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49화 (149/200)

149화. 뒤는 없다 (4)

삼진콜이 나오기 무섭게 뛰쳐나오는 애스트로스의 감독이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볼 판정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이건 남의 일이다. 태연하게 마운드에서 우리 더그아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볼 판정에 대한 시비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애스트로스 벤치의 항의는 당연하다.

‘판정이 바뀌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다음부터는 신경 좀 써달라는… 일테면 그런 거 아니겠어? 아니지. 좀 심하게 말이 오가면서 퇴장이라도 생기면…’

불구경은 재미있다. 더군다나 어떻게 되어도 나에게 손해가 없다면 더 흥미진진하다.

‘에구, 벌써 끝내는 거야? 열이 좀 덜 받았네.’

내 기대와는 다르게 항의가 확대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더그아웃에 도착하자마자 항의를 하던 애스트로스의 감독은 곧 물러났다.

“베그웰. 도대체 왜 쓰리 앤 원 그 장면에서 볼을 던지라고 한 거야? 그리고 그 볼이 왜 스트라이크 판정은 받은 거지?”

통상적으로 베그웰은 더그아웃에서도 바쁘다. 수비뿐만이 아니라 공격도 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매회 장비 탈착을 해야 하고 코칭 스탭들과 중간중간 의사소통도 필요하다. 포수가 괜히 그라운드의 사령관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 초반이라 아직 벤치의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는지 느긋하다. 전 이닝 공격의 마지막 타자가 그였기 때문에 이번 회는 마스크 외의 보호구도 벗지 않았다.

“우리가 타자 일순할지도 모르잖아. 준비 안 해? 빠져 가지고…”

슬쩍 그의 곁으로 앉으며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웬만하면 오늘만큼은 집중력 유지를 위해 구석에 짱박혀 조용히 있고 싶은데 도저히 궁금해서 안 되겠다.

“오늘 마이어스 던지는 걸로 봐서는 초반에 그러기는 힘들 것 같지 않아? 왜 심심해? 빨리 던지고 싶어? 오늘은 보통 투수처럼 굴더니, 해보니 힘들지.”

이 녀석도 참 무심하다. 이 중요한 경기의 선발투수 기분을 건드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조금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다.

‘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조금 전 쓰리볼 원 스트라이크일 때 던졌던 공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심판의 볼 판정이 오락가락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음. 아마도 그림자 때문인 것 같아서 그냥 한번 해본 건데 그렇게 맞아떨어질 줄은 나도 몰랐어.”

“그림자?”

“해가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그랬었거든. 그래서 홈 플레이트 앞에서 햇살이 비쳤다 사라졌다 그러더라고.”

난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다. 똑같은 현상 안에 있었어도 각자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래? 그게 볼 판정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다는 거지?”

“오늘 주심인 사무엘이 오십대잖아. 건강하긴 하지만 노안이 올 만한 나이지. 내가 알기로는 노안은 수정체의 탄력이 떨어져서 초점 조절이 잘 안 되는 증상인데…”

“허헛!”

그런 생각을 어쩌면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있는지 정말 베그웰의 뇌 구조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너무 자신 있게 콜을 하더라고. 의도적으로 틀린 거라면 조금이라도 어색한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이건 좀 이상하구나라고 생각을 했지. 그래서…”

쉽게 궁금증은 풀렸는데 답이 너무 허무하다. 내심 심판과 타자의 심리를 역이용했다든지 하는 복잡한 심리 게임의 결과였다와 같은 특별한 스토리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같은 것을 바라본다고 해서 다 같이 진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단순한 것에서 어떤 규칙성을 발견한 건가? 그런데 우리 타자들은 마이어스의 왜 저 단순한 패턴을 못 깨는 거야?’

애스트로스의 투수 마이어스의 투구 패턴이야말로 단순함의 극치다. 패스트볼과 느린 커브의 조합, 그것이 디셉션 동작과 어울려 시너지를 만든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4번 타자 레블론은 범타로 물러났고 5번 카스트로는 삼진을 당했다.

따악-

“그래 그거지.”

6번 필에게 첫 안타가 나왔지만, 득점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상위타선에서 출루를 하고 하위타선이 마무리한다. 우리 팀에서 이런 경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득점이 되려면 반대의 경우가 되어야 하는데…’

역시 7번 타자 테일러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2회 말 공격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

“이제 경기 시작 후 1시간 15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6회군요.”

“그렇습니다. 경기가 팽팽한 투수전의 양상으로 흘러 전반적인 경기 템포가 아주 빨라졌어요. 지금까지 자이언츠가 1안타, 애스트로스는 무안타예요. 서로 볼넷으로 출루를 허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양 팀 타자들이 분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자이언츠 타자들만의 분전을 바라지만요.”

그래엄 캐스터가 지역 방송국의 중계팀다운 코멘트로 현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월드시리즈에서 가끔 이런 식의 투수전이 나오긴 합니다만 월리엄 해설위원께서는 어떤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으셨나요?”

우승이 결정될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지만, 중계팀으로서는 아주 중계가 힘든 경기이기도 했다. 초반부터 삼진과 범타의 지루한 행진이 이어졌고 양 팀 모두 별다른 찬스조차 나오지 않았던 내용으로 봐서는 밋밋한 경기였다.

