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승리를 기대하다 (2)
하위타선이라서 별 기대 없이 보고 있었는데 8번 2루수 크로포드가 안타로 출루했다.
“오호! 이거 잘하면…”
우리 타선의 가장 약한 고리인 7, 8, 9번 내야수 트리오에게서 선두타자 안타가 나왔다. 대개 이런 경우엔 점수로 연결되는 확률이 높았다.
우리 벤치는 모험하지 않았다. 9번 유격수 패터슨이 보내기 번트로 주자를 2루에 보냈고 이어 1번 크리스가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냈다. 1사 1, 2루 우리 중심타선 앞에 먹음직스러운 밥상이 차려졌다.
“걸렸네. 여기서 뒤집어야겠지.”
소르카가 소곤거렸다. 나도 똑같은 심정이다.
“알버트나 베그웰 둘 중의 한 명은 쳐낼 거야. 만약 4번 레블론까지 타선이 연결되면…”
빅 이닝이 기대된다.
‘만약 여기서 역전하면… 소르카의 예상대로 돌아갈까?’
저쪽 구석에서 로저스도 뚫어져라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다. 복도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격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행이네. 잘 삭혔나 봐.”
“?”
소르카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돌아본다. 턱 끝으로 슬쩍 로저스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아! 들어왔네. 음. 아무쪼록 마음 다스리려 노력한 보람은 있어야 할 텐데…”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타석에서의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틱-
“파울.”
“볼.”
투 볼 투 스트라이크. 투수의 입장에서는 승부를 봐야 할 볼카운트다. 아직은 투수에게 유리하다. 본인의 가장 자신 있는 공으로 위닝샷을 꽂아야 한다. 여기서 어설프게 뺐다간 풀카운트에 몰린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변화구를 코너 쪽으로 제구할 수 있는 투수는 극히 드물다. 오늘 상대 선발은 그런 능력이 없다. 스트라이크를 잡을 생각이라면 99%로 패스트볼이다. 변화구라면 안 치면 볼이다.
타악-
아웃코스 가장 먼 쪽으로 잘 제구된 것처럼 보였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알버트의 배트가 따라 나와 결대로 가볍게 밀어 쳤다.
깨끗한 중전안타. 2루 주자의 스타트가 늦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너무 잘 맞은 타구가 나와서 오히려 점수가 나지 않았다. 3루 주루 코치가 2루 주자를 홈으로 돌리지 못하고 3루에서 세웠다. 1사 만루.
‘잘 판단했어. 여기서 무리할 필요가 없지. 다음 타자가…’
이제 3번 베그웰. 내셔널 리그 타격 1위에 빛나는 우리 팀에서 가장 정확한 타격을 구사하는 선수다. 어떤 투수라도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유형의 타자.
투수 교체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컵스의 벤치는 무슨 생각인지 바꾸지 않고 그냥 밀어붙인다.
“갑갑하겠네.”
같은 투수로서 그 괴로움을 어떤 건지 너무 잘 안다.
“어쩌겠어. 어떻게라도 여기서 승부를 봐야지. 상대가 무조건 쳐낼 거라는 보장 따위는 없는 거잖아.”
‘어이, 소르카. 아무리 투수의 입장에 공감이 가더라도 지금은 타자가 우리 편이라고.’
안타뿐만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는 진루타나 볼넷도 괜찮다. 최대한 존을 좁혀서 노려야 한다. 상대는 이런 상황에서 브레이킹 볼을 낮게 제어할 수 있는 급의 선수가 아니다.
‘아마 무리해서 던지면 두 개 중의 하나 정도는 빠지겠지. 만루에서 그런 확률의 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없다고. 베그웰. 너도 잘 알잖아.’
포수 포일의 가능성이 높은 구종을 던지기는 어렵다. 이런 제약까지 생각하면 던질 수 있는 선택지가 대폭 줄어든다. 이건 타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더군다나 리그에서 가장 정확도가 놓은 타자라면…
‘자! 이제 한 방 날려서 끝내버리자고.’
타악-
초구부터 벼락같이 배트가 돌았다.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완전히 가를 것 같은 타구다.
“나이스! 푸하하. 끝났… 아!”
컵스의 중견수가 날았다. 비룡이의 허공답보(虛空踏步)를 현실에서 봐버렸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공을 낚아챘다. 공중 1회전에 이은 지상 2회전 낙법까지 완벽했다. 야구를 한 이래 직접 경험한 적 없던 파인 플레이였다.
메이저리그 역대 호수비 모음에 들어갈 만한 장면에 얻어맞고 나니까 기분이 얼떨떨하다.
다음 루를 향해 일제히 스타트했던 주자들이 서둘러 귀루했다. 다행히 컵스의 중견수가 공을 잡고 나서 후속 동작이 길어져 위험한 상황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런 타구가 잡히다니 너무 허탈하다.
3루 주자의 리터치(retouch)로 1점이 들어와 동점이 되었다. 희생플라이를 친 셈이었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고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미친놈. 저걸 잡아.”
“에이, 꼬이네. 꼬여.”
모두 일어섰던 우리 선수들이 내뱉는 기운 빠진 말들로 조금 전까지 활기차던 더그아웃 분위기가 갑자기 10배는 무거워진 것 같다. 우리 쪽으로 급격히 쏠리던 흐름이 완만하게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털썩-
베그웰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속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는데 티를 낼 수는 없고… 다 시간이 필요하다.
“장비 착용하는 거 도와줄까?”
