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33화 (133/200)

133화. 반격과 재반격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야구 캐스터 그래엄은 이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난조는 길게 던지는 선발 투수라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럴 때 얼마나 빨리 회복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느냐에 따라 레전드가 되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투수로 끝날 수도 있죠.”

첫 타자를 삼진으로 삼았을 때 중계진들은 게임의 흐름에 맞춰 자이언츠의 챔피언십 시리즈 스윕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3차전도 거의 자이언츠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그 순간이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 그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홈 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주자들이 차례로 홈을 밟고 있었다. 2:0의 스코어가 2:3이 되었다.

“선발 로저스를 이어 6회부터 잘 던지던 존슨 투수 8회 말 1사 후 볼넷과 내야 안타로 주자를 출루시킨 후 8번 멕도웰 선수에게 역전 홈런을 허용했습니다. 주자가 두 명이 되었을 때 왜 투수 교체 없이 밀어붙였을까요?”

“일단 볼넷은 볼 판정이 좀 애매했었죠. 특별한 컨트롤 난조 때문에 준 볼넷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내안타도 운이 작용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빗맞은 타구였고, 특별히 투수의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벤치로서는 그냥 운이 좀 안 좋게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자이언츠 팬으로서는 너무 아쉬운 결과가 나와 버렸네요. 다 잡았다고 생각한 경기가 종반에 이렇게 역전되다니…”

“결과론입니다. 지금 상황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야구죠. 요기 베라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전 감독의 말을 메츠가 잘 실천한 거죠.”

1973년 시즌 메츠는 7월까지 지구 선두 컵스에 9.5게임을 뒤진 꼴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기자가 메츠의 가을 야구는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메츠 감독이었던 요기 베라가 그 기자에게 쏘아붙인 말이라고 한다. 결국 그해 메츠는 절망적이던 상황을 반전시켜 지구 우승을 해냈으며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전 그가 양키즈 선수일 때 했던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어쨌든 지금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자이언츠의 생각을 좀 추측해보면 그런 기분 나쁜 출루에도 불구하고 8, 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 타선이었죠. 8번 타자 멕도웰은 시즌 타율이 2할에 채 못 미치고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1, 2차전을 다 합쳐도 1안타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스윙 스피드가 느려서 95마일 이상 패스트볼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명확한 선수였죠. 이건 정말 운이 안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요.”

해설자로서도 가끔 이렇게 지표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지금이라도 투수 교체를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이언츠의 벤치는 조용했다. 포수 베그웰이 잠시 마운드에 올라왔을 뿐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교체 없이 그냥 가려는 것 같습니다. 지고 있는 상태에서 지난 경기 등판했던 애덤이나 체이스 선수를 쓰기는 어렵죠. 오늘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외 투수들보다는 존슨 선수가 낫다고 판단하는 것 같네요. 구위가 떨어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니까요. 만약 이번 이닝을 더 이상의 실점 없이 막고 9회 초에 재역전할 수 있다면 그때쯤이나 투수 교체를 고려할 수 있겠지요.”

잘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예.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점 차이일 뿐입니다. 이번 이닝을 잘 마무리하면 9회 초 공격이 남아 있습니다.”

하위 타선부터 시작되는 자이언츠의 9회 초 공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해설자 데이빗은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 누구도 승리의 희망 없는 경기의 중계를 듣기는 어렵다.

***

“좀 갑갑하네.”

“예상하긴 했었잖아.”

소르카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나 보다.

“그렇긴 한데 컨디션이 너무 좋아 보여. 최소 3점은 내야 할 것 같은데… 하아!”

투수를 오래 하다 보면 상대 팀 투수를 가늠하는 눈이 생긴다. 내가 기준으로는 오늘 상대 선발 그레이의 상태가 너무 좋았다. 올 시즌 18승을 한 메츠의 1선발이다. 드디어 메츠에서 아껴두었던 제일 예리한 칼을 뽑아 들었다. 우리 팀의 1회 초 공격이 진행 중이지만 그의 공을 봐서는 경기 초반 쉽게 공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제 이겼어야 좀 편안하게 오늘 경기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상당히 유감스럽다.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경기가 8회 말 홈런 한 방으로 뒤집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추가적인 투수 소모 없이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이제 시리즈 4차전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만약 오늘 이기면 3승1패로 절대적 우위를 계속 가져갈 수 있지만 지면 2승2패가 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만약에 7차전까지 가게 된다면 그레이가 또 나오겠지?”

시리즈는 1, 2차전은 홈 3, 4, 5차전은 어웨이 경기로 진행되고 6, 7차전이 치러지게 된다면 다시 홈으로 간다. 중간에 홈과 어웨이가 바뀔 때 하루의 휴식이 있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3일 후식 후 등판이라서 좀 어렵긴 하겠지만 못할 건 없겠지. 80년대는 3일 휴식 후 등판이 일반적이었잖아.”

5인 선발 로테이션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4인 선발 체제였다고 들었다. 포스트 시즌이라면 하루 정도 무리를 못할 건 없다. 답을 알고 물은 거긴 하지만 내 생각대로 답이 나오질 않길 바랐다.

