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32화 (132/200)

132화. 챔피언쉽 시리즈 (5)

‘정말 미치겠네.’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렵다.

“저거 의도적인 거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필에게 코너워크로 승부해보다 말려들지 않으면 볼넷도 괜찮다 이런 생각이었겠지.”

소르카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서야 할 7번 테일러의 시즌 타율은 2할이 조금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점 차 승부에서 만루를 만드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인 것 같지만, 이 장면에선 충분히 말이 된다. 나 같아도 이랬을 것 같다.

타율이 대충 2할이라면 10번 중 2번은 안타를 쳤다는 거다. 거기에 만루에서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인 외야 플라이나 진루타 등을 생각하면 볼넷은 엄청나게 위험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테일러의 성적은 거품이 있다,

‘이런 걸 통계의 함정이라고 한다던가?’

테일러의 시즌 기록을 전체 투수가 아닌 각 팀의 1, 2선발로 한정해서 계산해보면 그의 타율은 1할에도 못 미친다. 그건 테일러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나올 8, 9번 타자도 마찬가지다. 피삼진 비율은 압도적이다. 리그 평균치의 두 배 이상이 나온다.

역시나 수비 포메이션이 달라졌다. 1루수의 위치를 앞으로 당기고 3루수는 베이스에서 많이 떨어트리지 않았다. 나머지 야수들은 모두 정상 수비 위치. 뭔가 준비한 것 같은 대응이다.

‘번트를 신경 쓰는 건가?’

3루수를 3루 베이스에 붙여서 3루 주자의 리드폭을 최대한 제한했다. 1루 방면의 번트는 전진수비 때문에 힘들다. 결국 번트를 댄다면 3루 방향이어야 한다.

‘상대가 하라고 열어놓은 곳으로는 좀… 별생각을 다 하네. 번트 댈 것도 아니면서…’

번트는 공을 최대한 몸 가까이 붙여 강약을 조절해 원하는 방향으로 굴려야 한다. 변화구는 정확한 타점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는 패스트볼을 노려야 하는데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간결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 기술이다.

원칙적으로는 타자의 출루를 위한 기술이지만 지금과 같이 3루 주자가 있고 아웃 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면 1점과 아웃카운트를 바꾸는 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보통은 3루 주자가 먼저 스타트를 하고 이후 타격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걸 수어사이드 스퀴즈 번트(Suicide squeeze)라고 한다.

‘번트는 무리겠네. 어떻게 희생플라이라도…’

그것도 역시 쉽지 않을 것 같다. 희생플라이가 될 만큼 공을 멀리 보내려면 당연히 스윙이 커야 한다. 그런 식으로 스윙한다면 헛스윙을 할 확률도 그만큼 같이 커지게 된다.

‘이거 설마 타자에게 이런저런 압박을 가해서 삼진을 잡을 생각인 건가?’

생각할수록 가슴만 답답해진다. 메츠는 상하위 타선의 불균형이라는 우리 팀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대타를 쓰기엔 아직 수비가 두 번 더 남았다. 우리 팀의 강점이 안정된 내야 수비인데 그걸 포기하기엔 불안요소가 아주 크다.

“하핫. 어떻게 에이든을 공략해야 하는 걸까?”

“어휴! 몰라. 타자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벤치에서 무슨 생각이 있지 않겠어?”

답답한 마음에 소르카에게 물었더니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알아서 해야 한다? 그래. 그게 답일지도 모르지.’

메이저리그 감독의 계약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비공개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연봉을 받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10년 전쯤 어떤 언론사의 취재로 메이저리그 30개 팀의 감독 연봉이 공개된 일이 있었다.

그때 공개된 메이저리그 감독의 평균 연봉은 150만 달러였다. 그 당시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400만 달러 정도였는데 메이저리그의 평균 매출을 생각하면 감독연봉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100만 달러도 못 받는 감독이 10명이나 되었다.

미국의 다른 프로 스포츠 종목과 비교하면 너무 적은 액수였다. 같은 시기 NFL의 오클랜드 레이더스는 존 그루덴이라는 유명 감독을 영입하면서 10년 1억 달러 계약을 했고 심지어 프로팀도 아닌 텍사스 A&M대학 풋볼팀 짐보 피셔 감독은 10년 7500만 달러를 받았다.

그것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간 매출이 몇 배인데 감독의 급여는 몇 배로 적다. 게다가 시즌은 제일 길다. 적게 받고 노동시간이 길다. 이것에 대한 합리적 해석은 단 하나밖에 없다.

‘야구란 종목에서 감독이 승패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이 작다는 거지. 종목이 가지는 특성이 그런 거지.’

야구란 스포츠는 작전이나 전술에 의한 승리보다는 주로 선수들의 개인 능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 유능한 감독이라고 해도 승패를 직접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즉 이런 상황에서 우리 팀 라드 감독이라고 별 뾰족한 수단이 있을 리 없다.

‘타자가 해내는 수밖에 없어. 희박하지만 쳐낼 가능성이 0은 아니잖아.’

타석에 선 테일러는 무표정했다. 그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선택받았다는 것을…

“배리본즈가 생각나네.”

소르카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번 이닝 공격에서 점수를 내는 건 어렵다고 보고 마음을 비웠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너무하네.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는데 미리 그렇게 생각할 것까진 없잖아.’