나도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응? 그래. 고마워. 잠시만… 아니, 지금 하자,”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한 말이었는데 잠깐 주저하더니 바로 호응한다. 게임이라는 게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타악-
“아! 레블론이…”
의욕이 꺾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좌중간 담장을 직격하는 큰 타구가 나왔다. 베그웰의 타구에 비해 체공 시간이 조금 긴 타구였지만 이번엔 컵스의 외야수가 따라붙지 못했다. 투아웃 이후라 주자들의 스타트도 아주 빨랐다.
“달려.”
“역시 우리 4번이 최고야.”
더그아웃 분위기가 바닥에서 천정으로 수직 상승했다.
2루 주자는 넉넉하게 홈으로 들어왔고 조금 무리이지 않나 싶던 1루 주자까지 홈을 밟았다. 1루 주자였던 알버트가 굉장히 빨랐다. 게임이 되려면 이렇게 풀린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득점 주자들을 맞으면서 모두들 흥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로저스까지 한쪽에 서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분 좋게 웃는다.
‘어? 투수 코치가 왜 가는 거지?’
리우드 코치가 로저스를 옆으로 데리고 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퀵후크(Quick hook)로 가려나 보네.”
어느새 다가온 소르카가 속삭이듯 하는 말이 아득하게 들린다. 선발 투수의 빠른 교체를 그렇게 표현한다. 보통은 3실점 이하를 하고 있는 선발 투수를 6이닝을 채우기 전에 교체하면 퀵후크에 해당한다.
승리투수가 되기 위해서 선발 투수는 최소 5이닝을 던져야 한다. 지금 상황은 퀄리티 스타트가 가능한 투수가 강제로 끌어 내려지는 것이다.
“설마 지금 바로 교체하기야 하겠어? 5회에 올리기는 하겠지.”
“그거야 알 수 없지. 일종의 토너먼트 게임인 지금은 그런 것이 고려사항이 아닐 수도 있어서… 팀 승리가 우선 되어야 하는 상황이잖아. 선수 개인의 승리 기록을 존중하는 건 연봉 산정이나 동기부여에 큰 영향이 있기 때문인데 로저스는 장기계약을 맺었어. 그래서 돈 문제는 상관없지. 그럼 선수의 기분 문제가 남는데 그것까지 헤아려줄 정도로 이 바닥이 말랑하진 않다고.”
로저스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이닝만 더 던지면 포스트시즌 첫 승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걸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아들일 선발 투수는 없다.
개인 커리어에도 썩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코칭 스탭에게 자신이 불신당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멘탈 관리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어린 투수의 기량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미국에서는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게 포스트 시즌의 특수성인 건가?”
“포스트 시즌에서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일은 아니야. 보통은 퀵후크를 자제하는 이유가 불펜 부담 때문인데 지금은 그런 상황도 없잖아. 오늘 끝내기로 마음먹었다면 어정쩡한 것보다야 이게 낫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 경우를 당하면 난 못 견딜 것 같다.
“베그웰.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게 있잖아. 감독도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그의 의무는 게임을 이기는 거야. 확실하게 이기는 길이 있다면 뭐든 해야 맞다고 생각해.”
“하아! 너…”
베그웰이 이렇게 냉정한 사람인 줄 미처 몰라봤었다.
“좀 더 지켜봐야 해. 아직 공격 중이잖아. 카스트로, 필로 이어지는데 점수가 더 날 가능성도 있어. 누군가 홈런이라도 쳐서 점수타가 4~5점 이렇게 벌어지면 안 바꿀지도 몰라.”
컵스의 투수 교체로 경기 진행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런 건 항상 결과론일 수밖에 없지만 늦은 감이 있다.
‘4와 2/3이닝 3실점 후 교체니까 별로 늦은 건 아닌가?’
컵스가 만약 투수 교체를 서둘렀다면 언제가 좋았을지 그것도 생각해보면 애매하다. 우리와 비슷한 경우인데 그쪽도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장비 착용을 마친 베그웰이 감독에게 불려갔다. 포수는 당연히 전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조용히 경기를 관망하던 코칭 스탭이 점수가 나면서 갑자기 바빠졌다.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쳐버려. 카스트로 너 계약해야 하잖아. 이럴 때 뭔가를 좀 보여야 하지 않겠어?’
복잡할 것 없다. 우리 타자들이 연속 3안타쯤 더 터트려주면 모든 일이 단순해진다.
‘에구, 볼넷이네.’
바뀐 투수는 고의볼넷으로 빈 1루를 채웠다. 2사 1, 2루에 타자는 6번 필이다.
‘저것들이 무슨 생각인 거야? 카스트로보다는 필이 상대하기 낫다는 건가? 필이 열 좀 받겠네. 그래, 필 아저씨 한 방 있잖아. 여기서 큰 거 하나면 모두가 평화로워져.’
7번 테일러에게 뭔가를 바라기는 어렵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필이 해내야 한다.
“스트라익.”
초구를 노렸지만 헛스윙.
“어휴!”
지금이 오늘 경기 중 가장 살 떨리는 시간인 것 같다. 베그웰의 타석에서는 초구 스윙이 이루어졌고 이후 상황이 정신없이 전개되어 떨리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레블론 타석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베그웰이 다시 나타났다.
“네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 바로 바꾸진 않을 거야. 다만…”
“어! 그래? 잘 되었네. 다만 뭐?”
타악-
심상치 않은 타격음이다.
‘그래. 이거지.’
“악!”
3루수 직선타다. 컵스의 3루수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며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잡아냈다.
‘미친… 한 이닝에 이런 수비를 두 번 하는 건 반칙 아냐? 아이고, 이 와중에 3점 낸 게 어디야. 쩝! 할 수 없지.’
이런 게 스포츠의 속성이다. 꼭 좋은 플레이를 해야 이기는 건 아니다. 상대 수비가 제아무리 날아다녀도 이번 이닝에 역전을 해낸 건 우리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