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깨끗이 보내주마 (2)
2구 역시 초구와 비슷한 궤적을 가진 채 아웃코스를 파고들었다. 눈에 익은 코스에 공이 나타나자 타자의 배트가 바로 따라 나왔다.
티-익
배트 끝에 스친 공이 지금까지의 비행궤도를 급격히 벗어나 포수 머리 위로 넘어갔다. 타자가 내게 험악하게 눈을 부라린다.
‘뭘 그렇게 쳐다봐. 길이 나타나 그곳으로 향했을 뿐이야. 설마 내가 같은 공을 던져주길 바랐던 거야? 니가 좀 뒤로 물러나면 해결될 일이잖아.’
이번엔 슬라이더였다. 초구과 공 끝의 휘는 방향이 반대인 공이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좀 얄밉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떤 게임이든 룰을 잘 이용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도 능력이다.
‘손해 본 기분이 들어? 내가 못하는 걸 남이 한다고 열이 올라온다면 그건 니가 이상한 거야.’
타자는 붙어 섰던 타석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날 쳐다보는 눈이 더 험해졌다. 주심의 위치는 그대로다.
‘자업자득이란 말 알아? 지금 니가 그 꼴이라고.’
이제 모든 준비는 갖춰졌다. 인코스 꽉 차게 빠른 싱커를 밀어 넣었다.
틱-
생각대로 배트의 손잡이 쪽에 가깝게 맞은 공이 3루수 앞으로 구른다.
‘적당한 빠르기와 방향.’
그렇지만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아직 많이 남았다. 3루수 테일러가 전진 스텝을 밟으며 굴러오는 공을 건져 올렸다. 2루 송구. 여기까지는 좋다.
2루수 크로포드가 달려오며 송구를 받고 가볍게 2루 베이스를 밟았다. 1루 주자의 과격한 슬라이딩. 몸으로 송구 방향을 가리며 똑바로 2루 베이스로 발을 들이민다. 이런 걸 테이크 아웃 슬라이딩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슬라이딩이 가끔 유격수나 2루수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 야수를 방해하려는 의도로 주루의 진행 방향을 바꾸면 안 된다라는 규칙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현장에서 엄격하게 적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수비하는 내야수가 알아서 피해야 한다.
주루의 진행 방향을 고의로 바꾸었다는 것이 인정되면 그냥 병살 처리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주자와 일부러 충돌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주자가 슬라이딩하는 발의 높이에 따라 수비하는 내야수의 발목 또는 무릎이 아작 나는 경우도 생긴다. 룰과 상관없이 수비하는 입장에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변함없다.
2루수 크로포드가 베이스를 짚은 발을 디딤발 삼아 그대로 점프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의 운동 방향과 역방향이던 1루로 점핑 스로우. 이건 볼 때마다 환상적이다.
1루수 필의 글러브에 공이 정확히 들어갔다. 타자 주자는 열심히 달렸지만 1루 베이스에 닿으려면 한두 걸음은 더 필요했다. 확연하게 아웃 타이밍인데도 심장이 쫄깃해진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순간 경기장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잠시의 정적이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이윽고 1루심이 자기 할 일을 했다.
"아웃,"
타자의 타격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진 수비와 송구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기분으로는 한 5분 정도는 지난 것 같다.
“휴우!”
멈췄던 숨이 겨우 쉬어진다.
‘쫄기는…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어.’
시리즈 마지막 경기라는 중압감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나 보다.
일순간 시티 필드(Citi Field)가 관중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곧 야유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정신이 겨우 현실로 복귀했다. 이제야 겨우 현실감이 느껴지고 있다.
‘그래. 이거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우리 홈도 아닌데 그럴 수는 없다. 아직 1회인데 벌써부터 도발이라고 보여질 수 있는 행동은 곤란하다.
그냥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가볍게 지어 보이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대신했다.
5(3루수) - 4(2루수) - 3(1루수)로 이어지는 깨끗한 더블플레이였다. 3루수의 대시가 좋았다.
병살타는 수비팀에겐 최고의 흐름이지만, 공격팀에겐 찬스와 전의 상실이라는 이중고를 가져다준다. 이건 꾸준히 출장하면서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많이 타석에 오르는 중심타선에서 자주 일어난다는 어이없는 특성이 있다. 거기에 발이 느리고, 오른쪽 타석에 서는 메츠의 4번 타자 잭 플레처는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최고의 타켓이었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통산 병살타 순위는 알버트 푸홀스, 칼 립켄 주니어, 미겔 카브레라 이런 순서로 되어 있다.
첫 회부터 무사 1, 2루의 실점 상황을 맞았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게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
“잘했어.”
“고마워. 야수들이 잘 도와줘서 그렇지.”
더그아웃에서 이렇게 가식적으로 말하긴 싫었지만, 승리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참고 넘어가야 한다. 정확한 팩트는 야수의 실수가 없었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후하! 첫 회부터 맛 갈 뻔했네.’
***
우리 팀의 4회 초 공격이 진행 중이다. 지난 이닝 동안 잠잠하던 우리 타선이 드디어 터지기 시작했다.
위기 뒤 기회라고 사실은 더블플레이로 실점 위기를 막았던 1회 말 수비에 이은 2회 초를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별 내용 없었다.
삼자범퇴가 세 번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첫 안타가 나왔다.
