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29화 (129/200)

129화. 챔피언쉽 시리즈 (2)

틱-

유격수 패터슨은 3루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1루도 송구했다. 3루 주자는 홈인했지만 두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3루타를 맞았는데 1실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볼 하나로 아웃카운트를 하나 늘리고 주자를 없앴으면 상당히 남는 장사다.

‘음. 이제 7회 12대 3이 된 건가?’

홈런 1개를 포함해서 총 4안타를 맞았지만, 투구 수 조절에는 성공했다. 현재 총 75구를 던졌다. 이 페이스라면 100구 언저리에서 완투가 가능할 것 같다.

생각대로였다. 우리 팀의 초반 대량 득점은 간 보려던 메츠에게 일찍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메츠는 오늘 경기를 포기했는지 지금까지 전혀 주력 투수들을 기용하지 않고 있다.

‘컵스 때와는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2회부터 싱커를 이용한 맞춰 잡는 원래 패턴으로 던졌지만, 딱히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별해서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낮은 쪽으로 싱커를 아예 던지지 않아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1점 차이든 10점 차이든 이기면 된다.

지난 경기들을 직접 겪으면서 포스트 시즌을 치르는 요령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다.

‘이 게임에서 열 점을 주더라도 내가 마무리하는 게 최상이야.’

단순히 오늘 한 경기 승리한다고 전체 시리즈의 승패가 결정 나지는 않는다. 시리즈 전체를 이기려면 4승이 필요하다. 시리즈의 시작을 맡은 에이스라면 기본 승리 외에 플러스 알파를 생각해야 한다.

불펜 소모를 최소화해서 이길 수 있는 네 경기에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상대를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들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다.

‘하나는 대충 된 것 같고, 이제 두 번째를 달성하면서 경기를 끝낼 수 있다면…’

찜찜한 기분 때문에 싱커를 유인구로 쓰지 않았는데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임팩트 있게 마무리를… 응?’

대타가 나왔다.

‘이게 뭐야?’

하위 타순이라서 대타를 낸 것일 수도 있지만, 메츠의 7번 타자는 유격수였다. 웬만해선 바꿀 수 없는 선수다.

‘이건 완전히 내일 경기 준비 모드네.’

아무리 기운 경기라고는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이러면 비난의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데 메츠 감독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나 보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럴 때 가능성 있는 타자를 시험해 보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백넘버 67번?’

60번대 선수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경기 전 메츠의 주요선수에 대한 자료를 받아 검토했었다. 거기에 60번대 번호는 없었던 것 같다.

‘유틸리티로 로스터에 넣은 선수인 것 같은데…’

보통 포스트 시즌은 야수 13명, 투수 12명으로 로스터를 구성한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부상이나 기타의 이유로 게임을 뛸 수 없는 선수가 생기게 마련이고 포수 포지션을 제외하면 교체할 수 있는 선수가 한정된다.

그래서 내, 외야를 오가며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필수적으로 필요이다. 이런 유형의 선수를 유틸리티 플레이어라고 한다. 그리고 대개 이런 유형의 선수는 타격이 약하다.

‘그런 선수가 타격이 좋으면 한 포지션에 집중하지 유틸리티를 하겠어?’

“볼.”

하이 패스트볼을 그대로 지켜본다. 패스트볼에는 못 참을 줄 알았는데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뭘 잘못 생각했나?’

패스트볼에 약점을 보이는 메이저리그 타자는 없다. 평균 정도의 패스트볼을 못 쳐내면 콜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패스트볼만으로 평가하면 마이너리그의 투수나 빅리그의 투수나 별 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위쪽 리그로 올라갈수록 투수들의 콤비네이션이 좋아지지.’

패스트볼의 위력을 배가시켜줄 세컨 피치, 써드 피치가 월등해진다.

상대 타자가 잘 칠만한 구종을 던진다는 건 바보짓이지만 약점은 강점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존에서 빠지는 하이 패스트볼로 유인을 했는데 너무 복잡하게 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클래식하게 가자고…’

빠른 볼과 커브는 언제나 가장 잘 통한다. 내가 일반적인 커브 그립을 잡고 던지면 공이 치솟는 느낌을 주는 공이 나오지만, 나의 느린 싱커는 일반 투수의 커브와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다.

틱-

“파울.”

‘어? 이게 뭐지?’

느린 공이니까 맞혀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파울이 된 공은 주심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아무리 내가 오늘 낮게 떨어트리지 않아 대비하고 있었다 해도 내공은 릴리스 포인트가 리그의 일반적인 투수들에 비해 아주 많이 낮다. 나와 처음 상대하는 타자에게는 아주 생소한 궤적을 가진다.

‘그런데도 공의 윗부분이 아니라 아래를 맞혔어? 정말 이 친구 기록을 좀 보고 싶네.’

이건 어느 정도 공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첫 타석에서 내공을 퍼 올렸던 선수는 아직 없었다. 열이면 열 모든 타자의 스윙은 떨어지는 공의 위쪽에서 이루어졌다. 경기 전 미리 건네받았던 메츠 타자들의 분석 자료를 좀 세심하게 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살짝 후회가 된다.

‘뭐! 베그웰이 잘 기억하겠지. 싱커 더 낮게 떨어트리라고?’

틱-

“그렇지.”

땅볼을 만들었다.

‘어?’