만약 오늘 지게 된다면 6, 7차전에서는 메츠의 1, 2선발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런 상황은 정말 피하고 싶다. 오늘 이기면 내일 내 등판에서 시리즈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상대의 제일 무서운 무기 두 개를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 이길 거고 만약에 뜻대로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너하고 내가 5, 6차전을 잡으면 이길 수 있어.”

“무슨 걱정을 해. 드로이넨이 준비 많이 한 것 같더라고. 우리 타자들이 몇 점만 내주면 이길 텐데… 내일 내가 이 시리즈를 끝내주지. 넌 월드시리즈 등판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오늘 경기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기가 죽을 순 없다.

아무리 그레이와 드로이넨의 무게감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야구는 알 수 없다. 언더독이 탑독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 종목이 야구다.

삼자범퇴로 우리 팀의 1회 초 공격이 끝났다. 생각한 대로 타자들은 상대 투수의 공을 건드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소위 오늘이 투수들에게 가끔 오는 그날인 것 같다. 속어로 긁히는 날.

오늘따라 외야 관중석 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오렌지색이 너무 눈에 거슬린다. 세븐 라인 아미(The 7 Line Army)라는 메츠 응원단이 오늘따라 더 극성스럽다.

마운드에 선 드로이넨이 천천히 연습구를 던진다.

“So. 아까 불펜에 가지 않았어?”

“갔었지.”

“드로이넨은 오늘 어때?”

그렇게 궁금하면 왜 가서 안 보는지 모르겠다. 소르카는 다른 투수가 등판 전 워밍업과 점검을 겸한 불펜투구를 할 때 한 번도 들러 보지 않았다. 본인은 다른 투수들의 집중을 방해하기 싫어서라고 하는데 도무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유다.

“평소와 같아. 드로이넨이야. 언제나 컨디션 유지는 잘하잖아. 휴식시간을 좀 가져서 그런지 힘이 넘쳐.”

실제로 그랬다. 경기 감각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드로이넨도 경험이 많은 투수다. 내가 걱정해야 할 레벨의 선수가 아니었다.

좌타석에 메츠의 선두타자가 들어섰다. 초구부터 인코스 승부다. 포심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향한다.

"스트라이크!"

92마일의 포심패스트볼. 공이 살짝 몰린 감이 있었는데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내가 드로이넨을 알고 나서부터 초구를 몸쪽으로 붙이는 건 처음 봤다. 당연히 타자도 그런 공은 머릿속에 없었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2구도 다시 몸쪽이다. 살짝 스피드를 줄인 커터가 다시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헐! 왜 이러는 거지?’

드로이넨이 인코스 승부를 피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주로 아웃코스를 공략하고 유인구를 많이 사용하는 피칭을 하는 투수였다. 그런데 지금 초반부터 너무 과감하게 던지고 있다. 타자도 어이가 없는지 잠깐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의 매무새를 다시 고친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브레이킹 볼을 던질 거라는 내 생각은 맞았지만 구종이 틀렸다. 당연히 자신의 대표 구종이나 다름없는 슬라이더로 하나쯤 뺄 거라고 생각했다. 위닝샷을 위한 목적구를 겸한 유인구. 그런데 여기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느린 커브가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패턴의 투구였다.

타자는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나이스. 드로이넨.”

“공 좋아.”

더그아웃의 여기저기에서 선수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뭐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다른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르카가 웃는다.

“투구판 밟는 위치가 바뀌었어. 원래는 가운데에 가깝게 밟고 던졌잖아. 오늘 3루 쪽으로 많이 치우쳤네.”

소르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발의 위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투구판 끝을 밟고 던지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는 입사각이 커진다. 다만, 그렇게 던지려면 스트라이크 존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제구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준비 많이 했나 보네. 단기간에 그런 게 되는 걸 보니까 드로이넨도 감각파인 것 같네.”

“그러게. 그의 제구도 타고난 것인가 봐. 어째 오늘 심상치 않을 것 같아.”

소르카의 말에 동감한다. 드로이넨은 어제 존슨과는 다르다. 휘어지기는 해도 잘 부러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지금 초반부터 전력투구 모드다. 저런 식이라면 초반에는 무쌍을 찍을 것 같다.

틱-

메츠의 2번 타자는 적극적으로 컨택을 노렸지만 빗맞은 공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뒤이은 3번 타자 역시 범타로 처리하고 1회를 1삼진 2범타로 깨끗하게 삼자범퇴시켰다.

투수전이 될 거란 예상은 했었지만, 그건 2점 내외에서 벌어지는 우리 쪽이 좀 불리한 줄다리기 정도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0의 행렬이 지루하게 이어질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참! 이 동네도 어메이징하네.’

메이저리그 선수가 된다는 건 정말 야구를 시작한 선수 중의 0.1%도 안 되는 극소수에게만 허락된다. 그 극소수중에서도 긴 시간 두각을 나타냈다는 건 소위 말하는 재능의 영역이다. 그런 사람이 이 악물고 준비하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게 나온다.

줄다리기는 두 선발 투수가 다 내려간 8회에 나왔다. 오늘은 우리 팀이 홈런으로 웃었다. 우리 불펜이 더 강했다. 1:0의 신승을 거두었다. 챔피언십 시리즈 스코어 3대1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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