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챔피언쉽 시리즈 (3)
틱-
2루수 앞으로 느리게 구르는 땅볼이 나왔다. 2루수의 대시. 가볍게 공을 건져 올려 1루로 무사히 배달했다. 상당히 까다롭게 느껴지는 타구였지만, 2루수의 수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아웃.”
긴박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1루로 달리는 타자 주자나 수비했던 2루수 모두에게 별다른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9회 15대 3인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7회 초에 1실점했더니 7회 말 공격에서 우리 팀 타자들이 3점을 더 내어 버렸다. 그 뒤로는 서로 빨리 게임을 끝내자는 암묵적 합의라도 맺은 것처럼 경기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틱-
집중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풀스윙은 보기에만 그럴듯하지 전혀 위력적이지 않았다.
비켜 맞아 잔뜩 회전을 먹은 타구가 내 앞으로 튀어 올랐다. 바운드가 커서 체공 시간은 조금 있었지만, 여유를 가지고 최대한 신중하게 잡아 빠르게 1루로 송구해 간발의 차이로 타자 주자를 잡아냈다.
타자가 1루를 향해 대충 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력 질주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자랐다. 나 역시 그렇게 느슨하게 타구를 처리해선 안 되었지만 12점이라는 점수 차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7회 초에 생각보다 투구 수가 조금 늘어났지만, 나머지 이닝에서 메츠 타자들의 협조 덕분에 많은 투구 수가 필요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102개로 경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싱겁다면 좀 싱거운 승리였다.
‘배부른 생각하고 있네. 어떻게 이겼든지 1승은 1승이야.’
작년의 포스트시즌 패배에 대한 상상 속의 복수는 달콤할 것만 같았지만, 실제는 너무 밋밋한 맛이다.
‘아직 시리즈를 이긴 건 아니잖아. 마음 풀기엔 이르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
“스트라익. 배터 아웃.”
7회 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루킹삼진으로 잡고 소르카가 마운드에서 한 손을 들어 불끈 쥐었다.
“나이스. 소르카.”
더그아웃이 왁자지껄하다. 플레이오프에서 메츠와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선수들에게서 너무 선명하게 배여 나온다.
2차전에서도 평소와 같은 소르카의 호투가 이어졌다. 정말 믿을 수 있는 계산이 나오는 훌륭한 투수다.
패스트볼을 베이스로 체인지업과 커터로 타자의 타이밍을 흩트렸다. 결정구인 슬라이더는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궤적으로 존의 구석을 파고들었다. 7회까지 3안타 1실점으로 메츠의 타선을 무력화시킨 훌륭한 투구였다. 다만, 문제는 상대 투수도 심하게 미쳐 날뛰었다는 것이다.
첫 경기에서 등판하지 않았던 메츠의 2선발 에이든이 오늘 인생 투구를 보여주고 있었다. 6회까지 2안타 10K 무볼넷 무실점으로 우리 타선을 꽁꽁 묶었다.
“수고했어. 소르카.”
“하아! 이것 참!”
이미 7회까지 던지기도 말이 되어 있었지만 지고 있는 상태에서 물러나려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다. 이제 90구 조금 넘게 던졌을 뿐인데 이렇게 내리다니 정말 감독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 이닝 정도는 더 맡겨도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그걸 지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충분히 좋은 투구였어. 소르카. 이제 우리 타자들이 해결할 거야.”
우리 팀의 7회 말 공격은 3번 베그웰부터 시작된다. 상대 투수인 에이든은 이제 70구 남짓 던졌을 뿐이다. 벌써 바뀔 리가 없다. 우리 타순도 두 번 돌았고 중심타선이 이전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1점 차이 정도는 충분히…’
소르카는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는 듯하다 끝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락커에서 편안하게 아이싱을 하라고. 다시 더그아웃으로 나오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거야.’
상위타선과 하위타선의 불균형이 큰 우리 팀의 입장에서 8, 9회에 큰 기대를 갖기는 어렵다. 이번 회에 점수를 못 낸다면 상황은 점점 어려워진다.
3번 타자 베그웰이 타석에 들어섰다.
첫 타석에서는 외야플라이로 아웃. 이전 타석에서는 3루 강습 타구였었다. 오늘 게임에선 아직 안타를 쳐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공을 배트 중심 가까이 맞혀내고는 있었다.
딱-
“그렇지.”
초구를 노리고 있었는지 서슴없이 아웃코스의 패스트볼을 결대로 밀어 쳤다. 당타는 아니었지만, 그다운 우전 안타가 나왔다. 95마일에 이르는 아웃코스 존에 걸칠 듯 말 듯 아주 잘 제구된 공이었는데 역시 리그 수위타자답게 무리하지 않고 가볍게 쳐내 출루에 성공했다.
투수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안타다. 자신 있게 던진 공이 맞아 나가면 의기소침해지는 건 사람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심리다. 물론 일급 투수는 그것을 극복해낸 선수들만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우리 팀의 4번 타자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레블론은 상당히 안정적인 타자다. 우리 팀에서 가장 게스 히팅에 특화된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게스 히터에 대한 정의는 구질에 대한 예측을 바탕으로 타격하는 습성을 가진 선수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의라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변화구 노린다든지 패스트볼을 노린다. 이 정도의 예측 어느 선수나 기본적으로 한다. 보통의 정의대로 생각한다면 게스 히터가 아닌 타자는 없다.
