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뒤는 없다 (3)
마음을 언제나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타자가 나왔지만 좀처럼 그에게 마음이 가질 않는다.
“볼.”
역시 집중이 안 되어서인지 볼 컨트롤이 흔들린다. 지금 던진 유인구처럼 보였던 공은 의도와는 다르게 들어간 볼이었다. 베그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사인과 어긋난 공을 가볍게 잡아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고, 놀래라. 그나마 다행이야. 가운데로 쏠리질 않아서…’
내게는 잘 나오지 않는 실투였지만, 재수 없는 날에는 이런 것이 큰 것과 연결된다.
‘정신 차리자. 음. 흐흣. 이기라고 하늘에서 점지된 날인가 보네. 이왕 이렇게 된 거라면…’
후속 수단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악수가 정수로 변하기도 한다. 상대는 아직 내가 악수를 둔 것을 모른다.
“스트라이크.”
아웃코스 떨어지는 볼에 이은 인코스 하이패스트볼로 다음 카운트를 잡았다.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볼 배합. 기본 중의 기본이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컵스는 내 볼 배합을 파악했었다. 그때는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장담할 수 없다.
컵스에서 내부 단속을 철저히 했는지 아직 그 정보가 다른 팀으로 퍼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마 다음 시즌 시작하면 웬만한 팀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시간문제일 뿐이야. 굳이 누가 알리지 않더라도 겨울 동안 각 팀의 전력분석 부서에서 열심히 파겠지.’
메이저리그의 분석력이라면 내년 시즌은 상당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뭐가 됐든 분명히 어떤 대책을 들고 나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나도 변화해야겠지. 일단은 이 경기에 집중해야 하고…’
타자에게 마음을 쏟기 위해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틱-
“파울.”
초구 떨어지는 변화구. 2구 하이패스트볼. 3구를 다시 떨어지는 패스트볼을 존 안으로 던져 넣었다. 가급적 타자가 초구를 떠올릴 수 있도록 비슷한 궤적으로 던졌다. 타자는 초구에 배트를 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배트가 따라 나왔다.
빗맞으며 파울.
‘오호! 그러면 하나 더…’.
비슷한 궤적으로 좀 더 떨어지는 볼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이번엔 기대한 대로 헛스윙을 만들었다.
‘그래. 이거지. 이게 악수가 정수로 변하는 거야.’
타자의 흘겨보는 눈빛에 기분이 달아오른다.
‘뭘 꼬나보는 거야? 아웃당했으면 빨리 꺼지라고.’
강(强)에 강으로 맞서는 건 하수의 수법이다. 이럴 땐 살짝 웃어주면 된다. 보일 듯 말 듯. 보통 이런 걸 조소(嘲笑, 비웃음)라고 한다. 홱 돌아선 타자의 귀가 빨개진 것이 보인다. 태연한 척 움직이고 있지만 부들거리는 감정의 진폭이 마운드까지 전해졌다.
‘단순한 놈들 상대하기에는 이게 최고지.’
이제 그가 다음 타석에 들어섰을 때 입꼬리만 살짝 올려도 그의 흥분지수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연상과 반사작용이라고 하던가?’
갑자기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가속화되었나 보다. 가슴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정이 순식간에 발끝까지 이른다.
‘그래 나는 비탄과 증오를 먹고 살지.’
타자의 탄식이 투수에게는 최고의 활력을 준다.
‘좀 오글거렸으면 미안해. 모처럼 기분이 좀… 업이 되었네.’
투아웃이다.
“하나 더…”
“볼.”
‘어?’
전 타자에게 헛스윙을 유도했던 위닝샷과 같은 코스와 구질이었지만 좀 더 높았다. 파울이 났던 2구 정도 높이의 싱커.
‘뭐지? 주심이 잠시 착각한 건가?’
높낮이 구별에 잠깐 혼란이 와서 볼이라 판정한 것이라면 상관없는데 일관성을 유지한답시고 이 궤적을 계속 볼로 선언한다면 많이 곤란해진다.
베그웰도 같은 걱정을 했는지 같은 코스에 좀 더 낮게 떨어트리라는 사인이 나왔다. 문제가 되기 전 주심에게 높낮이 구별을 확실하게 시켜주려는 것 같다.
“볼.”
타자는 당연히 스윙하지 않았다. 눈에 익은 초구와 비슷한 궤적인데 굳이 스윙할 이유가 없다. 괜히 볼카운트를 하나 손해 본 느낌이다.
‘확실히 봤죠. 다음엔 잘 잡아줘요.’
이제 또 같은 코스에 같은 구질을 던질 수는 없다. 세 번은 타자 눈에 너무 익숙해진다. 그가 꼭 스트라이크만 치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로 유인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이 빼면 티가 나 유인이 안 되고 2구와 비슷하면 한 방 맞을 가능성이 높다.
인코스 하이패스트볼 사인이 나왔다. 타자의 눈과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공의 궤적을 달리하라는 거다. 당연히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이다. 존 안으로 넣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이런 식의 볼 배합은 기본이다. 타자도 어느 정도 노리고 있을 것이다. 노리는 코스와 비슷하지만 더 높게 가야 한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태라 다시 볼을 던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겠지. 역에 역으로 가는 건가?’
타자가 참으면 쓰리볼이 된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딱히 베그웰의 생각과 다른 볼 배합은 생각나지 않는다.
한국의 타자들 같으면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대부분 의식적으로 참는다. 쓰리볼이 되면 거의 무조건이다시피 기다리게 되고… 학생야구에서부터 그렇게 교육받는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학생야구는 같은 상황을 배팅 찬스라 가르친다고 들었다. 이런 야구문화의 차이 때문에 미국에 온 초창기에는 조금 어색했었다.
