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47화 (147/200)

147화. 뒤는 없다 (2)

“스트라이크.”

2구 역시 아웃코스로 향한 패스트볼이었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잇달아 던져진 각이 큰 커브에 타자는 꼼짝하지 못했다. 패스트볼과 커브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올드스쿨 운운하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언제나 잘 통해왔다는 거다.

‘공 좋네. 이른 시간에 공략하기는 어렵겠어.’

1번 타자 크리스는 정규시즌에서 2할 7푼대를 쳤다. 전형적 1번 타자라고 불릴만하다. 타율은 조금 아쉽지만 좋은 선구안으로 공을 많이 보고 볼넷이 많다. 출루율이 높고 발이 빨라 주루플레이가 좋다. 종합하면 장타율은 낮지만 투수로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유형의 타자다.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언제나 제 몫은 해주던 선수였지. 삼구삼진이라…’

그가 삼구삼진 당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것도 루킹 삼진으로는…

탁-

타자의 가슴보다 약간 높게 들어온 하이 패스트볼에 2번 타자 알버트가 반응했다.

‘저 공을 왜? 높은 공을 노리고 있었나?’

카운트를 잡겠다는 것보다는 타자의 반응을 살피려는 목적이 강한 볼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쉽게 배트가 끌려 나와 버렸다. 공이 떴다.

‘차라리 때리지나 말지.’

저렇게 힘없이 뜬공이 될 바엔 헛스윙이 나았다. 저런 타구는 최악이다. 인플레이된 공을 미리 전진해 기다리던 좌익수가 안전하게 잡아냈다.

‘공 네 개로 투아웃이야?’

알버트는 1번 크리스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할 만한 타자였다. 3할에 이르는 타율과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준수한 장타력. 당연히 높은 출루율과 기민한 주루플레이 능력은 기본 장착이다.

수비수의 글러브에 공이 빨려 들어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너무 허무하다 알버트 본인도 몹시 아쉬웠는지 타석에서 물러나는 몸짓에 허탈함이 묻어난다.

우리 팀에 비해 애스트로스의 수비가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진다고들 하던데 이런 체공 시간이 긴 플라이볼에는 그런 식의 수비력 비교우위가 무의미하다.

‘맥없이 이거 뭐 하는 거야?’

지금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우리 팀 홈구장 오라클 파크의 좌측에서 중앙까지 펜스는 다른 구장들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비대칭형의 우측 펜스가 홈에서부터 94미터로 굉장히 짧다. 그에 대한 보정으로 펜스 높이가 7.3m에 이른다.

맥코비 만에서 구장 쪽으로 불어오는 해풍의 영향도 있고 좌타자가 당겨서 홈런을 치기 매우 어려운 구장이었다. 그래서 자이언츠 타자가 친 공이 이쪽 담장을 넘어 맥코비 만에 직접 떨어진 홈런에 대해 스플래시 히트라고 따로 이름을 붙일 정도다, 밀어서 스플래시 히트를 만들어낸 우타자는 아직 없다.

이것만 보면 상당한 투수 친화 구장일 것 같지만, 그 우중간의 담장이 상당히 이상하게 생긴 모양이라서 일반적인 펜스플레이가 어렵다. 그래서 이곳을 3루타 골목(Triples Alle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4 시즌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 3루타 5개, 한 선수 3루타 3개라는 희한한 기록이 나왔을 정도지. 2021 시즌에 중앙 담장을 당겨 119m로 만든 후부터는 그쪽으로 홈런도 제법 나온다구.’

좌타자로 이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했던 건 배리 본즈가 유일하다. 그는 총 35개의 스플래시 히트를 기록했는데 두 번째로 많이 친 선수가 9개다.

그가 떠난 이후 우리 팀은 한 방을 가진 장타자 위주의 타선이 아닌 홈구장의 특성을 이용할 수 있는 중거리 타자 중심의 끈끈한 타선을 구축했고, 견고한 투수력을 위주로 한 수비형의 팀컬러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오라클 파크가 홈런을 치기 어려운 구장이라는 게 다 알려져 장타자 특성을 가진 타자들이 잘 안 오려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시즌 경기의 절반을 홈구장에서 치러야 하는데 선수 입장에선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기 어려운 팀에서 굳이 뛰어야 할 이유가 없긴 하다. 굳이 데리고 오려면 그 보상을 돈으로 해야 하는데 우리가 빅마켓 팀이긴 하지만 그동안 돈을 무지성으로 풀어대는 팀은 아니었다.

그런 여타의 이유로 지금 우리 팀 최고 장타자는 홈런의 시대에 걸맞지 않게 시즌 30홈런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시즌 최다승 팀이 되었다. 강팀의 조건에는 주어진 조건을 잘 이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린 우리 구장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했던 팀이었다.

‘범타는 그렇다고 쳐도 왜 외야플라이를 좌익수가 잡도록 당겨 치냐고… 밀어야 뭐가 되어도 될 가능성이 커지잖아.’

무조건 밀었어야 했다. 오라클 파크에서 밀어 치는 우타자를 상대하는 것은 투수에게 꽤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준다. 여기서는 다른 구장에서 평범한 외야플라이가 될 타구가 우측으로 날아가면 3루타가 될 확률이 대폭 올라간다.

좌타자는 당기는 것 위주로 타격에 임해야 하고 우타자는 밀어서 범타가 되더라도 투수에게 대미지를 누적시켜야 한다. 알버트는 실수했다. 그래서 본인이 더 아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그웰은 좀 다르려나?’

