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깨끗이 보내주마 (4)
퍽-
모두의 관심이 주심에게 집중되었다.
“볼.”
“FXXX. SXXX…"
관중석에서 시작된 소음이 더그아웃까지 명확하게 전해졌다.
마운드의 에이든은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있다. 타석의 테일러는 태연하게 장갑을 고쳐 끼고 있었다.
“됐어.”
“몰아넣었어.”
이제 볼 카운트는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 에이든의 조심성이 너무 과했다. 그는 투 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았지만, 어제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과감하게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밀어 넣지 못했다.
“코너워크에 너무 신경을 써버렸네.”
“판단 미스였던 것 같아.”
소르카와 드로이넨은 불이 난 집에 불이 꺼질 듯하다 더 번져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슬쩍 에이든을 돌려 까고 있다.
에이든은 아주 좋은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존 경계면의 몹시 애매한 지점으로 기가 막히게 들어갔다.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했어도 크게 불만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뭐 해. 타자는 스윙을 안 했고 볼로 판정되었는데…’
원 볼 투 스트라이크일 때부터 연속으로 두 개의 아주 좋은 볼을 던졌는데 다 볼 판정을 받았다. 본인이 일을 잘했다고 느껴도 그것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다 죽어가던 테일러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오호, 테일러의 선구안이 저렇게 좋았었어? 어떻게 골라냈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그아웃을 떠돌았다.
“킥. 골라내긴 뭘 골라내.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시즌에 최소 2할 5푼은 쳤겠지. 예측을 전혀 못한 곳에 공이 꽂히니까 몸이 얼어붙은 거야. 얻어걸린 거지. 테일러 저놈 지금 무안하니까 일부러 태연한 척 연극하고 있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가끔은 이렇게 되기도 한다.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테일러는 승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냉정히 말해 아직 살아난 건 아니지만, 이제 상대 투수의 선택지는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만루 풀 카운트에서 볼을 던질 수는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1점에 벌벌 떨어 이 상황까지 왔는데 이 시점에 유인구를 다시 던지기는 어렵다. 에이든에게 절대적 구위 같은 건 없다. 그건 우리 팀 존슨처럼 의도적으로 100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존에 펑펑 꽂을 수 있는 투수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에이든이 그런 타입의 투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든은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명확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 통상적인 투수와 타자의 승부는 투수 쪽이 7:3으로 유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투수의 선택지가 제한당하면 그 확률은 반대가 된다.
메이저에서 아무리 빌빌거리는 타자라고 하더라도 한때는 마이너에서 날아다녔던 시절이 다 있다. 지금처럼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한된 조건이 주어졌는데 그 정도를 감당하지 못할 타자는 리그에 없다.
틱-
“파울.”
포심으로 보이는 인코스 패스트볼을 테일러가 받아쳤지만, 포수 머리 위로 빠르게 넘어갔다. 경기장에 환호보다 침묵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나 이제 밀어 넣네.”
“이 상황에서 방법이 없잖아. 어쩌겠어.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나? 하핫. 나야 이런 상황에 몰리지 않았겠지.”
소르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부가 나 버렸다. 에이든에게 파탄이 드러났다.
따악-
가운데 쪽으로 몰린 패스트볼이 그대로 맞아 나갔다. 투아웃 상황이라 일단 공이 뜨자 주자들은 스타트에 거침이 없다.
“몰렸어.”
아마도 의도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려는 것 같았지만 딱 치기 좋은 한가운데 쪽으로 몰려버렸다. 타구는 순식간에 좌측 펜스를 훌훌 넘어가 버렸다.
‘미친…’
주자들이 베이스러닝 속도를 낮추며 차례로 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끝나버렸네.’
무려 다섯 점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테일러 이 미친놈.”
“가자. 자이언츠.”
홈에서 승리의 주역 테일러를 기다렸던 주자들이 테일러를 앞세워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선수들은 승리를 확신한 듯 환호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광란의 세리머니가 한동안 펼쳐졌다.
“Go. 자이언츠.”
조그만 소리로 구호를 따라 외치고 조용히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내가 끝내야 한다. 마지막 집중이 필요할 때다.
타악-.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공을 낚아챘다. 공을 잡고서도 솔직히 좀 얼떨떨하다.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원바운드의 강한 타구가 어느새 글러브에 들어와 있었다.
‘이젠 별게 다 되네.’
슬며시 웃음이 난다. 여유 있게 몸을 돌렸지만 1루 주자는 유격수조차 베이스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야 했다.
‘이게 세 개째인가?’
1(투수) - 6(유격수) - 3(1루수)로 이어지는 여유 있는 더블플레이가 될 것 같다.
"아웃!"
2루심의 아웃 콜에 주루를 멈춘 1루 주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퍼억-
다시 글러브에 공이 닿는 소리와 관중들의 탄식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아웃.”
1루심의 콜이 나온 순간 경기장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한 경기에 병살타를 세 번 치면 이기기 어렵다는 야구계 속설이 있다. 그 정도로 찬스를 소모하면 승리할 만큼의 점수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기에 나온 말이다. 병살타가 연속되면 자연스럽게 팀 분위기도 나빠진다.
“이런 FXXX. SXXX…"
관중석의 정적은 곧 깨졌다. 술렁임은 욕설로 터져 나왔다. 외야석 한쪽 구역을 점유하고 풍선 막대기를 두들기며 메츠를 응원하던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일군의 무리도 조용해졌다.
‘음. 선수들 분위기만 나빠지는 게 아닌가 보네. 어휴! 갑자기 가슴은 왜 이렇게 뛰는 거야.’
