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45화 (145/200)

145화. 월드시리즈 5차전

원정을 오면서 힘든 경기가 될 것이란 생각은 미리 하고 있었지만 진짜 2연패를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로저스나 존슨 중 누구 한 명은 어떻게든 이길 줄 알았는데…’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을 거쳐 오면서 이렇게 시리즈 스코어가 동률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늘 더그아웃에서 느긋하게 앉아 경기를 봤었는데 오늘은 외야 쪽에 있는 불펜에 나와 있다.

오늘 선발 소르카가 곧 있을 등판을 위해 천천히 연습구를 던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같아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왠지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괜히 징크스를 만들게 되는 것 아냐? 원래 하던 대로… 아니지. 까짓거 좀 생기면 어때.”

만약, 오늘 경기를 지게 된다면 이렇게 불펜에 나오는 행동은 당연히 피하게 된다.

“이기고 나서 생기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이길 수만 있으면 뭔들 못하겠어.”

정말 좀 초조해지긴 한 것 같다. 혼자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바람을 중얼거리게 된다.

“승리를 위한 기도라도 하는 거야?”

‘응? 소리가 컸었나?’

어디에선가 로저스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기도는 무슨… 어차피 우리가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을 가지고 그런 걸 왜 하겠어.”

“자기 등판 때 아니면 평소에 여기 오지도 않던 사람이 나타나서 누가 다가서는지도 모르고 혼자서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렇게 말하면 그 말을 믿고 싶어도 믿기가 힘들다고.”

‘어휴! 너만 이겼어도 내가 이 짓은 안…’

좀 쏘아붙이려고 하다가 그냥 속으로 삼켰다. 그 게임을 진 게 엄밀히 말해 로저스 잘못은 아니었다. 월드 시리즈에서 6이닝 3실점이면 선발투수로서 준수하다면 준수하게 던진 거다.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대 1선발에 맞서 할 만큼 했다.

‘딱 그만큼이지. 못하지 않았다는 정도…’

그렇다고 덮어놓고 타자 탓을 하기도 좀 어렵다.

‘2점밖에 못 낸 게 아쉽기는 하지만, 상대 투수나 게임 분위기 같은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3차전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완패였다. 로저스는 어제까지 침울한 티가 얼굴에 났었는데 오늘은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또 무슨 생각을… 오늘 게임을 완승할 비책이라도 생각난 거야?”

로저스 녀석이 툴툴거린다.

“아! 미안. 오늘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서 집중이 안 돼.”

“상황이 이러니 그럴 만도 하지. 하아! 내가 한 번은 이겼어야 했는데 그날 3실점이나 하면서…”

멀쩡하게 잘 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녀석도 감정 곡선이 극과 극을 오간다.

“포스트 시즌에서 한 번도 못 이긴 건 나뿐이잖아. 내가 3선발인데 정말…”

“그걸 왜 니 탓처럼 이야기를 하는 거야. 퀄리티 스타트를 했었잖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냥 운이 안 좋았던 거야.”

하는 짓이 아직 애다.

“아니. 나도 생각해 봤는데 결과를 내어야 하는 프로 스포츠에서 거의 한 달 동안 결과를 못 만들고 있잖아. 운이 그렇게 장기간 작용한다는 건 말이 안 돼. 어제 존슨 정도만 던졌어도 이겼을 거잖아. 내 몫을 못하고 있다고.”

냉정하게 자기평가를 한 것 같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한다고 해서 현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는다는 게 딜레마다. 예전 같으면 곧이곧대로 내 생각을 말했을 테지만 이젠 이런 순간을 넘길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것이 좀 생겼다.

“그 평가는 좀 더 기다렸다 해야지.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잖아. 우린 단판 승부가 아니라 네 게임을 이겨야 하는 월드시리즈 중이야. 우리가 먼저 네 게임을 이긴다면 그 승리 안에 네가 기여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평가해야겠지.”

