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26화 (126/200)

126화. 승리를 기대하다 (3)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나이스! 로저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일어서서 로저스를 응원하게 된다.

‘어?’

주변 선수들이 별일을 다 본다는 듯 묘한 눈초리로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 어쩌라고.’

사람이 1년 12달 똑같을 수는 없다.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도 있다. 내가 아무리 평소 로저스와 아웅다웅했었지만, 오늘같이 중요한 경기를 맞아 우리 팀 투수에게 응원을 보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음. 사는 게 별거 있어? 다 그런 거지.’

앉으려는데 소르카의 슬며시 미소 띤 얼굴이 보인다.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는 듯 눈매가 반달형이 되어 있다. 조금 민망하긴 하다.

‘어휴!’

“잘 던졌어. 하나 더…”

슬며시 그냥 앉기가 민망해 고함 한 번 더 질렀더니 완전히 동네 바보형이 되어 버렸다.

“다음 타자가 나와야 던지지. So. 뭘 보고 있는 거야?”

“푸하하. 기분이 완전히 업되었나 보지?”

‘에구구,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로저스가 5회 말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왠지 모르게 눈에서 독기가 보이는 것 같다. 한창 피칭 중에 강판시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마음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어쩌면 내 기분 탓일 거야.’

로저스의 투구 스타일은 우리 팀의 투수 중 드로이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줄 점수는 줘가면서 하는 안정적 경기운영. 롱런하는 투수의 전형적 패턴이다. 그런 좋은 점을 흡수하면서 로저스는 한 단계 나은 투수로 진화했다.

올 시즌 로저스의 성적은 그에게 영향을 준 드로이넨을 크게 뛰어넘었다. 그와 드로이넨은 평균자책이 거의 1 차이가 났다.

‘원래 가졌던 스터프(stuff, 구위)가 드로이넨보다 나았지.’

스터프란 제구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넣었을 때 타자를 압도할 수 있는 순수한 공의 위력을 말한다.

보통 이것은 타자에게 헛스윙을 유도하는 비율(컨택트율)로 측정하게 되는데 다만, 이 지표 역시 제구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존 안에 들어간 공에도 제구의 요소는 생기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가 제구의 요소가 많이 포함된 쪽이고 존슨 같은 경우가 반대의 유형이지.’

대개 구위는 구속에 비례하지만 무브먼트와 디셉션으로 이 한계를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로저스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골고루 섞인 유형의 투수다.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가 없다면 보통은 평범한 투수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로저스는 평균 이상의 다양하고 준수한 능력을 안정적인 경기운영에 녹여내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냈다.

컨택트율은 초레전드급 투수라도 70%대 후반. 당대를 호령했던 특급투수들은 80%대 초반 정도가 나온다. 즉,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존 안에 들어온 공을 거의 열에 일곱, 여덟은 맞혀내는 능력이 있다.

지금 로저스가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 그는 평속 94마일의 패스트볼과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흔들어 이닝을 먹어가는 스타일이지 이렇게 윽박지르는 투구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야! 왜 이러는 거야. 아까 베그웰이 다만 어쩌고 하더니 뭔가 부담이 있나?’

자세히 물어보기도 전에 공수교대가 되는 바람에 내가 모르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타석에는 컵스의 1번 타자 켄 자일스가 들어섰다. 타율은 2할대 후반 출루율은 그보다 1할가량이 높은 상당히 까다로운 타자다.

틱-

“파울.”

“볼.”

틱-

“파울.”

로저스는 대담하게 존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의 주 레퍼토리는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의 조합이지만, 거기다 가끔 던지는 수준급의 슬라이더와 커브까지 가지고 있다.

‘하나 빼나? 아니면 여기서 승부를…’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볼카운트로 상대를 몰아넣었으면 브레이킹 볼을 이용해 집요하게 존의 경계를 노리는 피칭을 한다. 빠져도 상관없다는 듯 목적구를 겸한 유인구로 타자의 타이밍을 흩트린다.

기막힌 궤적을 그리며 커브가 존 근처에 떨어졌다.

“볼.”

‘아… 잘 던졌는데 아깝네.’

내가 보기엔 스트라이크 존에 걸친 것 같은데 주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할 수 없지. 그래도 투 볼 투 스트라이크잖아.’

아직까지 여유가 있다.

‘늘 해오던 대로 목적구를 몸쪽으로 하나 붙이고 그 다음에…’

“어? 왜 저러지?”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온다.

로저스가 베그웰의 사인에 계속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가끔 한두 번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길게 사인을 거부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결국 사인 교환이 길어지더니 베그웰이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리우드 코치가 아마 출루시키면 교체라고 했겠지.”

“소르카. 뭐라고? 뭐 들은 이야기가 있는 거야?”

“그런 건 없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뻔하잖아.”

상당히 그럴듯한 추측이다.

“로저스가 마음이 급해진 거야. 베그웰은 하이 패스트볼 같은 목적구를 하나 던졌으면 하겠지. 게임을 3:1로 리드 중인데 신중하고 싶지 않겠어?”

거기까지는 다 내 계산에도 있었다.

“그게 맞지. 이럴 때 타자야 오죽 갑갑하겠어? 눈앞으로 공이 다가오면 얼핏 배트가 끌려 나올 가능성도 있고 혹시 안 나오더라도 다음 구에 반대쪽을 찔러 승부하면 되잖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인을 거부하는 거지 이해가 안 돼.”