오랜 기간의 훈련에 의한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더블플레이를 해냈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몸이 떨려온다. 한 번에 올라왔던 긴장감이 풀어지며 몸과 마음이 잘 진정되지 않는다.
‘좀 위험했던 것 아니었나?’
반사적인 동작으로 공을 잡아냈다고 느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날아오는 공을 향해 글러브로 몸을 가리려고 했던 행동이었던 것 같다. 공에 맞을 것 같았던 몸을 보호하려는 움직임.
‘에고, 뭐든 잡았으면 되었지. 뭘 복잡하게 생각하냐? 편하게 투아웃을 잡았잖아.’
머리라도 맞았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더러운 메츠 놈들이 경기에 진 분풀이를 내게 하려 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풋, 이길 만하니까 별생각을 다 하네.’
타구 방향 조절이 그 정도로 가능하다면 메이저리그엔 4할 타자가 넘쳐날 것 같다. 현실적인 생각은 운이 좋았다. 의식적으로 잡은 것도 아니고 글러브에 맞고 굴절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더블플레이는 어림도 없다.
‘병살타가 아니고 아마 내야안타가 되었겠지.’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이게 되면 이렇게 수많은 생각거리들이 생긴다. 다 부질없다. 가정이란 것은 미래의 상황을 예측하거나 계획하기 위해 필요한 거다. 현실은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본능에 기반한 초 울트라 캡숑 급의 반사 신경으로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수비를 해낸 내가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 7회 현재 5:0의 스코어가 유지되고 있고 병살타를 세 개 친 팀은 못 이긴다가 현실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팩트로 말하자면 이젠 주자도 없고, 투아웃인데다가 메츠의 추격 의지가 꺾인 듯 보인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역시 잘난 놈은 뭘 해도 되는 거지. 내가 원래 좀 하잖아.’
따악-
“악!”
자신 있게 붙인 몸쪽 패스트볼이 그대로 맞아 버렸다. 타구는 좌측 담장을 시원하게 넘어갔다.
‘아! 빌어먹을… 또 설레발을…’
마음이 너무 풀어진 것 같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병신 같으니라고… 니가 존슨도 아닌데 여기서 힘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 해.’
메이저리그 투수가 100명이라 했을 때 힘 순위로만 따지면 난 100번째일 거다. 어디서고 나보다 신체 사이즈가 작은 투수를 본 적이 없다.
‘힘도 없는 놈이 무슨 힘을 쓰겠다고…’
난 힘 있는 공을 던지는 투수가 아니다. 난 쓰로워가 아니라 피처가 되어야 한다. 야구 초기 투수는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는 단순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반발력이 적은 공을 쓰던 시절이라 투수는 힘들이지 않고 던지는 일만 했다. 1884년 이전에는 오로지 언더핸드스로만 허용되었고 오버핸드스로 투구법은 허용되지 않았다. 맞춰 잡는 야구가 그때의 룰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상황이 바뀌면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당연히 그에 따른 준비도 바뀌어야 한다. 그게 세상의 룰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조금만 마음이 풀리면 안락함을 향한 방심이란 놈이 고개를 쳐든다.
‘아직 5:1이야. 괜찮아. 신중하게…’
와인드업을 하지 않고 슬라이드 스텝으로 공을 던졌다. 어차피 난 구속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파워피처가 아니다. 구속 조절을 빠르게 느리게가 아니라 느리게 더 느리게로 해야 하는 유형이었다.
“스트라익.”
싱커를 존에서 떨어트렸다. 높낮이 조절로 타자의 배트를 끌어내고 구속 조절로 타격 타이밍을 흩트렸다.
틱-
빗맞은 타구가 천천히 2루수 앞으로 구른다.
‘그래. 이거지.’
이게 내 모습이다. 난 이런 투수로 메이저리그에서 살아왔다.
“아웃.”
1루심의 힘찬 콜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두 이닝 남았다.
“뭐라고요? 이거 교체를 하겠다는 뜻인가요?”
어제 경기에서 애덤과 체이스로 이어지는 필승의 불펜 운영을 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길게 던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7회 말을 막아내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마자 들은 말이 수고했다라는 말이다.
“자네가 계속 던져도 괜찮겠지만 이제 월드시리즈를 생각해야지. 굳이 많이 던져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 투구 수도 얼마 안 되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어휴! 투구 수를 투수 코치가 모를 리가 없잖아. 나름 생각이 있는 거겠지.’
지금까지 벤치는 너무 잘해 왔었다.
‘일방적 통보가 아닌 게 어디야. 내가 여기서 부딪쳐야 할 이유가 없지.’
그래도 에이스 대접해주느라 나름 성의를 보이는 것 같다.
“예. 알았습니다.”
갑자기 교체가 되었다. 경기를 계속 지켜보고 싶었지만, 트레이너에게 이끌려 아이싱을 하러 락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어깨를 동여매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9회 말 스코어는 5:2 내가 못 보던 사이 메츠가 한 점 따라왔지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다. 주자도 없고 벌써 투아웃이다.
관중석에 벌써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인다.
“볼.”
체이스가 커브를 잘 떨어트렸는데 아쉽다.
“아! 그걸 안 잡아주네.”
선수들 사이에서 아쉬움을 표현하는 말이 나왔지만 별로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당연하다. 다 이겨있는 경기에서 심판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
심판의 콜 하나마다 작은 술렁임과 탄식이 교차한다.
“스트라익. 배터아웃.”
루킹 삼진과 함께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애매한 소음이 더그아웃에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