이건 팩트다. 1승, 1승을 더해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이닝 소화를 해주고 상대 불펜을 끌어내 소모시키고 기록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런 궂은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내가 알아줘 고맙다는 식의 반문이 나왔다.

“그럼. 지난 두 경기를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우리 팀이 유리해지는 상황을 만들어 왔다고 할 수 있지. 걱정하지 마. 오늘 이기고 다음 경기도 이기고 최종전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까.”

소르카와 내가 등판하는 5, 6차전에 끝을 내야 한다. 아마도 6차전부터는 애스트로스의 1, 2선발이 다시 등판할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3일 휴식 후 등판이라 얼마만큼 정상 컨디션을 회복했을지 모르지만, 만약 5, 6차전 중 한 게임이라도 지게 된다면 7차전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

7차전 등판이 예상되는 상대 2선발의 컨디션 회복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투수력에서 좀 밀릴 수도 있다.

‘그건 그렇지도 않나? 로저스에 3일 쉰 존슨에 불펜을 모조리 다 동원한다면…’

불확실한 건 좋지 않다. 결코 생겨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유리할 때 끝내야 해.’

“So가 보기엔 어때? 오늘 소르카 컨디션이 어떤 것 같아?”

“소르카야 늘 자기관리에 철저하잖아. 나쁠 리가 없지. 오늘 잘 던질 거야.”

사실은 나도 모른다. 불펜에서 연습구 몇 개 던지는 걸 보고 그런 걸 알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미국의 도박 산업은 파산했을 것이다.

어차피 승패를 알 수 없다면 이긴다는 자신감이라도 가지는 편이 훨씬 좋다.

“그렇겠지?”

“오늘 게임에서 소르카 걱정은 접어 둬."

물론 소르카가 잘 던진다고 해서 그것이 꼭 100% 승리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피칭의 결과가 경기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투수가 최고의 피칭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승부가 한계다. 승리는 타자의 몫이다.

이렇게 소르카를 관찰하면서 로저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1회가 시작되었다. 불펜의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그라운드가 잘 안 보인다. 보려면 펜스 가까이 가야 하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야겠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소르카는 여전히 가볍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갑자기 미닛 메이드 파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돔구장이라서 그런지 많이 울리네. 누가 안타라도 쳤나?”

“가서 보자고. 왜? 보면 안 되는 징크스라도 있어?”

“그런 건 없어. 그리고 내 등판 날도 아니고… 음. 그래 가보자.”

로저스에게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 외야 펜스 쪽으로 나갔다.

“저게 누구야? 알버트잖아.”

2루에 주자가 있었다.

"So. 점수 났어."

“뭐라고?”

우리가 있는 곳이 전광판 아래쪽이라서 확인이 잘 안 된다. 로저스가 고개를 그라운드 쪽으로 내밀고 목을 비틀어 전광판을 확인하고 있었다.

“1점 났어.”

그럼 연속 안타를 친 거다. 1번 타자 크리스와 2번 알버트가 연속으로.

‘연속 2루타인가?’

지난 두 번의 경기에서 쳐야 할 때 침묵하던 타선이 1회부터 힘을 내고 있다. 소르카와 같은 경험 많고 능력 있는 피처에게 선취점의 의미는 크다.

‘이게 무슨 뜻이지? 애스트로스의 원투펀치에는 눌리지만, 나머지 투수들은 얼마든지 공략이 가능하다는 건가? 아니면 내리막이었던 타격 사이클이 다시 상승세로…’

뭐든 상관없다. 노아웃에 주자가 2루에 있다. 거기다 타선이 중심타선으로 연결된다. 안타 하나만 더 때려도 추가 득점이 가능하다.

‘한두 점 더 내고 투수가 소르카라면… 여기서 결정짓자고. 베그웰 한 방 날려!’

기대는 딱 절반만 이루어졌다. 한 점을 더 내는 데 그쳤으니 말이다.

두 점의 기분 좋은 리드를 안고 소르카가 마운드에 올랐다.