땅볼은 땅볼인데 타구 속도가 상당하다. 2루수인 크로포드가 몸을 날려봤지만, 타구에 미치지 못했다. 타구 속도를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떨어지는 공의 중심 가까이를 맞춰냈다

‘코스가 좋았을 뿐이야. 투수가 인플레이 된 타구에 관여할 수는 없잖아.’

땅볼이라고 모두 범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안타는 묘하게 찜찜하게 느껴지는 안타였다.

‘67번. 너 기억했다.’

1루 주자를 슬쩍 돌아보며 되뇌었다. 이 이닝 끝나면 바로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야구에서 기본적으로 지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숫자들 속에서 내게 적용할만한 의미 있는 내용을 해석해내는 건 내 몫이다.

다시 대타가 나왔다. 메츠가 이번엔 포수를 빼버렸다.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투쟁심이 생겨야 할 텐데 이렇게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팀에게 그건 무리다.

‘나 참! 포스트 시즌에 이런 경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스트라익.”

“악!”

베그웰의 송구가 머리 바로 위쪽으로 확 지나갔다.

‘에고, 놀래라. 맞을 뻔했네.’

나보다 베그웰이 더 놀란 것 같았다. 2루를 바라봐야 할 시선이 바닥에 엎어진 내게 향해있다.

내 실수였다. 도루 대비를 했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더 안 좋았던 건 포수의 2루 송구 시에 몸을 낮춰야 하는데 그 타이밍이 늦었다. 배그웰은 훈련했던 대로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베그웰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주면서 2루 쪽을 살폈다. 송구를 받으려 2루 베이스에 붙은 유격수 패터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공에 맞지 맞았으니 별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주자는 어디 간 거야?’

“우아아!”

답은 관중석에서 나왔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에고, 공이 빠졌나 보네.’

도저히 3루를 쳐다볼 마음이 안 생긴다. 너무 바보짓을 해버렸다. 아마도 베그웰이 반사적으로 2루로 공을 던지려다 중간에 방해물이 끼어들자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비틀었을 것 같다. 당연히 그 결과로 공은 외야로 빠져나갔을 테고.

‘뭐 하는 거야? 이리로 오면 어떻게 해. 나 괜찮다고.’

베그웰이 타임을 부르는 어떤 모습도 보지 못했다. 인플레이 중에 이건 곤란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후다닥 일어났다.

‘헉! 아웃이었어?’

3루에도 주자가 없다. 조금 전 들었던 관중의 반응은 3루까지 달린 주자를 잡아낸 파인플레이에 대한 환호였던 모양이다. 이제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 지금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고 공수교대를 해야 하는 장면이다.

“괜찮아?”

“그럼, 멀쩡하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

태연한 척 말을 받았지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멍청한 짓을 이렇게 연달아 터트리다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아직 게임이 끝난 것도 아닌데 너무 마음이 풀어져 버렸다.

게임이 너무 순조롭게 흘러가도 이렇게 된다.

“So.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더그아웃에 들어가기 무섭게 감독과 투수 코치가 부리나케 다가왔다.

“아뇨. 전혀 이상 없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채 한동안 못 일어났잖아. 근육이 놀랐으면 지금 당장 괜찮아도 그 여파가 나중에 나타날 수도 있어.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6회가 끝났을 때 오늘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오늘 게임을 완투하는 것으로 감독과 의논을 마쳤는데 말을 바꾸려고 한다.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못 일어난 게 아니라 안 일어난 거라고요.”

그건 안 될 일이다. 오늘은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한다.

“게임 중에… 왜?”

감독이 고집부리지 말라는 듯 어조가 강경하다.

“그게… 으음. 좀 부끄러워서…”

“뭐? 풋.”

내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감독이 실소를 흘렸다.

“푸하하.”

“크크큿.”

주변에 모여 있던 선수들에게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로 이상할 것 없는 대답인 것 같은데 왜 웃는지 모르겠다.

‘이거 우스워? 웃음 포인트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별 우습지도 않은 일 가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미 리우드 투수 코치는 말도 없이 손끝으로 신중하게 몸의 이곳저곳을 누르고 있다.

“여기 괜찮아? 결리거나 그런 느낌은 없어?”

“아파요. 아프다고요. 그렇게 우악스럽게 누르는데 안 아플 리가 있겠어요?”

현역에서 은퇴한 지가 꽤 되었을 텐데 손가락에 힘주는 걸 보면 아직도 패스트볼 던지면 구속이 꽤 나올 것 같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리 안 했으면 좋겠는데 점수 타이도 있고 자네가 많이 던져주려고 하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투수 코치도 괜찮다는데 감독이 너무 예민하게 군다.

“아뇨. 오늘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이유를 덧붙이지 않고 그냥 우직하게 내 말을 밀고 나갔다. 만약 진짜로 감독에게 교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내 의견을 묻는 형식을 취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건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던지라는 의사를 돌려서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 알았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직 게임이 많이 남았어.”

“감사합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출장하면서 챙겨온 전력분석 노트를 펴 들었다.

‘여기 있네. 음. 67번. 다니엘 스토코프스키. 빅리그 2년 차?’

기록상으로는 평범한 유틸리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시즌 동안 쳐낸 안타의 대부분은 패스트볼에서 나왔고 특별히 브레이킹볼에 강점이 있다든가 하는 유형도 아니다.

‘5차전에 나오려나? 아니, 이게 아니지.’

5차전을 생각하다니 안 될 일이다. 이번 시리즈는 네 번째에 끝나야 한다.

‘올 시즌에 다시 볼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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