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월드 시리즈 (4)
경기에 이기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뒤숭숭하다.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인다. 그렇게 멍하니 방에 앉아있는데 베그웰이 찾아왔다.
“뭐 하냐?”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가 싫어 턱 끝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냥…”
“흣.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것 같아서 왔지.”
베그웰이 살짝 웃으며 냉큼 의자에 앉는다.
“패터슨 크게 다친 건 아니래. 아까 그건 엄살이었나 봐. 원래 그 사람 좀 과장하던 버릇이 있었잖아. 평소 습관이 나온 거지. 발목뼈에 살짝 실금이 갔다는데…”
애써 무심한 척하며 패터슨의 소식을 알려준다.
“뭐? 하아!”
정말 미치겠다.
‘발목이라도 부러져야 중상인 건가? 지금 그 정도면 그것과 뭐가 달라.’
아무리 실금이라도 뼈가 붙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이 필요하다. 유격수는 내야수들 중 가장 준수한 운동 능력을 필요로 하는 포지션이다. 우타자가 당겨치는 빠른 타구를 잡아내야 하고 1루까지 송구 거리도 통상적으로 40m 내외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풋워크가 필수적이다. 그런 부상이라면 당분간 경기에 뛴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주일 안에 월드시리즈는 끝이 난다고.’
이제 패터슨은 전력 외 선수로 생각해야 한다. 월드시리즈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아직 2승이 더 필요한데 지금 우리는 하루 만에 네 번째 선발과 수비진의 핵심인 유격수를 잃었다.
‘손톱과 발목이라…’
모두 평소 같으면 별거 아닌 부상이라 1~2주면 다시 게임에 나올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치명적이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억지로라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게임을 생각하면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그들이 원해서 다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일주일만 야구하고 더 이상 안 할 것도 아니다. 길게 생각하면 별일 아니다.
“어쩌겠어.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지.”
“그렇지. 전력손실은 입었지만 게임은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태평한 소리 한다 싶지만, 베그웰도 마음 편하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튀어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럼 테일러가 유격수를 보게 되는 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합리적이잖아. 괜찮을 거야. 물론 패터슨만은 못하겠지만, 테일러도 예전엔 꽤 준수한 유격수였다고. 몇 게임 정도는 큰 문제 없을 거야.”
사실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테일러가 3루로 포지션 이동을 한 건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이 떨어져서이다. 좌우 수비 범위가 좁아질 것이 확실시된다. 3루수는 보통 대시하는 방향과 송구해야 하는 방향이 같다. 그러나 유격수는 역동작으로 잡아서 1루에 송구해야 하는 경우가 반반이다. 한동안 유격수를 하지 않았던 테일러에게는 좀 어색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문제가 좀 있을 뿐이다.
“흐흣. 망했네.”
나 같은 그라운드 볼러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런 심리적인 영향이 가장 큰 문제일 수 있지. 좀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그런 문제가 한꺼번에 발생한다고 해도 한 게임에 안타 한두 개 더 맞는 것 정도의 차이일 뿐이야.”
그건 그런데 그 한두 개의 시점이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을 때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으음.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네.”
간신히 이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 열 내지 말자. 열 낸다고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수비의 지휘관 격인 베그웰은 더 크게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지금 투덜거린다고 해결책이 없으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모레부터 어웨이 경기로 벌어질 3, 4, 5차전이 걱정된다.
“최악의 경우 두 게임 정도 지더라도 소르카가 등판하는 5차전에서 이기고 6차전에서 니가 끝내면 되는 거잖아. 정말 오늘 경기 이긴 게 컸어.”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런지 비관적으로만 보이던 시리즈 전망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웨이 경기를 다 지더라도 두 게임만 더 이기면 최종적인 승자는 우리가 된다.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애덤은 왜 그랬던 거야? 연투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연투의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구위 자체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 그럴 때가 있잖아 상대의 노림수가 딱딱 맞아들어가는…”
상대의 운이 작용했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걸로 납득하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모자란다.
“네 생각은 어때? 연투를 피해야 할 것 같지 않아?”
말 돌리지 않고 노골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러면 좋긴 한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는 않겠지. 지금 상황에서 이것저것 세세하게 가릴 수가 있겠어?”
선발 투수는 한 게임을 던지고 나서 70% 정도로 몸이 돌아오려면 최소한 3~4일이 필요하다. 급해서 당겨쓰려고 해도 던질 만한 컨디션이 웬만큼은 나와줘야 쓸 수 있는데 그게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에 비해 불펜 투수는 매일 던진다고 하더라도 짧게 던지기 때문에 걸리는 부하가 선발 투수에 비할 수 없이 적다. 조금만 쉬어줘도 웬만큼은 몸이 올라온다.
“몸 상태가 100%가 아니고 70%만 되더라도 쓰겠지. 그래도 다른 불펜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렇군.”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맞장구를 쳐줬다.
그에 덧붙여 비공식적인 이유로는 대체가 편해서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혹사로 몸이 망가지더라도 쓸 만한 선발투수를 구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구해진다. 때문에 스탭들은 불펜투수의 몸이 망가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덜하다. 원래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
“누가? 에덤이?”