불펜에서 지켜만 보았을 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자신 있어 하는 건 알겠다. 대부분의 선발 투수가 다 그렇지만 소르카 역시 등판일에는 몹시 예민해 말을 건네기 조심스러운 유형이다.

‘한시름 덜었네.’

이런 경기는 여간해서 뒤집히지 않는다. 이제 모레 있을 내 등판만 신경 쓰면 될 것 같다.

***

퍼억-

“스트라이크.”

투박한 포구음을 이어 주심의 스트라이크 콜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아까운 공을 놓쳤다는 듯 카스트로가 오른손바닥으로 헬멧을 툭툭 치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애스트로스는 1회에 2실점 후 2회까지만 선발투수를 운용하고 두 번째 타순이 돌아오는 3회부터 바로 투수를 교체했다.

2차전에서 호투했던 애스트로스의 3선발 홀든이 3일 휴식 후 바로 등판했다.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린 투수 운용이었다. 그는 지난 4이닝은 잘 막아냈지만 7회 들어 급격하게 힘이 떨어지는 듯 보인다. 곧 투수 교체가 다시 이루어질 것 같다.

현재 스코어는 2:1이다. 소르카는 언제나 그러했듯 견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 점 리드는 좀 불안한데… 어떻게든 한 점만 더 내면…’

이길 것 같기는 한데 많이 쫓기는 기분이다. 원아웃에 주자는 없다.

오늘 카스트로는 전반적으로 스윙이 크다. 오늘 경기 무안타다.

‘그냥 1회에 작은 거라도 쳐줬으면 좋았잖아. 그걸로 끝낼 수 있었는데…’

카스트로 같은 유형의 타자는 일단 감이 오면 미친 듯이 폭발하지만, 그 감 잡는 것이 한 번 삐끗하면 완전히 헤매게 된다. 1회 그 찬스를 놓치고 본인도 답답했는지 스윙이 커졌고 날카로움이 떨어졌다. 종잡을 수 없는 타자라는 게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카스트로는 타석에서 벗어나 배트를 몇 번 휘둘러보고 다시 타석으로 들어섰다.

틱-

“파울.”

‘이런… 오늘은 날이 아닌가?’

한가운데로 몰린 것 같은 공이었는데 바라는 정타는 나오지 않고 비켜 맞은 공이 심판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절대적으로 타자에게 불리한 볼카운트다. 그런데 뭔가 묘한 기시감이 든다.

‘딱 유인구로 배팅 타이밍을 흔들 때긴 한데… 카스트로에게 어정쩡한 유인구는…’

예전 카스트로가 다른 팀이었을 때 이런 카운터에서 존에서 떨어지는 변화를 던졌다가 홈런을 맞은 경험이 있다.

“설마…”

따악-

“뭐야! 이런…”

카스트로에게는 떨어트리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일반적인 타자에게는 기가 막힌 코너웍을 동반한 유인구라도 그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 타석에서 너무 형편없는 스윙을 보여줘 투수가 순간적으로 방심했던 것 같다.

‘갔네.’

좌측 펜스를 총알 같이 넘어가는 공에 좌익수는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통상적인 홈런보다는 발사 각도가 낮았지만, 너무 잘 맞았다.

조용히 경기를 주시하던 소르카의 오른손이 순간적으로 불끈 쥐어지는 것이 보인다.

“카스트로!”

“가자! 자이언츠.”

거의 뜬금포에 가까웠지만, 지금까지 쌓여왔던 긴장감에 조금 늘어지려 하던 더그아웃에 활기가 돌아왔다.

‘아주 중요할 때 한 건 해냈어.’

소르카는 8회까지 112구를 던지는 분전을 보여줬다. 100구를 던진 7회에 교체되지 않나 싶었지만, 기어이 1이닝을 더 막아냈다.

“So. 이제 난 뒤가 없어. 다음 경기 부탁해.”

9회 클로저 체이스의 경기 마무리를 보면서 건네진 소르카의 말이 무겁게 가슴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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