영상과 음성을 함께 송출하는 TV도 아닌 음성만의 라디오 중계에서 삼진과 범타와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흥미를 대폭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애스트로스의 선두 타자는 전혀 So의 볼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7, 8, 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타선의 애스트로스가 이번 이닝에 특별한 상황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저는 어떤 경기보다는 투수가 떠오르네요. 우리에게는 월드시리즈의 수호신과 같은 투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좀 오래전이긴 하지만요.”

노련한 해설자 윌리엄이 캐스터의 말을 받아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들고 나왔다.

“범가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우리 팀이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던 2014 시즌 매디슨 범가너는 대단했죠.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2014 월드시리즈에서 자이언츠는 로열스와 최종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극적으로 우승했었다.

“2010년과 2012년에도 잘 던졌지만 2014년 월드시리즈의 범가너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죠. 최종전을 승리할 때 스코어가 어땠는지 기억나시나요?”

지금의 경기상황은 딱히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애스트로스의 8번 타자 역시 범타로 물러나고 있었다. 캐스터 그래엄은 범가너 이야기를 좀 더 끌고 가리라 마음먹었다.

“하핫. 글쎄요. 16년 전 일이라 좀… 그때 저는 그냥 하이스쿨을 다니는 학생이었죠. 이겨서 기분 좋았던 기억은 있습니다. 기억을 다시 되살릴 겸 좀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시 범가너는 1차전과 5차전의 선발이었죠. 1차전은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했고 5차전 역시 9이닝 동안 무려 117구를 던지며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거두었습니다.”

“대단했군요. 오늘 So 역시 아직 무실점과 무안타로 호투 중인데 이대로 끝까지 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윌리엄의 웃는 눈을 바라보며 그래엄이 양념을 조금 섞었다.

“저 역시 그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범가너가 대단했던 것은 그 정도에만 그쳤어도 엄청난 기록이었을 텐데 7차전에 다시 등판을 했었습니다.”

“5차전 선발이 7차전에요? 그럼 117구 완봉을 하고 겨우 이틀을 쉰 후에 다시 등판했다는 겁니까?”

“예. 물론 선발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3:2 박빙으로 리드하고 있던 5회에 등판했죠. 그리고는 마지막 5이닝에서 2피안타 무실점으로 던지며 1점 차 승리를 지켜냈습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소설에서도 그런 장면은 안 나올 것 같네요. 리얼리티가 너무 떨어진다고.”

그래엄은 진짜 감탄했다.

“그때 그런 투수기용에 대해서 다들 걱정을 했었죠. 고백하자면 저는 그때 중계를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건 무리다라고 말했었죠. 막상 승리하고 나니까 바보가 된 듯 멍한 기억이었던 것이 아직도 가끔 떠오릅니다.”

“그 정도면 역대 월드시리즈 최고 투수의 퍼포먼스로 기억될 만하겠군요.”

“실제로 경기 후 커트 실링이 SNS에 그 비슷한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범가너가 세 게임에서 기록한 ERA 0.43은 1965 시즌의 샌디 쿠팩스의 ERA 0.38 이후 최고기록이었고, 9개의 피안타는 역대 월드시리즈 사상 최소 피안타. 중간계투로 5이닝의 최다 이닝 투구 기록. 월드시리즈에서 승리와 세이브를 동시에 올린 최초의 투수가 되었죠.”

범가너는 2010, 2012, 2014 시즌 세 번의 월드시리즈에서 통산 4승 무패 1세이브, 36이닝 ERA 0.25를 기록했다. 캐스터 그래엄이 윌리엄 해설자의 말에 감탄을 하던 사이 애스트로스의 6회 초 공격이 끝났다.

“자인언츠의 투수 So는 6회 초 역시 삼진 하나와 범타 두 개로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습니다. 아직도 0:0의 스코어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투수 역시 범가너에 못지않게 굳건합니다. 곧 우리 공격도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어떻게 한 이닝을 무난하게 잘 넘어간 것 같아 이닝 마무리 코멘트를 마치고 그래엄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헛스윙으로 8번 크로포드에 이어 9번 타자 데이비드 브렛이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연속 삼진은 좀 아쉽네요.”

“타격은 좀 아쉽지만 브렛 선수 먼저 칭찬을 해주고 싶네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팀이 굉장히 어려워질 수도 있었는데 지난 세 경기 동안 실책 없이 정말 공백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잘해주었습니다. 그 정도로도 제 몫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원래 주전이었던 패터슨도 타격은 신통히 않았었다.

“마이어스 투수의 공략을 위한 해법은 없는 걸까요?”

“게임 전 예상하기로는 3일 휴식 후 등판이라 소화 이닝을 길게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68구를 던진 아직까지는 공의 위력이 떨어지지 않고 있네요. 지금 삼진이 9개째인데 굉장히 적극적으로 존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마이어스 투수 본인이 투구 수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反證)일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끈질기게 달라붙어 차근차근 투구 수를 늘려가면 곧 찬스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잘하면 된다라는 하나 마나 한 말이지만 해설자라서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미래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지역 방송국이라지만 엄밀히 말해 방송의 목적은 자이언츠의 승리가 아니다. 자이언츠가 이기면 좋지만 진다고 해도 수익은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려면 질 때 지더라도 부정적인 이미지는 곤란하다. 청취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타악-

모처럼 들어보는 날카로운 타구음이 오라클 파크에 울려 퍼졌다.

“좌전 안타입니다. 1번 타자 크리스 초구를 받아쳐 가볍게 출루에 성공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