“스트라이크.”
기대했던 스윙이 나왔다, 이제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리그 평균 타율이 0.252였던 최근 시즌 통계에 따르면 타자가 가장 높은 타율을 보였던 볼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이었을 때였다. 이때의 타율은 0.343이었다.
1볼 1스트라이크. 2볼 1스트라이크 등 투수가 높은 확률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 강제되면 거의 예외 없이 3할 이상의 타율이 나왔다. 반대로 투수가 투 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은 상황에서는 거의 1할대 중반의 타율이 기록되었다.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만 2할 초반이었지.’
그런데 의외로 원 볼이나 투 볼 이후 타격 시에는 리그 평균 타율보다 높기는 하지만 3할에는 못 미치는 2할대 후반의 타율이 나왔다. 이런 통계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투수에게 선택의 범위가 커지면 타격이 어려워진다 정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과연 이걸 어느 투수에게나 일반화시킬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항상 통계의 오류는 존재한다. 언제나 이런 통계로 측정할 수 없는 투수들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변화구의 제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상대적으로 패스트볼의 제구가 훨씬 낫다. 그래서 꼭 스트라이크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보통의 투수들은 패스트볼을 이용해 카운트를 잡으려 한다.
가장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운 구종이 패스트볼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투수나 다 타자들이 부담스러워 할만 스피드와 제구를 갖춘 패스트볼을 던질 수 없다.
‘그런 건 놀란 라이언이나 로저 클레멘스 같은 한정된 괴물들의 영역이었지.’
그 정도의 스피드를 가지진 못했지만 특별한 변화구의 제구로 틀을 벗어난 투수일 테면 페드로 마르티네스나 그렉 매덕스 같은 유형도 존재했다.
‘나도 그 정도가 되니까 지금 여기까지 온 거야.’
다시 아웃코스를 공략했다. 앞서 볼 판정을 받았던 초구와 거의 같은 궤적의 싱커가 존을 꿰뚫었다. 아주 잘 들어갔다.
‘그렇지. 이것…’
“볼.”
“헉!”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볼 판정을 하는 주심의 입장을 생각해서 확실하게 높낮이 구별도 시켜주고 코스를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뭐 하자는 판정인지 모르겠다.
‘얼마나 더 높이 던져야 스트라이크 콜을 할 생각인 겁니까?’
이제 가장 높은 타율이 나오는 볼카운트라고 하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건 주심이 고집부리고 있는 거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줬잖아. 왜 고집을 부려!’
도대체 어디서 내가 주심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심판의 권위의식이 발동된 거다.
‘당신의 고유 권한이다 이거야? 당신이 볼이라 하면 내가 수긍해야 하나? 하아! 별게 다…’
사람이 하는 게임이고 판단이기 때문에 실수, 착각 다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런 불확실한 요소조차 게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고집은 게임을 망친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치밀어 오른다.
‘에이, 썩을… 어?’
화는 났지만 그래도 게임을 해야 하기에 다시 투구 준비를 하는데 베그웰에게서 묘한 사인이 나왔다. 같은 코스에 같은 구종으로 조금 전 공보다 더 낮게 던지라고 한다.
‘야! 지금 쓰리 볼이라고 무슨 생각인 거야?’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볼 배합이다. 유인구가 통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웃코스 싱커가 높든 낮든 다 볼로 선언되고 있는데 어느 타자가 그쪽 공을 건드리겠는가! 더구나 쓰리 볼에서…
‘그냥 볼넷을 주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자는 생각인 건가?’
열이 올라서 그런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
‘에이, 몰라. 내 주제에 무슨 생각을… 던지라면 시키는 대로 그냥 던지면 되지.’
야구라는 게임에서 머리 쓰는 건 베그웰이 확실히 나보다 낫다. 그동안의 많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포수가 원하는 공을 던졌고 예상한 대로 타자는 스윙하지 않았다. 볼넷이다.
‘음. 그런 거지. 다음 타자나…’
“스트라이크.”
‘뭐라고?’
1루로 나가기 위해 암 가드를 풀어내던 타자의 손이 멈췄다. 어이없다는 듯 흘깃 주심을 한 번 바라보고는 벗어내려던 보호 장비의 끈을 다시 조이고 타석에 들어섰다.
‘야! 빨랑빨랑 자세 잡아. 빠져 가지고. 이제껏 스트라이크 두 개 이득 봤잖아. 하나 손해 봐도 아직 니가 더 득이지. 어디서 억울한 눈빛을 하는 거야.’
정말 모르겠다. 사실 이건 최악의 상황이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건 투수나 타자 모두에게 재앙이다. 불확실성의 게임에서 그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는 것이 실력인데 이렇게 되면 운의 개입이 더 커진다.
‘스트라이크 존이 오락가락하는 거였어?’
월드시리즈 6차전이다. 이런 중요한 게임이라면 대외적으로 유능함이 증명된 경험 많은 심판이 기용되기 마련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똥고집 부리는 영감인 줄 알았는데 무능력? 이건 정말 아니잖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신뢰하기 어려운 통계지만 어쨌든 투수에게 최고 불리하다 알려진 볼카운트에서 리그 평균 타율 이하의 볼카운트로 옮겨왔다.
‘그래. 바로 그거지.’
아웃코스에 떨어지는 싱커를 요구하는 사인이 왔다. 조금 전에 던진 공보다 더 낮게 가자고 한다. 내 생각과 딱 일치하는 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볼 배합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판정 기준이 뒤죽박죽이라면 타자로서는 비슷하면 커트라도 해내어야 한다. 웬만하면 배트를 내어야 하는 상황이다.
“스트라이크. 배트아웃.”
계획했던 대로 헛스윙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우고 2회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