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27화 (127/200)

127화. 기다림의 권리

따악-

“크다.”

“갔네. 갔어.”

“미친… 이걸 지냐?”

“아직은 아니잖아. 10회 말 말린스 공격이…”

“쟤들이 저 얼굴을 하고 이걸 어떻게 뒤집어?”

TV 화면에서 말린스 선수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10회 초 메츠의 솔로 홈런이 터졌다. 오늘 경기 처음으로 메츠가 말린스를 앞서는 순간이다.

게임 시작부터 일방적으로 앞서가서 챔피언쉽 시리즈의 상대로 말린스가 되는 것 같았지만 정말 야구 알 수 없다. 차츰차츰 점수 차를 좁힌 메츠가 저력을 보여주며 9회 동점에 이은 역전드라마를 써나가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되네.”

“젊은 팀의 한계지. 금방 타오르고 금방 식고…”

말린스는 10회 말 공격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이런 대역전극은 가끔 있어 왔지만, 말린스 선수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다 아프다.

팟-

TV를 껐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남의 집에 난 불구경 중이었지만 선수 개인들에게는 악감정이 없었다.

“이거 안 좋은데…”

“꼭 그렇지는 않지.”

우리가 3연승으로 컵스를 가볍게 연파하고 챔피언십에 선착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지만, 내용을 더듬어보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승리들이었다.

“쟤들이 치고받으면 좋은 거지. 뭘 그래?”

“메츠보다는 컵스가 낫지 않아? 괜히 승부가 뒤집히면, 기세를 탄 메츠는 까다로울 수가 있다고. 원래 1등도 하던 놈이 하는 거야.”

“그렇긴 뭐가 그래.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쉬운 팀이 어디 있어. 그놈이 그놈인데 전력 손실이 많은 팀이 아무래도 낫지.”

말린스가 2연승으로 무난히 승리를 가져가나 싶더니 세 번째 패배 후 오늘 경기까지 져버렸다. 특히 오늘 경기는 말린스로서는 뼈아프게 느껴질 만한 패배였다. 처음부터 리드를 잡아 경기 내내 한 번도 역전을 허용치 않다가 9회 마지막 순간을 넘기지 못했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 생각이 난 거지. 그래서 가급적이면 투수를 더 쓰지 않고 이기려고 하다가 저 꼴이 난 거야. 차라리 잘됐어.”

베그웰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없는 것 같다. 그에게는 언제나 바람은 바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냉정하게 현실을 수용한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인간미가 없잖아.’

우리 팀은 디비전 시리즈 승리 후 컨디션 회복을 위해 전념하고 있다. 이건 쉰다는 말이다.

훈련은 감각을 잃지 않는 선에서 오전에만 가볍게 하고 상당히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한가한 오후 불난 집에서 벌어지는 싸움 구경을 위해 예전 멤버들이 다시 우리 집에 모였다.

“내 TV는 별일 없이 잘 있네. 보관 잘해 줘서 고마워.”

“뭐? 몇 번 켜지도 않은 새 제품이야. 고장 날 리가 없잖아. 난 TV를 잘 보지도 않는다고.”

아무 생각 없었는데 로저스에게서 난데없이 태클이 들어온다.

“열 받아서 안 보는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소중하게 다뤄줘. 포스트 시즌 끝나면 가져갈게. 내가 요즘 시간이 없어서…”

갑자기 리모컨을 집어던지고 싶어졌다.

‘아! 이거… 음. 이건 로저스가 요즘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아서 하는 투정 같은 거야. 어린애가 칭얼거린다고 내가 화내면 모양새가 우습지. 그걸 노리고 말하는 건데…’

“하하. 내가 그렇게 마음 좁은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TV 하나 못 주겠어. 언제든지 편할 때 가져가. 하하하.”

속은 좀 쓰리지만 어쩔 수 없다. 열 내면 또 지게 된다. 수치는 한 번이면 족하다. 그래도 다행인 게 오전 훈련 때까지만 해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 늘어진 멍멍이 꼴로 있더니 지금은 많이 풀어진 것 같다.

‘아직 게임이 많이 남았는데 로저스가 벌써 처지면 곤란하지. 다행히 잘 털어낸 모양이네.’

리우드 투수 코치가 잘 다독였나 보다. 로저스가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 일부러 이런 기분전환의 자리를 만들었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회복이 너무 급격하게 일어나 날 약 올리는 상황이 나왔지만, 팀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지금 떠오른 생각인데 난 TV 안 사줘도 돼. 가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잖아. 네가 자기감정에 너무 충실해서 벌어진 일인데 그런 식으로 TV를 받은 건 좀 아닌 것 같아.”

베그웰이 짐짓 인심 쓴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하아! 날 두 번 죽이려고 하네. 그깟 TV 얼마 하지도 않는다고. 이왕 해주려면 훈련비 같은 다른 것도 있잖아. 그런 식? 무슨 생색을 그런 식으로…’

자기감정에 충실이란 말만 들린다.

‘바보가 바보짓을 했으니 한 번 봐주겠다 이거야?’

“그럴 거 없어. 작은 거라도 약속은 약속이야. 작은 걸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큰 걸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꼭 해줄 거야. 시즌 끝나면 다 같이 가자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말을 받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네. 그럼 그렇게 해 줘.”

아무튼 이놈들은 겸양의 미덕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럴 때는 한두 번은 빼줘야 모르는 척하고 받아도 받을 텐데 이렇게 단숨에 말을 거둬버리면 다음에 할 말이 없다.

‘내가 더러운 꼴 보기 싫어서라도 꼭 사줄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묻고 더블로 받아낼 날이 있겠지. 그날을 위해서라도… 응?’

