제 타자가 쳐야 한다. 베이스에 주자를 아무리 많이 보냈어도 홈에 들어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볼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투수에게 아주 유리하다.
‘알버트 부탁해. 짧든 길든 아무거나 하나면 된다고.’
어쩌면 이 장면이 오늘의 승부처일지도 모르겠다.
틱-
“파울.”
적극적인 타격이다. 알버트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것 같다. 빠른 볼과 느린 볼을 가리지 않고 비슷하면 커트해 내면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도대체 타이밍을 어디에 잡고 있길래 저렇게 커트가 되는 거야.’
90마일 중반대의 패스트볼을 커트해 내고 잇달아 들어온 80마일의 커브도 걷어낸다. 배트 컨트롤을 신들린 것처럼 하고 있다. 알버트에게서 무엇인가 되어도 될 것 같은 분위가가 피어오른다.
‘아, 모르겠고.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거잖아. 어떻게든 하나만 쳐라. 그러면 니가 오늘 게임의 영웅이 되는 거야. 아이고, 하느님이든 신령님이든 누가 되었든 좀 도와주세요. 우승만 하면 내가…’
따악-
나의 간절함은 보답받았다. 날카로운 타구가 1, 2루 간을 꿰뚫었다.
“만세. 우하하.”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지만 마음대로 감정조절이 안 된다. 선발투수가 게임이 끝나기도 전부터 촐랑거리며 나대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지만, 터져 나오는 감격스러운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았다. 한순간 오라클 파크에 광란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정말 시기적절하게 쳐냈네. 하마터면 잘 알지도 못하는 잡신들에게 터무니없는 약속을 할 뻔했잖아.’
다 되는 놈은 된다. 억만금과 같은 1점이 났다.
다음 타자인 베그웰은 이 분위기를 더 이어가지 못하고 범타로 물러났지만, 드디어 리드를 잡았다.
“스트라이크.”
느린 싱커가 타자의 배트를 피해가듯 유유히 몸을 비틀며 베그웰의 미트에 안착했다. 겨우 스트라이크 하나 던졌을 뿐인데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가 쏟아진다.
‘오호, 컨트롤 좋고…’
예전의 나는 웃을 때도 눈에 독기를 품었고 마운드에서도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백척간두에 선 심정으로 경기에 임했었다.
‘실제로 울지는 않았지만 매일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의 저주와 탄식을 양분으로…’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이젠 사람들의 환호와 격려가 더 좋다. 따뜻한 마음의 교류가 내게 더 큰 힘을 준다.
틱-
‘아이고, 놀래라.’
마음이 풀어졌는지 무심코 던진 패스트볼이 가운데로 쏠렸다. 타자의 배트는 한 템포 늦게 나왔다. 거의 헛스윙이 될 뻔했었는데 배트에 살짝 스쳤다.
많이 위험했었다. 지금 공은 실투였다. 마지막 순간에 손끝에서 공을 잡아채지 못했다. 미끄러지는 느낌과 더불어 한가운데로 밀려 들어가는 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실투라면 차라리 존 밖으로 벗어나 버리면 볼카운트 하나 버리는 걸로 끝난다. 조금 전에는 하마터면 장타를 맞을 수도 있었던 공이었다.
‘결과는 타자가 못 친 거잖아.’
가운데로 전혀 공을 보내지 않던 내가 던진 한가운데 스트라이크가 타자에게는 오히려 의외여서 그런 맥 빠진 스윙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내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고 타자는 재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헤벌레해 가지고. 한 방이면 바로 동점이야.’
아직 나도 전 이닝의 흥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이런 게임에서 실수는 치명적이다. 우리 팀의 1득점도 상대의 실수 아닌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주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스파이크 끈을 풀었다 다시 묶었다. 지금은 진정을 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