“배리본즈는 왜?”

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난 예의 바른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의 생각에 모두는 아니고 일부 동조하는 마음이 들었다.

“배리본즈가 만루에서 고의사구를 얻은 이야기 알아?”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정확한 내용은 기억에 없어.”

모른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기술적으로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1998년 5월 28일에 있었던 일이야. 우리 홈이었는데 여기는 아니고 그때는 캔들스틱 파크라고 다른 구장이었어. 다이아몬드백스가 자이언츠에 9회 말 2아웃까지 2점 차로 앞서 있었지. 스코어는 8:6 만루에 본즈가 타석에 들어섰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거야.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일이…”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떠올리는 건 너무 비약해서 생각한 거 아냐?”

“혹시 그 경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들었어? 그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지 그런 거 말이야.”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억을 하다니 소르카도 상당히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원하는 건 만루 고의사구라는 특별한 사건이지 그런 소소한 부가적인 일에는 관심 없다.

“아니… 전혀 몰라.”

“그때 다이아몬드백스 감독이 벅 쇼월터였는데 그는 후에 명장 소리를 들었지. 왜냐하면 본즈를 고의사구로 보내고 바로 다음 타자를 초구에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 경기를 8:7로 이겼거든.”

“그래? 대단하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뭐가 대단한지 전혀 모르겠다.

“본즈 다음 타자가 브렌트 메인(Brent Mayne)이라는 포수였는데 그는 그 해 0.273을 쳤지. 포수였으니까 당연히 작전 수행 능력이 좋았겠지. 그리고 20년 가까이 빅리그에서 구른 상당히 경험 많은 타자였어.”

“그런데 그런 타자가 왜 초구를 쳐? 일단은 상황을 살폈어야지.”

“열이 받았거든. 열 받아 앞뒤를 잴 만한 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한 방 먹여주고 싶었던 거야. 바로 지금 테일러처럼. 분노는 사람에게 특별한 힘을 주기도 하거든. 메인은 실패했지만 어쩌면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어.”

예언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탁-

“헉! 쳤어. 설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역시 그렇다. 공을 일단 띄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너무 얕았다. 3루 주자의 리터치는 힘들 것 같았다.

“다음 타자를… 어 어…”

타구가 급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생각만큼 뻗질 않고 묘한 곳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희생플라이가 될지도…’

우익수가 잡더라도 후속 동작을 바로 취하기 어렵게 잡는다면 리터치가 가능할 수도 있다.

“아!”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 모양새가 좋지 않더라도 어쨌든 점수가 나면 다 똑같다. 메츠의 우익수가 필사적으로 공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공은 이미 2루수를 많이 오버했다. 중견수나 우익수가 잡아야 하는데 과연…

이윽고 우익수가 몸을 날렸다.

“아!”

“달려. 공 빠졌어.”

“우하하. 됐어. 됐다고.”

마지막 순간 공이 잡히는 줄 알았다. 타구가 까다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못 잡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하듯 몸을 날린 우익수의 글러브는 마지막 순간 공을 잡아채지 못했다. 더 황당한 일은 그 슬라이딩 때문에 공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우익수가 한참 앞으로 공을 지나쳐 버렸다.

외야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중견수가 공 잡는 걸 우익수에게 맡기고 커버플레이를 하긴 했지만, 한동안 공이 외야에 구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3루 주자 베그웰이 여유 있게 홈을 밟았고 2루 주자 레블론도 날듯이 달려 홈플레이트를 통과했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하며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아마 리터치를 준비하느라 마지막 순간 베이스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1루 주자도 들어왔을 것이다.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테일러를 연호하고 있다. 더그아웃도 선수들 함성이 끊이질 않는다.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네.’

이렇게 될 거였다면 우익수가 굳이 노바운드로 잡아야겠다고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안전하게 원바운드로 잡았어도 짧은 타구여서 홈에서 승부가 되었을 거다.

3루 주자에게 노바운드로 잡으려 한다는 인상만 주면 이런 상황에서 3루 주자가 리드를 가져가긴 어렵다. 모험적인 플레이가 이런 게임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큰 승부에 명국 없다고 하는가 보다.

‘마지막 순간 슬라이딩 대신 원바운드로 안전하게 잡고 홈 송구를 했으면… 너무 결과만 가지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튼 두 점을 냈고 역전을 했다. 이거면 충분하다. 원래 운 같은 걸 거의 믿지 않았는데 요즘 같으면 월드시리즈 우승 후에 종교라도 가져야 할 것 같다.

‘선녀보살 아줌마를 다시 찾아서… 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들어온 주자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할 때다.

“스트라익.”

7회말 더 이상의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팀의 공격은 8번 타자 크로포드의 병살타로 바로 거기서 끝났다.

더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지. 사람이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알아야지. 분수를 알고 과한 욕심을 내지 않으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만족하며 산다.‘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기분이 좋으니까 고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래서 2점에 만족하고 우리 팀이 시즌 내내 가장 잘 해오던 일을 하고 있다. 8회는 캐빈이 꽁꽁 틀어막았고 9회 체이스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만을 남겨두고 있다.

역시 잘하던 일을 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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