장타율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투수를 짜증나게 하는 커트신공과 함께 정밀한 선구안을 가진 리그의 수위타자다.

‘너라면…’

틱-

‘에구구. 이놈이나 저놈이나…’

원 볼 원 스트라이크로 뭔가 해낼 듯 분위기를 잡아가더니 결국은 외야로 공을 보내지도 못하고 내야에 굴린다.

‘공 일곱 개 던지게 하고 한 이닝을 끝낸다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휴!’

첫 회부터 큰 점수를 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허무한 결과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최소한 투구 수라도 좀 늘려서 대미지를 쌓아야 하는데 이런 식은 정말 곤란하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마이어스가 잘 던져서 그런 거지. 차차 적응해 가겠지.’

끓어오르려 했던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이제는 내 차례다.

“스트라이크.”

‘나도 좀 한다고.’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2회에 맞이한 애스트로스의 첫 타자를 삼진 처리하면서 나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우리 팀에게는 어떻게든 상대 투수를 공략해서 한 점만 뽑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대 팀에게는 한 점이라도 허용하면 그것이 곧 패배로 이어진다는 부담감을 줘야 한다.

양 팀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내면서 정면으로 격돌한 경기다. 물론 우리 팀은 한 게임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만, 뒤를 생각할 수는 없다. 기세에서 밀리면 진다.

‘최상의 전력… 아! 아니구나.’

정면으로 바로 보이는 3루 쪽에 낯선 얼굴이 있다. 부상당한 패터슨을 대신해 기존 3루수였던 테일러가 유격수로 가고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데이비드 브렛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우리 내야수들의 타격이야 원래도 기대감을 가지기 힘든 수준이었고, 오직 수비 원툴이 기용의 기준이었는데 아무리 수비전문의 유틸리티라고 하더라도 그 공백을 완전히 메우긴 힘들었다.

그는 지난 두 경기를 잘 치러냈다. 안정감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별다른 실책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찜찜한 면이 있다고.’

올 시즌 경기당 평균 0.57개의 실책이 나왔다. 우리 팀은 0.45개로 조금 더 낮았는데 상대적으로 낮긴 낮았어도 절대적으로 낮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야구에서 홈런, 삼진, 볼넷 이 세 가지 플레이는 야수의 관여가 있을 수 없고 단타가 2루타가 된다든지 하는 타자 주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히트 앤 런과 같은 공격팀이 작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플레이를 묶어 TTO(Three True Outcomes)라고 한다.

올 시즌 리그의 전체 타석 가운데 33.8%가 이 TTO였다. 올 시즌 경기당 평균 타석인 약 38타석 중 25타석만이 공이 인플레이 된 채로 움직였다. 이 TTO 비율은 1998년에는 28.4%였고 2008년에도 28.8%로 큰 변동이 없다. 홈런 중시의 경향이 급진전한 2010년 이후 대폭 오르고 있다. 인플레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가 줄어들면 당연히 실책과 안타도 줄어들게 된다.

난 TTO 비율이 특별히 적은 투수였다. 피홈런은 평균치에 가까웠지만, 삼진도 많지 않고 볼넷도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투구 기록상으로 홈과 어웨이 경기에 특별히 큰 차이가 없었다. 구장 특성을 별로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연하지. 주로 인플레이된 공이 내야에서 놀았으니까.’

그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건 그라운드 볼러로서의 난 수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투수였다는 거다.

표본이 많아질수록 통계치가 평균에 수렴해 간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당연히 나와야 할 에러가 없다는 건 곧 폭발이 가까워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한다. 선수도 적든 많든 실수는 있다. 하지만 그 실수에도 경중은 있다. 기록상으로는 똑같은 에러 하나로 표시되지만, 내용을 따지면 별거 아닐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섭다고. 저 브렛이 언제 폭발할지 몰라서…’

오늘 투구스타일의 변화도 따지고 보면 그 바탕에는 수비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야구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내용이 달라진다. 투수가 볼넷을 주면 예전에는 투수의 제구력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타자의 선구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볼넷의 중요성이 커지자 출루율 높은 타자의 몸값이 상승했고, 그 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삼진의 중요도가 올라갔다. 선구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투수의 구위 상승 노력이 이어졌다. 평균 구속이 늘어나는 등 강력한 구위가 일반화되면서 연속 안타의 확률이 떨어졌다. 그래서 한 방으로 득점을 할 수 있는 홈런의 가치가 상승하고…

생존을 위해 변화는 필수적이다.

오라클 파크에서 난 자책점이 낮을 수밖에 없는 투수였다. 외야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득실점이 많아지는 구장에서 외야로 별로 공을 보내지 않는 투수였으니…

그렇지만 오늘은 변해야 했다. 그래서 원래는 없었던 여러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잖아.’

그래도 홈구장이 좋다. 일단 심리적 안정감이 생기고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익숙해진 분위기와 기후 같은 환경적 요인은 컨디션 관리에 도움을 준다.

‘이런 플러스 요인을 감안하면 홈에서 기록이 월등하게 좋아야 할 것 같은데 왜 어웨이 경기나 큰 차이가 없지?’

이 부분을 잘 연구해보면 뭔가 더 발전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누렸던 이점들이 다음 시즌에도 유효할까? 어쩌면 올해로 끝날지도… 누릴 수 있을 때 뽑을 건 다 뽑아내야겠지.'

잠깐의 눈 돌림이었지만, 머릿속에서 무수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단, 집중하자.’

다시 시선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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