빤히 보이는 사실을 되물어온다.
“그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하핫. 애덤이 이런 걸 모르겠어? 그가 리그에서 지나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
베그웰의 이 말에는 조금 의심이 든다.
“그가 불펜으로 전향하면서까지 선수 생활 연장을 결심한 건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였는데 그 기회가 바로 찾아왔어.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일 것 같아? 아마 매일 연투를 해서 어깨가 나가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면 던지려고 할 거야.”
내 입장에서 그런 맹목적인 목적의식은 이해가 안 되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이상은 다를 수 있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프런트도 2+1 계약을 했지만 1년 쓰고 애덤이 나가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승할 수 있으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거야. 불펜 투수는 시즌 끝나고 어디서 사 오면 되니까. 우리 구단이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빅마켓이잖아.”
보통 투수 생활을 불펜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여타의 이유로 선발이 잘 안 되니까 불펜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 역시 메이저에서 불펜투수 생활을 했었지만 마이너리그에서의 출발은 선발로 했다. 이제껏 마이너에서 불펜으로만 뛰었는데 메이저리그 콜업 후 선발이 되었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다.
짧게 던질 때 못 던졌던 투수는 길게 던져도 별 볼 일 없다. 하지만 길게 던졌을 때는 부진하더라도 짧게 던지면 위력을 발휘하는 유형의 투수는 의외로 많다. 그래서 선발 투수는 늘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불펜투수의 수는 많을 수밖에 없다.
‘이거… 베그웰의 이야기는, 우승을 하고 싶어 하는 각자의 목적은 다르지만, 어떻게든 우승을 한다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런 건가?’
내게는 그런 뜻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그동안 난 단순하게 내가 팀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서 불펜에게는 휴식을 주고 벤치에게는 시리즈 전체를 운용하는 계획에 여유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목표는 단순했지만 그것이 전체가 되면 목적이 아주 복잡해진다.
‘어휴! 머리 아파. 뭐가 이렇게 사연이 많은 건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생각나네.’
그냥 웃음이 실실 나온다. 베그웰 덕분에 꼬여가는 일 때문에 나타났던 우울함과 심각함에서는 좀 벗어난 것 같다.
“혼자 뭘 그렇게 생각해. 실실 웃어가면서… 많이 피곤해?”
그러고 보니 난 오늘 던진 선발투수였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베그웰의 위로 아닌 위로 덕분에 오늘 밤은 잘 잠들 수 있을듯하다.
“크큭. 생각은… 좀 피곤해서 멍해진 거지.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마워. 너도 피곤할 거 아냐. 일단 오늘 자고 내일 이야기 하자고.”
* * *
2030 월드시리즈 3차전 4:2 애스트로스 승.
로저스는 6이닝 3실점으로 본인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분히 잘해냈다. 다만 주어진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점수 차이로 봐서는 박빙의 승부였을 것 같겠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완패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애스트로스가 아껴두었다 꺼내든 1선발은 7이닝 1실점의 쾌투를 선보이며 우리 타선을 잠재웠다. 1, 2차전에서 최대한 사용을 자제했던 불펜은 과연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만한 팀이구나 하는 두터움을 보여주었다.
게임 내내 단 한 번도 리그를 잡지 못하고, 우리 팀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클로저 체이스를 써보지도 못했다.
“병신 같은 놈. 나가 죽어버려라.”
로저스의 자책하는 듯 내뱉는 중얼거림만이 귓가에 남는 패배였다. 어느 순간부터 로저스는 포스트시즌 1승에 집착하고 있었는데, 올 시즌 마지막 등판일지도 모르는 경기에서의 패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기회가 있을 거야. 올해가 아니면 내년이라도…’
“스트라이크. 배터아웃.”
애스트로스의 5번 타자 맷 해리거가 4구째 날아든 99마일 패스트볼에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오늘의 선발 존슨은 초반부터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아직 5회인데 안타 하나 맞지 않고 벌써 두 자릿수 삼진이다.
‘짜식, 잘 던지네.. 챔피언십 이후에 칼 좀 갈았나?’
애스트로스의 2선발을 맞아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타선은 그래도 어제는 상대 선발로부터 1점은 얻어냈는데 오늘은 카스트로가 빗맞은 안타 하나를 때려내었을 뿐 아직까지 제대로 된 타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투구수도 55개면 적당하고 존슨 이 녀석 사고 한 번 치는 거 아냐?’
아직 5회이긴 하지만 오늘 존슨은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다. 수직 무브먼트가 평소보다 2~3인치는 커진 것 같은 포심이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따악-
‘악!’
가운데로 좀 쏠린 것 같은 패스트볼이 총알처럼 미닛 메이드 파크의 좌측 담장을 넘어갔다. 5m가 넘는 담장의 높이도 소용이 없었다. 이곳은 개폐식 돔구장이라 바람의 영향도 없다.
‘하아! 다 설레발 때문이야.’
단 1점 차였다. 경기를 뒤집기 위해 존슨이 내려간 이후 애덤과 체이스까지 올리며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를 뒤집지 못했다.
2030 월드시리즈 4차전 1:0 애스트로스 승.
결국 우리의 우세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시리즈 전적 2승 2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