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뒤는 없다 (1)
섭씨 17도. 습도 70%. 맑고 쾌적한 날이다. 마운드에 서서 연습구 몇 개를 던졌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실밥의 감촉이 새롭다.
어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하루 반나절의 등판 준비 컨디션은 완벽하다. 주심의 플레이 볼 선언을 뒤이어 관중석에서 거대한 함성이 일어났다.
“스트라이크.”
관중의 뜨거운 호응과 이 한 게임의 중요도라면 흥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담담한 마음이다.
‘초구를 노렸던 거야?’
초구를 헛스윙한 후 한 발을 타석에서 뺀 애스트로스의 1번 타자가 무엇이라 중얼거리며 장갑을 고쳐 끼고 있다.
가끔 초구를 빼는 것도 필요하다. 타자에게 절대적 확신을 주는 위험성을 굳이 무릅쓸 이유가 없다. 존에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로 산뜻하게 게임을 시작했다.
리그에 익숙해 갈수록 투구 플랜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좋게 표현하면 사고가 유연해졌다.
‘이걸 보통은 요령 부린다든가 잔머리가 늘었다 이렇게 표현하지.’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구체적 투구 플랜을 가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기존 계획을 밀어붙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이다. 가령, 연습구를 던질 때 슬라이더의 각이 좋아서 그 구종을 결정구로 생각하고 게임에 들어왔다고 해도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슬라이더가 맞아 나가면 빠르게 계획을 수정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양 팀이 팽팽히 맞서는 투수전과 우리가 일방적으로 리드할 때의 투구 내용이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투구 플랜의 중요성 어쩌고 하는 이론이 있는 건 대부분의 투수의 능력이 그런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에는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 던질 수 있는 투 피치 투수가 슬라이더가 뜻대로 안 된다고 패스트볼만 던질 수는 없다.
이런 것이 지표로 나타낼 수 없는 투수의 능력이다. 오늘 나는 한 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등판했지만, 점수 차가 생기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
‘에고, 첫 타자부터 무슨 생각을 이렇게… 머리 비우고 일단은 전력투구를… 목표는 목표일 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내야 한다. 오늘은 길게 던지고 이런 걸 생각할 필요 없다. 일단 리드를 잡으면 내가 일찍 물러나더라도 불펜을 총동원해서 막아내면 된다. 그러면 내일 경기는 없다.
한 게임을 더 이기고 있고 오늘 져도 내일이 있다는 여유 같은 건 승리 달성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쏟아내야 한다.
뒤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경기에서 맞춰 잡는 투구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단기적인 게임의 결과로 승패를 가리는 포스트 시즌 경기 자체가 그런 성격이 있지만 그래도 디비젼 시리즈는 두 게임 그 후부터는 세 게임이라는 여유가 있었다.
투수가 경기에 개입할 수 있는 최대 범위는 무승부까지다. 내가 아무리 경기 내내 잘 던져서 무실점을 하더라도 상대 투수가 잘 던져 무실점을 하면 무승부다. 메이저리그는 무승부가 없다. 그 승리는 타자들이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은 기본적으로 확률에 의존하는 투구를 할 수 있었다. 많은 타구가 인플레이되었을 때 일시적인 변동은 있을지 몰라도 확률은 점점 평균에 수렴해간다.
1피안타 완투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 1안타가 홈런이라서 0:1 패배를 당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확률은 굉장히 낮다. 거의 발생하지 않을 정도의 확률이다. 정규 시즌이나 지난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는 혹시 그 운 없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커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오늘 게임은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어.’
좋은 운이 돌아와서 게임이 잘 풀린다면 맞춰 잡는 투구로 100구 이내의 완봉이 가능할 수도 있다. 정규 시즌에 나도 기본적으로 그런 식의 투구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의 경우가 생겼을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1승의 무게가 다르다고.’
인플레이시킨 타구들이 예상했던 확률을 벗어나 안타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의 미래를 운에 맞기고 싶지는 않았다.
애스트로스의 감독, 코치 및 선수들은 바보가 아니다. 중요한 경기를 맞아 생각이라는 것을 아주 많이 했을 것이다.
‘내 투구 패턴을 분석하고 나름 대책을 마련해서 최종전에 나왔을 게 확실하잖아.’
맞춰 잡고 싶다고 거기에 순순히 따라 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라운더 볼러로서의 특성을 일부 포기할 생각이다. 굳이 삼진을 노리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내야로 굴리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물론 그렇게 던지면 자연스럽게 투구 수도 늘어나고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 경우가 평소보다 훨씬 많이 생길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삼진을 많이 잡으면 투구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늘어나는 비율이 10개에서 20개가 되고 이런 식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기 따라서는 10~20% 정도인 것 같았다.
한 타석에서 타자를 잡아내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던지는 건 확실하지만, 더 적은 수의 타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나의 경우 큰 폭의 투구 수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볼넷 허용이 적다는 특징을 가진 투수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파워 피처들은 삼진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볼넷도 많다.
