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36화 (136/200)

136화. 깨끗이 보내주마 (3)

알버트의 짧은 안타에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무사 2루가 순식간에 무사 1, 3루가 되었다.

메츠에서 타임을 걸고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다. 정말 무엇인가 되어도 될 것 같다.

“좀 전에 그거 알버트가 진짜 번트를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는 뜻으로 말한 거야?”

경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아직 내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응. 내가 감독이었다면 정상수비 위치에서는 진짜 번트를 대라고 지시했을 것 같아. 다음 타자가 리그 수위타자로 이어지는데 원 아웃에 3루면 거의 1점이나 마찬가지지. 이 경기 우리가 선취점을 내면 거의 이기지 않겠어?”

그럴듯한 예상 같기는 하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드로이넨의 말은 메츠가 그런 압박을 받는다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든 아니든 효과는 똑같다는 뜻이야. 실제로 그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메츠가 번트를 막기 위해 수비를 당겼잖아.”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르카가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들어도 알 듯 말 듯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 믿어줘서 고맙긴 한데… 쬐끔 부담스럽네.’

4회면 아직 경기 초반인데 메츠가 왜 그렇게 한 점에 집착했었는지 이상할 뿐이다.

‘아까 무사 2루 된 그 장면이 승부처라고 생각했던 건가? 지금은 그 승부처에 내린 결단이 잘못된 거고?’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그 장면에 줄 점수는 준다고 생각하고 아웃카운트를 늘려가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 같다. 아무리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은 무사 2루에서 무사 1, 3루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이렇게 될 거였다면 보내기 번트에 응해주고 1사 3루를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건 너무 치우친 생각이잖아.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되지.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메츠 감독은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의 선택을 했고 그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

내 생각에 드로이넨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메츠 감독은 용감한 선택을 한 거야. 무난하게 지기를 거부하고 흐름을 바꾸려고 했어. 선택은 존중받아야겠지. 물론 결과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하겠지만.”

“그 책임 추궁은 우리 타자들이 잘 해낼 거야.”

타악-.

베그웰에게 기다림이란 없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가 나왔다. 타구의 움직임보다는 조금 둔탁한 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헉! 뭐지?’

배트가 부러졌다. 부러진 배트 조각과 타구가 함께 날아갔다. 메츠의 유격수가 필사적으로 점프를 하며 글러브 낀 손을 뻗어 봤지만, 타구는 그 위를 살짝 넘었다.

제대로 힘이 실린 타구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메츠에게는 몹시 기분 나쁜 안타다.

‘여기서 완전히 보내 버리네.’

차라리 그 방향으로 잘 맞은 타구가 날아갔다면 우익수가 전진하며 처리할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빗겨맞은 공은 유격수를 넘기기 무섭게 급격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느리게 굴렀다.

이런 안타를 맞고 실점하면 오늘은 안 되는 날인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운수소관으로 생각하며 넘겨야 하는데 사람이란 게 바른 생각이 항상 바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찜찜함이 계속 머리에 남는다.

마운드에 올라와서 두 타자를 상대했는데 연속으로 이상하게 느껴지는 안타를 맞는다면 웬만한 투수는 멘탈을 유지하기 어렵다.

‘저건 또 왜 저러는 거지?’

내가 보기엔 1루 주자였던 알버트가 3루까지 가기에 충분해 보이는 타구였는데 주루 코치는 2루를 돌아 3루로 방향을 잡은 알버트를 말렸다. 주루 코치의 손짓에 알버트는 황급히 다시 2로 돌아갔다.

‘나 참! 이상한 데서 신중하네. 뭘 그렇게까지 조심을 해.’

어이없는 타구가 안타가 되기도 하고 잘 맞은 타구가 호수비에 잡히기도 하는 게 야구이지만 통상적으로 우익수가 이 상황에서 강력한 송구를 3루에 뿌리기는 어렵다.

“헐!”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시즌 내내 몇 번 구경하지 못한 정확하고 강력한 송구가 3루수에게 전달되었다. 알버트가 3루로 계속 뛰었으면 접전 상황이 되었을 것 같다.

‘판단력 지렸네. 맞아.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정말 우리 팀 상황과 상대 메츠의 상황이 기가 막히게 대조된다. 선택을 하면 일이 계속 꼬여가는 팀과 어떤 판단이든 결과가 좋게 나타나는 팀.

‘오늘 되는 날이네.’

이제 마운드를 방문해서 투수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은 장면인데 지금 메츠는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이번 회에 마운드를 방문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다 써버렸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정말 메츠가 불쌍할 지경이다.

틱-

‘에구, 이건 좀…’

우리 팀의 4번 타자 레블론의 타구는 느리게 2루수 앞으로 흘렀다. 의식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밀어 친 덕분에 진루타는 될 수 있었다. 자칫 했으면 더블플레이가 나올 뻔했다. 원아웃에 주자는 2, 3루. 다음 타자인 카스트로에게는 조금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서 고의 사구를?’

메츠에서 카스트로를 피했다. 그를 상대하는 대신 빈 1루를 채웠다.

