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챔피언쉽 시리즈 (1)
“파울.”
초구로 던진 인코스 낮은 패스트볼은 파울이 됐고, 높게 던진 2구 역시 파울이다. 타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도 머리란 게 있는데 그냥 나왔을 리가 없잖아.’
디비전 시리즈가 끝난 뒤 베그웰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궁리했다.
아직까지 싱커를 던질 때 어떻게 컵스 타자들이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별할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구단에서 열심히 찾아보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 특별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왜 티가 나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그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 팀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메츠 역시 알 수 있다는 가정을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컵스에서 일단 싱커로 타격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던 건 내가 던지는 전체 구종 중에서 싱커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싱커를 던지는 비율을 20%까지 낮추기로 했다. 타자가 열 개에 한두 개 들어오는 공을 계속 기다릴 수는 없다.
50%가 넘었던 싱커 비율을 대체하는 구종은 선택의 여지 없이 패스트볼이 되었다. 슬라이더와 패스트볼 조합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고 체인지업처럼 싱커를 사용하기로 했다.
‘업슛의 비율도 끌어올리고… 아무나 이걸 할 수는 없지.’
대부분의 투수에게는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나 정도의 제구가 되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웃코스에 극단적으로 집중되던 코스 공략 비율도 고르게 분산시켰다.
그 결과 메츠의 1번과 2번 타자를 수월하게 처리하고 3번 타자까지 투 스트라이크로 몰아세웠다.
경기 시작 후부터 나쁘지 않게 타자를 상대하고 있지만, 손가락 장난으로 타자를 농락할 때가 참 편했다는 걸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느끼는 중이다.
‘슬라이더 좋지.’
인코스로 공 두 개를 집중시켰으니 당연히 반대로 간다. 베그웰의 사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
‘어! 돌았나? 돌아간 거 같은데…’
타자의 배트가 나오다 멈추긴 했다. 주심의 눈이 1루로 향했다. 1루심이 주먹을 쥐어 보인다.
“스윙. 배터 아웃.”
삼자범퇴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렇게 던지면 오래 던지기는 어렵다. 불펜으로 던질 때와 비슷한 스타일이 되었는데 이건 패스트볼이 그래도 90마일은 꾸준히 찍혀줘야 통하는 방법이다. 패스트볼 비율을 절반 정도까지 올려 전력투구의 비율이 평소보다 한참 많아졌다.
‘7회까지 정도만 완벽하게 막을 수 있으면 돼.’
존슨이 계투진에 합류하면서 애덤과 페이스 위주로 운용되던 불펜은 아주 두터워졌다. 굳이 나의 완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메츠는 지금 던질 수 있는 최고 카드인 2선발을 이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첫 경기의 중요도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의외의 결정이었다. 오프너를 썼는데 다음 투수가 누구일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아마 초반의 경기 진행 상황을 보고 결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분이야 나쁘지 않지. 그만큼 날 인정한다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오프너라고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운 게 가끔 느닷없이 포스트 시즌에 특화된 선수가 출현한다.
‘리반 에르난데스 같은 선수일지도 모르는 거지.’
그는 쿠바를 탈출한 이력 이외에는 리그의 평범한 스물두 살 2년 차 투수였다. 1997년 애틀란타와 2승2패로 맞선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 깜짝 선발로 나섰다. 상대 투수는 그 이름도 찬란한 그렉 매덕스였다.
‘아마 큰 기대는 없었을 거야. 선발 발탁 이유가 당시 말린스의 1선발이었던 케빈 브라운의 컨디션 난조 때문이었다고 하니까.’
매덕스는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에르난데스는 143구를 던지며 9이닝 1실점 15K 완투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 뒤에도 월드시리즈 1차전과 5차전 선발로 빅게임 피처로 이름 높았던 허샤이저를 연파하며 말린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고 챔피언십 시리즈와 월드시리즈 MVP를 연달아 수상했다.
이닝이터라는 장점을 가지고 긴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는 커리어 내내 정규시즌에는 특급투수라고 불리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성적을 낸 투수였다.
시기와 장소가 잘 맞으면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게 포스트시즌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이런저런 일을 직접 당하다 보니 걱정만 늘어났다.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 다들 긴장했는지 행동이 아주 조심스럽다.
따악-
‘너무 걱정이 과했나?’
메츠 투수가 알바레스라는 중남미계 선수들에 많은 이름이어서 에르난데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1번 크리스가 깨끗한 중전 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타구 방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전광판에 찍힌 구속이 눈에 들어왔는데 94마일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좀 애매한 구속이다. 구속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평속이 100마일 근처에서 놀아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파워피처라 부르는 게 요즘 리그 추세다.
‘무엇인가 특별한 게 있으니까 냈을 텐데… 메츠 감독은 뭘 보고 낸 거지?’
공을 몇 개 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런 투수 같이 느껴진다. 알바레스란 저 선수는 정규 시즌에도 주전의 부상 등으로 선발진에 결원이 생겼을 때만, 대체선수로 몇 번 선발 출전했을 뿐 포스트 시즌에서는 첫 선발 등판이다.
타약-
2번 타자 알버트의 타구가 다시 우중간을 갈랐다. 최소 2루타다.
“우와와…”
관중의 함성이 점점 더 소리를 키워나갔다. 1루 주자였던 크리스가 날듯이 달린다.
‘어? 왜 세웠지? 타이밍이 애매하다고 봤나?’