“로저스는 이 상황에서 공을 하나 빼기가 거북한 거야. 풀카운트가 되는 것 자체가 싫겠지. 혹시 공이 빠지면 볼넷이 되는 상황에서 승부하느니 지금 위닝샷을 던지고 싶은 거라고.”

그건 존슨이나 가능한 발상이다. 타자가 미리 알아도 못 칠만한 강력한 무기가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로저스의 패스트볼이 괜찮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좀 전에 던진 공이 브레이킹 볼이었는데 연속해서 브레이킹 볼을 던지기는 어렵다. 그건 타자 눈에 너무 익게 된다. 나 같으면 비슷한 코스에 더 각을 키워 던져 타자를 속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나 가능한 거고 로저스에게 변화구를 그렇게 세밀하게 제구할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타자가 패스트볼에 대비하고 있을 게 확실한데 그걸 존 안으로 욱여넣는 건 너무 위험하다.

베그웰이 가볍게 웃으면서 홈플레이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야기가 잘되었나 봐.”

“아닐걸. 그랬으면 좋겠지만 일반적으로 투수는 이런 장면에서 자기 의견을 양보하지 않아. 그게 맞는 일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소르카의 말이 이해가 안 된다.

“그건 왜 그런 거야?”

내 물음에 소르카가 픽 웃었다. 사람이 어이없을 때 나오는 웃음 딱 그런 느낌이다.

“너도 참 연구대상이야. 넌 안 그러는 모양이지? 설혹 결과가 나쁘더라도 내 뜻대로 하고 맞아야 납득이 되지. 사실 포수 말대로 한다고 해서 그게 100% 안 맞는다는 보장은 없는 거잖아.”

“그건…”

타악-

‘하아! 결국 맞아버렸네.’

리글리 필드의 명물인 담쟁이덩굴 외야 펜스까지 굴러가는 큰 타구가 나왔다.

“쯧쯧. 너무 쫓기듯 던지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다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가서 로저스로부터 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존슨이 마운드에서 공을 건네받았다. 로저스는 조용히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별말 없이 락커로 사라졌다.

1사 후긴 하지만 큰 타구가 나오고 주자가 생기자 리글리필드 홈관중의 웅성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존슨은 어떻게 설득했을까? 내일 선발을 포기하라는데 그냥 순순히 예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선발 투수에게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다. 불펜 등판이 강등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소르카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아직 존슨이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때는 아니지. 그건 여러 가지가 충족되어야 내세울 수 있는 건데 존슨에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잖아. 로저스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 그걸 떠나서 포스트 시즌 진출이 확정되고 나서 본인이 먼저 보직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뭐? 전혀 그런 말 안 하던데… 개인적으로 만나서 우리 집에서 플레이오프를 같이 보기도 했었다고.”

진짜 그랬다면 가볍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팜에서 길러진 선수들은 리우드 코치와 개인적 관계가 깊어. 리우드 코치와 마이너에서부터 함께한 세월이 꽤 길지. 리우드 코치가 지금 투수코치를 하고 있는 건 그들을 길러낸 능력을 인정받은 부분이 아주 크다고.”

“응? 그들이 콜업되고 나서 만난 게 아니야? 전혀 몰랐네.”

“거의 같이 콜업된 거나 마찬가지야. 싱글A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함께했지. 서로 공생관계에 가깝다고. 그들은 상당히 끈끈한 사이야. 아무튼 그에게 우승이 가능하다면 불펜이건 뭐건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는군. 어쩌면 리우드 코치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감독이 이런 조금 무리일 수도 있는 계획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리우드 코치를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잘 막았네."

존슨은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두고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100마일의 패스트볼을 연속으로 뿌려댔다.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5회 말 남은 아웃카운트 두 개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하핫.”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한동안 쉬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긴 이닝을 생각하지 않고 던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정규시즌 때보다 구속이 더 빨라진 것 같다. 소르카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5회를 마무리한 마지막 공의 구속은 무려 103마일이 찍혔다.

속도가 타자들 눈에 익을 때까지는 거의 언터처블일 것 같다.

‘이러면 진짜 감독의 판단이 맞을지도 모르겠는걸.’

6회, 7회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힘을 못 쓰던 컵스 타선이 존슨에게 첫 안타를 뽑아낸 건 8회도 투아웃이 되어서였다. 뒤가 없는 컵스는 있는 투수를 총동원해 우리 타선을 막아냈다. 3:1의 점수 차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핫. 진짜 감독이 작정했나 봐.”

8회 투 아웃에 안타가 나오자 감독은 존슨을 가차 없이 내리고 애덤을 올렸다.

“소르카. 아까 애덤은 안 쓸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걸 내가 어떻게 100% 장담하겠어. 감독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슬슬 걱정이 될 지경이다. 이러다 진짜 오늘 경기가 막판에 이상해지면 내일 경기는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애덤은 8회 단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교체되었다. 9회엔 클로저인 체이스까지 올려서 끝끝내 경기를 마무리했다. 정말 먹이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전력을 다하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흐흐흣. 이기긴 이겼네. 남의 집 앞마당에서 이거야 원… 쑥스러워도 할 건 해야지.’

그라운드를 뛰어다닌 선수들의 모습을 뒤로한 채 물안경을 찾아 락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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