어찌 되었든 일단 오늘은 내가 몇 이닝을 던지든 한 점도 실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초구부터 타자가 적극성을 띠고 달려드는 걸 보니 어설프게 맞춰준다는 식으로 했다가 재수 없게 홈런이라도 맞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트라이크."
초구 80마일 초반의 슬라이더에 이어 70마일 초반의 느린 싱커로 구속을 더 낮췄다. 물론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넣지는 않았다. 다시 헛스윙이 나왔다. 이건 일반적인 투수가 느린 커브를 던졌을 때의 구속이다. 싱커를 오프스피드 피치의 대명사인 체인지업처럼 사용했다.
초구와 2구를 이런 식으로 가져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타자는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쏘아보던 매서운 눈빛에 균열이 생겼다. 다시 타석에서 물러났는데, 조금 의도적인 것 같아 보인다.
‘내 투구 간격에 맞춰주지 않겠다는 건가? 겨우 생각한 게 그거였어?’
베그웰이 슬쩍 감독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인다. 라드 감독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주심에게 달라붙었다. 타자의 경기 지연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다.
모든 스포츠가 대부분 비슷하지만, 야구 역시도 흐름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흐름이란 것이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거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포츠계 종사자들은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다.
라드 감독은 지금 항의로 흐름을 끊는 것이 투수인 내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해 미리 이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포수에게 물어본 것이다.
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것이 있다. 무작위의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공간에서 개별적인 주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어도 그 공간 속의 나는 내 이름이 불리는 대화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다. 정보를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1순위는 자신과 관련 있는 정보다.
‘왕년에 이런 공부를 좀 했었지. 음. 야구를 못하면 다 하게 돼. 타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방법은 없나 싶어서…’
우리 감독이 이 순간 이렇게 나와 저렇게 항의하는 것은 주심에 의해 타자의 행동이 바로 금지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이상한 짓 하지 마라 소소한 것도 다 지켜보고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을 보고 생각하는 것에 변수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존재를 밀어 넣은 거다.
‘그게 어떻게 우리 팀에 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손해는 없겠지.’
1회부터 벤치의 지시를 이행했을 것이 분명한 엄한 타자를 타깃 삼아 양 팀 벤치의 한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애스트로스가 시간 좀 끌어보려 했는데 그걸 빌미 삼아 우리 감독이 시간을 더 끌어버렸다.
“플레이 볼.”
라드 감독은 앞서 이뤄진 투구 내용을 다 리셋시키고 다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의 볼카운트이고 3구째를 던져야 하지만 지금은 나도 타자도 초구와 같은 느낌이다.
아웃코스 꽉 차게 날아드는 공에 타자의 배트가 바로 마중을 나왔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초구와 같이 존에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였다. 첫 타자 삼구 삼진. 좋은 출발이다.
‘음. 볼 세 개 던져서… 운이 좋았어.’
가끔 이렇게 운이 만들어질 때도 있다. 첫 단추가 잘 끼워지니까 다음 단추도 헷갈리지 않았다. 애스트로스 타자들이 보여주는 적극성을 이용해서 거의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고 남은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두 개의 삼진과 하나의 범타. 1회는 순조로웠다.
예고된 대로 애스트로스의 1선발인 스캇 마이어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포스트 시즌에서 상대의 1선발과 붙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올 시즌 총 202이닝을 던져 18승 8패 ERA 2.95의 수준급 성적을 냈고, 지난 몇 년간 꾸준하게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최상급의 선발투수다. 사이영상을 한 번도 받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에이스.
‘3일 쉬고 등판하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 내가 투구 패턴을 달리 가져가듯 그도 마찬가지일 테지.’
내가 오늘 경기에서 무실점을 노리는 투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중의 하나가 그의 존재였다. 앞선 경기에서 우리 타선이 그를 상대로 단 한 점밖에 뽑아내질 못했었다. 그리고 그 일 점마저 그가 독하게 마음먹고 조였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하기 힘든 점수였다.
‘3점 차이로 이기고 있는 게임이라서 무난하게 점수와 아웃카운트를 바꾼 것 같은 느낌이었었지. 오늘은 어떻게 던지려나?’
“스트라이크.”
95마일의 잘 제구된 패스트볼이 아웃코스를 꽉 채운다. 공을 던지는 손과 반대편 어깨로 공을 가리는 묘한 디셉션 동작과 이어져 생소한 각도에서 불쑥 공이 튀어나온다.
‘저렇게 몸을 비틀고도 제구가 되는 게 신기해. 나도 이번 겨울에는 디셉션 동작을 추가해서… 쩝! 언더가 뭔 디셉션이냐. 하던 거나 잘하면 되지. 그래도…’
디셉션이라면 보통 딜리버리(투구 동작)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폼을 조금씩 바꾸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방해하려 투수가 하는 모든 종류의 의도된 기술이 디셉션이다.
정말 메이저리그의 최정상급 투수들은 정말 특별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이 하기는 어렵겠지만 뭔가 좀 응용해서 해볼 게 있지 않을까?’
오늘 직접 맞상대로 만나니까 며칠 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투쟁심이 일기 전 감탄부터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