홈까지 마냥 내달릴 것 같았던 크리스가 3루에서 멈췄다. 이건 주루코치의 판단인 것 같았다.
‘최대한 조심하는 게 맞긴 맞는데… 음.’
보통은 득점 가능한 타이밍이지만 보살을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홈까지 돌진시켰다가 보살이라도 당하면 좋았던 흐름이 넘어갈 수도 있다.
‘잘 세웠어 무사 1, 3루에 3, 4, 5번에 걸리는데… 이거 잘하면…’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오버랩(Overlap, 겹치다)된다.
‘좀 다른가?’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상대 팀의 실수가 빌미가 되어 대량득점을 올렸지만, 지금 그런 상황은 아니다.
타악-
“그래. 이… 에고.”
“피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을 만큼 잘 맞은 타구였다. 베그웰이 감각적으로 잘 밀어 쳤다. 1루수를 빠르게 넘어간 타구는 라인도 살짝 넘어버렸다.
‘하아! 그것참…’
1회부터 상대선발은 주저앉힐 수도 있었던 일격이었는데 아쉽다.
‘그런데 이제 뭘 던져야 하지?’
지금처럼 연속 안타를 맞으면 사실 공 던질 곳을 찾기가 어렵다. 어디로 던지든 또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장면에서 그런 기분을 버텨내야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설프게 유인하겠다고 공을 한두 개 빼다 보면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고 그런 틈을 타자는 파고든다. 볼넷을 줘 주자가 쌓이면 대량실점을 하게 되고 이런 장면을 잘못 겪으면 그게 트라우마가 된다.
‘스티브블래스 증후군 같은 게 그래서 생기지.’
밀리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나름 코너워크를 구사해 아웃코스에 잘 던졌는데 타자가 그런 공마저 이렇게 쳐내면 투수는 던질 곳이 없다.
“볼.”
알바레스란 메츠 투수의 공이 형편없이 빠지고 있다. 저건 목적구도 아니고 유인구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실투일 뿐이다.
‘어이구, 뭘 쫄고 있어. 맞으면 맞는 거지. 리그 수위타자 앞에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게 잘못한 거야.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제일 자신 있는 공을 꽂아야 해.’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베그웰 뒤로 레블론과 카스트로, 필 강타자들이 계속 대기 중이다.
‘허휴! 내가 별걱정을 다 하네. 아무튼 메츠 감독이 이상한 짓을 벌였어. 신참을 이런 중요한 경기 선발로 내면 어떻게 하냐구. 어린 녀석 하나 그냥 망치려는 거야?’
나도 나이를 먹고 있나 보다. 별 오지랖이 다 생겼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너무 안타깝다. 지난날의 내 모습도 생각나고 어린 투수가 이런 식으로 꺾이는 건 마음이 불편해서 못 보겠다.
타악-
연달아 공이 두 개 더 빠지고 나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억지로 던진 가운데로 쏠린 패스트볼은 여지없이 좌전안타로 연결되었다.
1실점 하고 계속 무사 1, 2루의 위기 상황이 계속된다.
‘그래도 이게 나아. 여기서 볼넷 주면서 어이없이 망가지면 멘탈 약한 놈으로 찍혀서 다시 기회를 받기 어려워. 당할 때 당하더라도 정면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메츠의 감독은 아직 조용하다. 포수가 마운드에 잠깐 올라왔을 뿐 벤치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타악-
‘어이쿠, 계속… 음. 이건 잘하면 잡히겠는데… 이것 보라고. 잘 맞는다고 다 안타가 되는 건 아니라니까.’
중견수가 거의 펜스에 붙어 잡을 만큼 큰 타구였지만 아무리 멀리 가도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노바운드로 잡히면 아웃이다.
2루 주자의 리터치가 이루어져 1사 1, 3루가 되었다. 투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돌아왔다.
‘아웃카운트 하나 잡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레블론보다 카스트로가 훨씬 까다로운 타자라고.’
내 경험에 의하면 카스트로에게 어설픈 코너워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타악-
정말 괴랄한 배드볼 히터다. 분명히 스트라이크 존에서 아래로 두 개 이상 빠지는 체인지업이었다. 보통 타자라면 대개는 골라낸다. 스윙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이 정도로 빠지면 티가 나니까. 하지만 카스트로에게 이런 볼은 그냥 밋밋하고 느린 볼이다.
슬쩍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해괴망측한 각도로 공을 퍼 올렸다. 정말 그 자세로 공을 맞힌 것도 신기하고 그런 식으로 맞은 공에 힘이 실리는 건 황당할 지경이다.
그 공은 훨훨 날아가 좌측 담장을 넉넉하게 넘어가 버렸다. 정말 볼 때마다 치가 떨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알바레스는 카스트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표정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경악이었다. 왕년에 좀 당해봐서 그가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펀치를 맞으면 대미지가 두 배다. 4대 0이다. 오늘 게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승리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이 정도 되었으면 투수를 바꿔줘야 할 것 같은데 메츠의 벤치는 아직도 조용하다.
‘이거 뭐야? 오늘 경기를 애초에 포기하기로 했던 건가?’
주력 투수끼리의 맞대결을 피했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이젠 거의 확실해진 것 같다.
‘이거 생각을 바꿔야 하나? 어쩌면 점수가 많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완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까짓거 서너 점 줘도 괜찮다면…’
타악-
‘헐! 필까지 터지네.’
백투백 홈런이다. 상대 투수인 알바레스의 눈에 힘이 풀렸다.
‘이거 서너 점이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