그렇다면 게스 히터라고 불리는 선수들의 특징은 좀 더 세밀한 예측을 한다는 것이 되는데 그건 양날의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간단하게 포심패스트볼을 게스 히팅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타이밍을 미리 예측하고 히팅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가 타격을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타구에 좀 더 큰 힘을 실어 장타의 가능성을 높인다. 문제는 예측이 틀렸을 경우 어처구니없는 공에도 스윙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어떤 전문가는 타자를 세 부류로 나눴다. 최고 수준 타자는 패스트볼 타이밍에서도 변화구를 때릴 수 있고 그다음 수준 타자는 자기가 치는 코스를 정해놓고 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에 대부분이 타자가 속하는데 데이터와 상황을 보고 다음 공을 기다리는 타자라고 했다.
어쨌든 레블론은 그런 유형의 타자인데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의 어떤 투수에게도 크게 밀리거나 하지 않는다. 폭발력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의 기본 타율을 만들어 낼 만큼의 안타를 쳐낸다.
‘그 수준에 못 미치는 투수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지. 그런 투수에게는 노리는 공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최소한 커트는 해내고 노리는 공은 장타를 만들고…’
상대 투수 에이든은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팀의 원투펀치 중의 하나이니 리그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투수다.
‘두 번은 예측에 실패했는데 이번엔 어떨까?’
타악-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레블론이 노려 친 공은 공교롭게도 앞 타자였던 베그웰의 안타와 거의 비슷한 곳으로 날아갔다.
‘두 타자에게 연속으로 같은 코스와 구질을 맞아? 오호! 이건 뭔가 수상한데… 우리 팀의 누군가가 투구 패턴을 분석한 건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일단 무사에 주자가 둘 나갔다. 오늘 게임 들어 처음 맞이하는 찬스다. 더군다나 다음 타자인 카스트로는 상대 투수에게 오늘 이미 안타를 하나 쳐냈었다.
투수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궁금해지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카스트로는 레블론의 타격 방법과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타자였다. 공보고 공치기를 하는 최고의 배드볼 히터.
우리 팀의 3, 4, 5번은 확연히 다른 독특한 타격 특징을 가졌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투수라도 어디 한 곳에서는 걸리게 된다. 에이든은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나갈지 아주 흥미진진하다.
‘두 번은 어떻게 잘 넘기더니…’
여기서 메츠가 선택한 건 타임을 불러 경기 흐름을 끊는 것이었다. 감독이 직접 마운드를 방문했다.
‘에구, 소르카는 빨리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무슨 얼음을 만들고 있나?’
오늘은 더그아웃에서 주로 나와 말동무를 해주던 선수들이 없다. 3, 4차전 선발인 로저스와 드로이넨은 컨디션 조절을 이유로 아예 오늘 경기장에 오지도 않았고 존슨은 경기 초반부터 불펜에서 대기했다.
다시 경기가 속행되었다. 메츠는 통상적인 중간 수비다. 선행주자가 포수인 베그웰이라 특별한 작전을 걸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 야구 같았으면, 이런 장면에서 보내기 번트가 당연시되겠지만, 여긴 메이저리그다. 3할을 치는 5번 타자에게 그런 걸 시킬 리가 없다.
베그웰의 리드 폭도 그리 크지 않았다. 온전히 타자에게 해결을 맡기겠다는 신호다.
"스트라익."
‘오호! 배짱 죽이네. 연속해서 맞은 코스에 같은 구질을 또 던져?’
나 같으면 절대로 안 할 짓이다.
아웃코스 낮은 존에 걸친 패스트볼이 주심으로부터 스트라이크 콜을 이끌어냈다.
이어서 패스트볼과 커브. 다 존에서 많이 빠졌고 특히 커브는 거의 원바운드가 될 것 같은 낮은 볼이었다. 카스트로의 특징은 메츠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정쩡한 볼이 없다.
‘이게 과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네.’
무사에 주자가 둘이나 있는데 원바운드성의 브레이킹 볼을 던지는 건 보통 투수에게는 금기사항이다. 그건 투수가 자신의 제구능력과 포수가 결코 빠트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볼 배합이다.
이제 볼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에이든도 긴장해 숨이 크게 쉬어지는 것 같았다. 어깨의 오르내림이 크다.
“숨이 거치네.”
‘아이고! 깜작이야.’
어느 사이 소르카가 귀신처럼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스스로 숨을 조절하는 걸 수도 있잖아. 백전노장이라고 할 만한 선수니까. 물론 나이는 그렇게 안 되었지만.”
“내가 예전에 알던 에이든이 그렇지는 않았는데 요즘이야 모르지.”
“그와 아는 사이였어? 아무 말도…”
따악-
메츠의 1루수가 순간 날아올랐다.
“아악! 그게 잡혀?”
정말 맛이 가려고 한다. 바로 우리 더그아웃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너무 똑똑히 보였다.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 맞은 타구였는데 메츠의 1루수를 뚫어내지 못했다.
‘하아! 정말 안 풀리네.’
"아아악! FXXX…"
카스트로의 비명과 같은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낯 뜨거운 표현이고 예의나 스포츠맨쉽과는 구만리 떨어진 말이었지만 이해가 될 만한 장면이긴 했다.
“어디서 고함을 질러. 아웃이야. 빨리 꺼져!”
‘헐!’
마운드의 메츠 투수 에이든이 오히려 카스트로를 향해 고함을 질러댄다.
“야!”
1루 쪽으로 몸이 향해 있던 카스트로가 마운드를 향해 가려는 듯 몸을 돌리자 가까이 있던 메츠의 포수가 몸으로 그의 진로를 막았다.
“이건 아니지. 야! 그 손 안 놔?”
이미 우리 더그아웃 앞에 울타리처럼 있던 난간을 넘어 그라운드로 달려가는 선수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서둘러 뒤를 따르려는데 소르카가 내 팔을 붙잡는다.
“야! So. 넌 안 돼. 리우드 코치. So. 좀 잡아요.”
그의 손을 뿌리쳐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내 신체 조건이 너무 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