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34화 (134/200)

134화. 깨끗이 보내주마 (1)

‘빌어먹을… 별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생기네.’

오랜만에 욕을 좀 했는데 이 정도로는 약발이 안 먹힌다. 너무 부드러운 표현이었다. 수위를 좀 올려야 할 것 같다. 한동안 욕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내가 좀 변한 건가?’

주변 상황이 많이 좋아지면서 항상 절벽 위에 선 듯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긴 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사람에게 변화는 자연스러운 거다.

당연히 올챙이에게는 올챙이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있고 개구리에게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개구리가 되었는데 올챙이처럼 산다는 건 어딘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오늘 좋은 기분으로 마운드에 올랐는데 첫 타자부터 일이 꼬인다.

지난 등판이었던 1차전을 분석한 결과 메츠의 타자들은 컵스 타자들처럼 내 공을 가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정규 시즌의 투구 패턴을 처음부터 가져가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이런 출루가 자꾸 나오면 투구 플랜이 꼬인다.

‘땅볼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수비가 불안하면 어떻게 하냐고.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려고 했더니 첫 타자부터 에러를…’

정말 지금이라도 달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 좀 전에 괜찮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벌써 후회스럽다.

‘벌써 다 이긴 것처럼 마음이 풀어져 가지고…’

물론, 생각을 그렇게 했다는 거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마음은 없다. 그런 식으로 성질부려 봐야 내 멘탈 관리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야수에게 마음의 부담만 가중시키게 된다.

‘그래. 그걸 꼭 유격수의 실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거잖아. 본인 이외에는 안 보이는 불규칙바운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늘 잘해왔는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빗맞은 타구를 잘못 잡은 게 문제가 아니라 오늘이 챔피언십 시리즈의 최종전이기를 바라는 내 급한 마음이 진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 걸쭉하게 욕 한 번 하고 풀어버리는 거야. 그럼 되지. 그런데…’

욕을 안 한 지가 꽤 오래되다 보니 그때 어떤 식으로 해서 기분을 풀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단 투구자세에서 발을 풀고 1루를 바라봤다. 주자 황급하게 귀루하려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견제구를 하나 던졌다.

주자의 리드 폭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그래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거지.’

냉정한 판단이 되는 걸 보니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고 있다. 집중이 안 될 때 투구를 하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다.

다시 투구자세를 잡고 베그웰의 사인을 살폈다. 1루 주자 견제사인이 나왔다. 내 머리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투구자세에 들어가면 주자를 살필 수가 없다. 보통 견제에 관한 것은 포수의 지시를 따라서 한다.

‘이번엔 빠르게…’

주자가 역동작에 걸렸지만 억지로 몸을 날려 1루 베이스를 짚었다. 간발의 차이로 잡아내진 못했다. 애초에 잡을 생각으로 던진 견제구는 아니었지만 조금 아쉽다.

‘씨XX… XXX.'

갑자기 막혀있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바로 이거였어.’

눈으로 지긋이 경고의 메시지를 한 번 더 날려주며 천천히 타자를 향해 돌아섰다.

‘인코스. 좋지.’

이번엔 견제구에 대한 사인이 없다.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걸 참으며 사인대로 과감하게 패스트볼을 뿌렸다.

퍼억-

‘에구, 이런…’

메츠의 2번 타자인 보우먼이 몸을 틀었지만, 공은 그의 허벅지를 때려버렸다. 보우먼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쏘아보며 뭔가 말하려다 고개를 돌리고 배트를 던졌다. 보호 장구를 풀고 묵묵히 1루를 향해 달려갔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미안함을 담은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돌리자 주심이 날 쏘아보고 있다. 상당히 애매하게 느껴지는 눈빛이다.

‘퇴장은 안 돼요. 이건 완전히 실수였다니까요. 이런 중요한 경기 첫 회부터 일부러 무사 1, 2루를 만드는 투수가 어디 있겠어요?’

주심이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 주려는 모양이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가 보다. 아니면 내 애절한 눈빛 연기에 넘어갔든지…

‘내 참 더러워서. 나라고 실수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완전히 실수였다고.’

공이 손끝에서 떨어졌을 때 마침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났었다. 로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투구를 이어갔던 것 같다. 공을 던지기 전 송진 가루가 담긴 로진백을 한 번 만져줬어야 했는데 견제구를 두 개 던지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바로 투구자세에 들어가 버렸다.

나의 제구 능력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 볼넷이나 몸에 맞는 볼 허용 기록 등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래서 이런 일의 고의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가 없다.

공 맞은 타자인 보우먼도 아마 정규 시즌에서 이런 상황이 나왔다면 나에게 달려들었을 확률이 100%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어서가 아니라 중요한 경기이고 메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에 흐름을 끊지 않으려 아픔을 꾹 참았을 것이다.

‘이거 일이 꼬이네.’

메츠의 3번 타자인 짐 라이스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부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 내내 출전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처음 나왔다. 지금 부상 당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부상은 나았을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부상 부위가 나았다고 하더라도 컨디션이 회복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인지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이 아직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도 있잖아.’

몇 시즌에 걸쳐 꾸준히 30홈런을 쳐냈던 수준급의 타자인 것은 확실하다.

‘수위를 좀 짚어볼까?’

“파울.”

상태 확인을 겸해서 초구로 몸쪽에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패스트볼을 찔러 넣었다. 보통 몸이 안 좋으면 반응 속도가 느려진다. 배트가 나왔지만, 파울이었다.