‘딱 한 타순 버틸 수 있는 투수라고 판단한 건가?’
4회에 첫 안타를 맞았을 뿐인데 사정없이 투수를 바꾼다. 상대 투수의 구위가 떨어졌다든가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보기엔 빨라도 너무 빠른 타이밍이다.
‘처음부터 오프너라고 생각하고 올린 투수였을지도… 그래도 시즌에는 4선발로 뛰지 않았었나?’
메츠는 지난 이틀 동안 그렇게 많은 투수를 쓰지 않았었다. 투수진에 여유는 있다,
‘헐! 여기서 쟤가 왜 나와?’
2차전 선발이었던 메츠의 2선발 에이든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2차전에서 7이닝을 던졌다. 그리고 3일을 쉬었다. 혹시 오늘 나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경기 전에 하기는 했었지만, 정상적으로 4선발이 기용되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메츠는 처음부터 이렇게 투수기용을 가져가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당히 궁금하다. 이렇게 해서 오늘 경기를 어떻게 이긴다고 쳐도 모레 벌어질 6차전에서는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닌 건 알지만, 내일이 없는 팀을 바라보려니 마음이 애잔하다. 에이든이 연습구를 몇 개 던진 후 빠르게 경기가 재개되었다,
에이든은 2차전에서 아주 잘 던졌다.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던 7회 이전에는 안타도 거의 맞지 않았고 무실점으로 우리 타선을 꽁꽁 묶었었다.
‘잘못하면 피곤해질 수도 있겠네.’
메츠를 아픔 없이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그들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스트라익.”
느닷없이 1루 주자인 크리스의 도루 시도가 나왔다. 타자인 알버트는 의도된 헛스윙으로 포수의 송구 타이밍을 방해했다.
“이건 뭐야?”
그동안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우리 팀은 신중하게 플레이하는 팀이었다. 모험적인 시도를 아예 배제하고 또박또박 아주 보수적으로 경기를 운영해왔다. 객관적인 전력의 우위를 확신하는 팀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술이다.
내 기억으로는 이건 우리 팀의 포스트시즌 첫 도루 시도다. 그리고 지금도 1루 주자의 리드는 크지 않았었다. 이런 의외성은 성공 가능성이 아주 높다.
‘허를 찔렀네. 크리스가 겁나 빠르기도 하고…’
우리 감독이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크리스는 넉넉한 차이로 2루에 안착했다.
투수는 기본적으로 민감한 생물이다. 그리고 누구나 처음이 가장 어렵다. 투수도 역시 마찬가지다. 에이든은 선발투수였다. 정규시즌 내내 선발로 뛰었고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봐도 계투의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계투에 생소한 투수가 경기 분위기에 적응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감독은 그 시간을 주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작전 걸기에 아주 적절한 시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라드 감독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정말 놀라겠네. 어? 이건 또 뭐야?’
알버트가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주 생소한 광경이다. 알버트는 올 신인상이 거의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주 유능한 선수다. 그의 포지션이 외야수인 것을 감안하면 타격이 웬만큼 특출나지 않고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는 3할 이상의 타율과 20개 이상의 홈런을 쳐냈다. 출루율이 무려 4할에 육박한다.
‘그런 타자에게 보내기 번트라니…’
내가 투수였다면 도저히 못 믿는다. 아마도 번트를 대는 척하다가 타격으로 전환하는 페이크 번트 슬래시(Fake bunt Slash, 버스터)를 시도한다고 생각할 것 같다.
“엉?”
메츠가 내야 수비를 앞으로 당겼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나도 생각해 내는 걸 상대팀 벤치가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런 상황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 소르카와 드로이넨이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평소에는 등판이라고 해서 특별히 따로 혼자 앉거나 하지 않았지만, 오늘같이 중요한 경기에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미리 말을 해놓고 말없이 있었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안 되겠다.
‘이런 건 드로이넨이 잘 알겠지?’
“저기 드로이넨…”
그가 날 보더니 픽 웃는다.
“소르카. 내가 이겼어. 내가 그랬잖아. 5회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크크큿, 그래 졌어. 내가 완전히 잘못 판단했네.”
‘이것들이 나 가지고 내기를 한 것 같은데… 나 때문에 내기에서 이겼으면 내 몫도 있어야지. 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게 모두에게 득이 될 수도 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아! 미안. 우리 선발께서 그런 것이 있으면 안 되지.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이렇게 발걸음을 하셨나?”
드로이넨이 웃음을 감추지 않고 농담조로 말을 건네 왔다.
“지금 왜 메츠가 수비를 당겼는지가 궁금해서… 알버트가 번트를 할 리가 없잖아. 그가 번트를 대는 건 훈련 때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농담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하는 법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생각에는 번트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수비를 안 당겼으면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을걸?”
알버트는 타석에서 여전히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좀 찝찝한지 여기저기를 찔러보며 좋은 공을 주지 않고 있다.
“아니, 3할 타자에게 번트를 시키는 게…”
타악-
역시 알버트는 번트를 하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밀어 친 타구가 빠르게 2루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정상수비 위치였다면 잡혔을지도 모를 타구였다.
“메츠에게는 지면 마지막이 될 경기잖아. 투수가 너인데 1점 선취당하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때로는 알면서 당해줘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드로이넨에게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