길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쳐 간다.

“최종전은 어떻게 될까?”

관심 없는 척하며 말을 꺼냈다.

“메츠는 월드 시리즈 3연패를 노리는 팀이야. 말린스에게 특히 오늘 패배는 치명적일 것 같아. 메츠 선수들이 시리즈 시작하면서 왠지 컨디션이 저조해 보였는데 오늘 게임을 계기로 반전하지 않겠어? 다음 경기는 홈이기도 하고.”

‘베그웰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에이, 누구나 한 명은 걸리겠지.’

낚시로 잡을 물고기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로저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늘 후반에 문제가 해결되었잖아. 메츠가 1, 2차전 질 때도 투수진은 괜찮았어. 타격이 문제였지. 오늘 9회 석 점 차이를 동점으로 만들고 10회에 역전까지 해낸 걸 보면 타격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아. 말린스가 이기려면 오늘 이겼어야 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말린스 감독에게는 우리 감독 같은 결단력이 부족했다.

“마지막에 판단이 좋지 않았어. 결과론이지만 9회에 투수 교체 타이밍이 있었는데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주저하다가 그 기회를 놓친 거지. 하긴 그래도 석 점 차이 역전은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맞아. 이건 방심했다는 말밖에 못 하겠네. 설마 지겠냐 싶었겠지. 사실 거의 다 이긴 게임이 맞긴 했지. 선수 누구도 5차전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걸. 이 상태로 하루 쉬고 게임을 다시 한다고? 과연 집중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젊은 팀이?”

지는 과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렇게 9회에 동점까지 허용했으면 어떻게든 원래 결심대로 마무리했어야 하는데 뒤늦게 10회에 다음 경기 선발투수로 예정된 1선발까지 올렸다. 갑작스럽게 올라왔음이 분명한 그는 첫 타자에게 결승점이 된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몇 개 던지지 않아서 하루 쉬고 선발 출전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제 컨디션은 아니겠지.’

다 진 경기를 뒤집은 메츠의 기세와 선발라인업을 생각한다면 누가 봐도 메츠의 우세가 확연하다.

‘이거 누군가는 말린스를 선택해야 내기가 성립할 거잖아.’

전처럼 네가 먼저 선택하란 말을 누군가 해주면 자연스럽게 메츠를 선택할 수 있을 텐데 이번엔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하! 이건 99%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속 보이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이걸로 한 판 더 붙어 보자란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못하겠다. 아니, 해도 나올만한 상황이 너무 빤히 보여서 의욕이 안 생긴다.

‘아쉽지만 이번은 한 번 쉬어가야지. 어쩌겠어.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난 군자가 아니라 스포츠맨이지만 옛날에는 그게 다 비슷한 거였겠지.’

“메츠도 올라오면 1선발을 소모하고 올라오는 거잖아. 5번이나 경기를 치르면 불펜의 소모도 상당할 거고 이번엔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작년에 신세 진 건 갚아야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섰다. 말을 꺼내지 않아 내 가슴 속에 품은 비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존슨 너 감독한테 불펜이든 뭐든 괜찮다고 했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진짜야?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우리와 의논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

괜한 어색함이 생기기 전 화제를 바꾸고 싶어 바로 어제 소르카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응. 포스트 시즌 들어가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했었어. 실제로 우리 선발진 중에서 내 성적이 다섯 번째였잖아. 밀리기 전에 차라리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지. 그리고 선수기용에 대해 권한을 가진 건 감독인데 우리끼리 무슨 의논이 필요하겠어.”

나도 안다.

‘그냥 할 말 없어서 막 뱉은 말에 따지긴…’

“밀리기 전? 어째 순전히 네 생각만은 아닌 듯이 말하네.”

“리우드 코치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현실을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난 보직이 뭐든 괜찮다고 했는데 디비전 시리즈에 네 번째 선발로 정해졌다고 해서 아주 감사했지. 결국 선발 등판은 못했지만.”

“야! 어제 승은 니가 가져갔잖아. 포스트 시즌 첫 승이 눈앞에 있었는데… 아! 열 받아.”

어제 교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로저스가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조심스러워서 누구도 그에게 그에 대해서 묻지 않은 탓도 있다.

‘풋,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이네.’

정말 아직까지도 맺힌 것이 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저스. 그게 존슨 탓은 아니잖아. 교체시킨 건 감독이고 승리야 기록원이 정하는 거니까…”

“알아. 안다고 그래서 더 열 받아. 어제 4회 끝나고 리우드 코치가 조기 교체 이야기를 하더라고. 타자의 세 번째 타석부터 어쩌고 하면서 통계수치를 줄줄 읊어대면서… 5회에 삼자범퇴를 시킬 수 있으면 세 번째 타석 가기 전에 끝난다고… 어휴!”

어제 상황이 참 딱한 노릇이긴 했다.

“그거야 감독이나 코치들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들은 가장 이길 확률이 높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 이해할 부분은 이해해야지.”

“그럼. 이해하지. 체스판의 말 성능이 시원찮아서 그런 건데 누굴 탓하겠어. 리우드 코치가 그러더군. 현재의 너를 판단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과거의 너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고. 그게 선수로서 너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면서…”

표현력이 끝내준다. 지당한 말씀이다. 과거의 내가 쌓여서 현재를 이루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가 축적된 결과물이라… 음.’

“다음 시즌에 두고 보라고. 다시는 그런 말 못하게 해줄 테니…”

로저스의 다짐이 바로 이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챔피언십에서는 불펜으로 기용될 거지만 잘 던지면 월드시리즈에서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고 그랬어.”

‘애들을 완전히 잡았어. 리우드 코치. 정말 정치력 끝내주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