‘쩝! 필 아저씨 열 좀 받겠네.’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우린 더블플레이를 노려요라고 말하고 있다. 필이 아무리 우리 중심타선에서 가장 타율이 낮은 타자라고 하지만. 그의 타율도 2할 5푼은 된다. 그리고 몇 년간 계속해서 매 시즌 20~30개의 홈런을 쳐낸 파괴력이 있는 타자다.

팀 홈런이 리그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타선의 파괴력을 보충해 주는 유능한 타자다. 지난 10년간 메이저리그에서 기록된 게임당 평균 홈런은 2개가 조금 넘는다. 대개의 팀은 정규 시즌에 180~200개 정도의 홈런을 쳐낸다. 우리 팀은 지난 5년간 연평균 150개를 넘은 적이 없었다.

이 상황은 그에게는 상당히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일이다. 타석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화가 난 등이네.”

“풋. 등에 표정이 있어? 그런 게 보여?”

“승모근이 긴장하고 있잖아.”

드로이넨이 농담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목 옆에 산맥처럼 붙어있는 상부 승모근의 융기가 도드라져 보이기는 한다.

“그거 안 좋은 거잖아.”

주로 어깨를 뒤로 당기는 데 이용되는 근육이 긴장하고 있다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글쎄, 긴장을 하면 통상적으로 안 좋다라고는 하지만 긴장감이 너무 없어도 좋지 않잖아. 이런 자극이 좋은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스트라이크."

필은 초구로 들어온 패스트볼을 그냥 지켜봤다. 상당히 신중한 자세다. 타석으로 갈 때는 도끼질이라도 할 듯했던 기세였는데 조금 의외다.

“볼.”

필도 경험 많은 노련한 타자라서 기분과 상관없이 쉽게 타석을 끝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틱-

“파울.”

“볼.”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서로의 기세가 부딪쳐 불꽃이 튄다. 결전의 순간이 왔다. 투수로는 기필코 승부를 들어가야 하는 볼 카운트다.

볼을 하나 뺄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없고는 아주 큰 차이다. 타석에 선 타자에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으면 많을수록 투수에게 유리하다. 만약 쓰리 볼이 되면 만루 상황임을 감안해 타자의 머릿속에서 유인구를 조심해야 한다는 선택지가 지워진다.

투 스트라이크라서 웬만하면 커트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타자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잡을 수밖에 없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라는 지금의 볼 카운트에서 타자의 선택지가 가장 많다.

이런 상황에서 대개의 결정구는 스트라이크인 듯 볼인 듯 애매하게 스트라이크 존의 경계로 향한다.

볼을 던지면 바로 투수가 심리적으로 쫓기게 되는 상황이 나오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지금이 유인구를 던지기에 가장 좋을 때다.

“브레이킹 볼을 던질 타이밍이야. 아마도 슬라이더겠지.”

에이든의 주력 구종인 슬라이더는 2차전에서 신물 나게 많이 봤다. 상당히 좋은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유인보다는 정면 승부일 때 쓸 수 있는 선택지다. 그리고 필은 노장이지만 아직 기본 배트 스피드가 죽지 않았다. 패스트볼에 상당한 강점을 가진 타자다.

‘이 상황에서 에이든이 절대로 패스트볼을 던질 리가 없어.’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헉!”

에이든에게 허를 찔렸다. 인코스 낮은 쪽으로 예리하게 컨트롤된 포심패스트볼이 파고들었다. 기록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쪽은 전형적인 당기는 어퍼 스윙을 하는 필에게 강점이 있는 코스였다. 그래서 어떤 투수도 그쪽으로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는다. 인코스 패스트볼은 열 개면 열 개 모두 높은 쪽을 향한다.

“역으로 노렸네.”

“그러게 말이야. 지금은 적이지만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네.”

소르카와 드로이넨이 작게 속삭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다. 휘둘러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쪽을 노리고 앞 공들은 목적구로 사용했던 것 같다.

‘결과를 보고 나면 이렇게 명확하게 알겠는데 참… 아! 이러면…’

아주 많이 곤란하다. 한 회에 3개의 안타를 집중시키고 볼넷도 있는데 1득점은 너무 적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메츠가 1실점으로 이 장면을 막아낸다면, 우리 팀에 좋았던 흐름이 상대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만루 찬스가 이렇게… 응?’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있다.

“앞서의 일도 있는데 테일러에게 기대를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원래 되는 놈이 되는 거잖아.”

소르카의 말이 들리는 순간 잊어버렸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랬다. 2차전에서 에이든을 결정적으로 박살 낸 건 우리 팀의 7번 타자 테일러였다.

‘그때도 볼넷으로 만들어진 만루였지.’

지금도 비슷한 과정으로 만루가 만들어졌다. 아웃카운트가 다르고 그때 안타도 행운이 작용했었다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테일러 앞에 계속 이렇게 만루 찬스가 만들어지는 건 일반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오묘한 어떤 이치가 작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이든은 타석에 들어서는 테일러를 보고서도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난 안다. 투수는 그런 사건을 결코 잊지 않는다. 투수에게 안 좋은 사건은 가급적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다음 투구를 위해 좋지만 그런 기억은 의도적으로 잊으려 한다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투수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따지고 보면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만에 하나 억지로 잊었다고 하더라도 테일러를 보는 순간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왠지 에이든의 승모근이 도드라져 보인다.

‘흐흣. 신경 많이 쓰이지? 징크스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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