좀 전 내 혼신의 힘을 다한 투구는 91마일이 나왔다. 나에게는 몹시 빠른 볼이었지만 사실은 리그 평균에 못 미치는 구속이었다.

'확실히 늦네.'

라이스는 전형적인 당겨 치는 타자였다. 게다가 인코스의 빠른 볼. 그런데 파울이 된 타구는 1루 쪽으로 날아갔다. 타격 타이밍이 명백하게 밀렸다. 이건 공의 스피드에 못 따라갔다는 뜻이다.

'이렇다면 굳이 땅볼로 유인을 할 필요가 없을까?'

가급적이면 땅볼을 유도해 더블플레이를 노려볼 생각이었지만 힘 있는 타자에게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 준다는 것 자체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내 생각이 보였는지 베그웰에게 하이 패스트볼 사인이 왔다.

‘쓸데없이 잔재주 부리지 말자는 거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위해서 사고는 유연해야 한다.

계속 패스트볼로 밀어붙였다. 그중 두 개가 헛스윙을 유도하면서 라이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렇게 타자를 힘으로 윽박지른 건 중학교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주자는 리드 폭을 많이 가져가며 계속 나를 흔들어보려 했지만, 그것이 도루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이 상황에서 3루 도루는 우리 팀보다는 상대에게 더 많이 부담스러운 선택지이다. 실패했을 경우 안아야 하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원아웃 1, 2루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제 내야로 땅볼 하나만 굴리면 끝이야.'

메츠의 4번 타자 잭 플래쳐는 메츠라는 강팀에 어울리는 훌륭한 타자이기는 하지만 육중한 체구 때문에 발이 아주 느렸다. 3루타와는 아예 인연이 없고 상당히 깊은 타구가 아니라면 2루타도 잘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땅볼을 나오기만 한다면 거의 더블 플레이를 해낼 수 있다.

플래쳐가 타석 들어서며 나를 슬쩍 쳐다본다.

‘엉? 붙어? 어이! 아저씨. 그래 가지고 인코스를 어떻게 치겠어? 그렇게 붙으면 내가 힛바이 피치(hit by pitch, 사구)가 겁나서 인코스를 못 던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몸에 맞는 볼 하나를 내줬더니 별 거지 같은 경우를 다 당한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응? 이건 또 뭐야?’

주심이 내가 보는 쪽에서 좌측으로 조금 옮겨 선 것 같다. 전 타자 때와 확실하게 다르다. 그의 위치가 홈 플레이트 중앙이 아니라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의 끝에 가깝게 서 있다.

‘오호! 타자가 너무 붙어서 홈플레이트 일부가 가려서 안보이니까 옮긴 것 같은데…’

주심이 투구를 보는 각도가 바뀌었다. 경험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경우 스트라이크 존이 같이 움직이게 된다. 아무리 상황을 고려해 판정을 한다고 해도 사람의 신체감각이 그렇게 단시간에 변화가 자유롭지는 않다.

‘아마 대부분의 투수는 이런 거 신경 쓰지도 않겠지?’

대다수의 투수는 그런 것을 알아도 의식적으로 이동된 스트라이크 존에 맞춰 공을 꽂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주심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첫 구가 중요해. 주심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고정된 존에 의한 일관성 있는 판정이라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위치에…’

투구판을 밟는 위치를 3루 쪽으로 슬쩍 옮겼다. 이렇게 아웃코스를 향해 던지면 스트라이크 존으로 향하는 공의 입사각(표면에서 수직한 선과 그 표면에 입사하는 선이 이루는 각)이 더 커지게 된다.

다짜고짜 이제까지 주심이 잡아줬던 아웃코스 존에서 한 개쯤 더 빠지게 패스트볼을 던졌다. 내 패스트볼은 일반적인 오른쪽 투수가 던지는 투심과 거의 비슷한 궤적을 가지고 있다.

존을 빠져나가려던 공이 마지막 순간 백도어성의 움직임을 보이며 노렸던 위치에 정확하게 안착했다.

타자는 움찔했지만, 배트를 내지 않았다. 타자에게는 상당히 멀어 보였을 것이다. 보통의 타자들은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 밖의 공은 치지 않는다. 공을 잘 골라내는 선구안이야말로 탑플레이어와 평범한 타자를 가려내는 기준점이다.

당연히 탑플레이어인 메츠의 4번 타자가 명백하게 존 밖으로 나간 공을 건드릴 리가 없다.

“스트라이크.”

플래쳐의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하면서 타석에서 물러났다. 타자가 심판을 돌아본다는 건 판정 특히 스트라이크 존에 불만이 있을 때 나오는 행동이다. 그 의미가 선수마다 다를지는 모르지만, 대개의 심판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도전도 있지만, 스트라이크 볼 판정은 아직 심판의 고유권한이다. 비디오 판독도 이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심판 권위에 대한 도전이 판정에 유리하게 작용할 리가 없다. 그래서 불문율 아닌 불문율로 타자는 타석에서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내심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쉽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늘 내 컨디션이 나쁜 쪽은 아니었는데, 일이 요상하게 꼬여 고민스러웠는데 갑자기 마음이 풀어졌다.

‘에고, 긴장 풀지 말자. 설레발은 필패야. 흐흣. 플레쳐 넌 이제 끝났어.’

마음을 가다듬으며 2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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