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24화 (124/200)

124화. 승리를 기대하다 (1)

“로저스,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이러면 오늘 끝나는 건가.”

4회 말, 마운드에서 로저스가 두 번째 타순을 맞이한 컵스의 상위 타선을 상대로 여전히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에게서 좀 이르다 싶은 이야기가 솔솔 새어나온다.

홈 2연승 후의 원정경기라서 그런지 느긋한 공기가 더그아웃을 떠돌고 있었다.

‘점수가 나야 이기지.’

투수의 호투가 꼭 승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타선이 점수를 내줘야 이길 수 있다. 아직은 0:0의 스코어가 유지되고 있었다. 디비전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우리 팀의 타격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1차전에 9점이고 2차전에서는 4점이었잖아. 오늘은 아직…”

“왜? 걱정스러워?”

소르카는 태연했다.

“걱정까지는 아닌데 그렇잖아. 타격이 조금만 더 터져주면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오늘 끝내야 앞으로의 일정이 부드러워진다. 내가 디비전 시리즈에 다시 등판하는 경우가 생겨서는 곤란하다. 나의 다음 등판은 챔피언십 시리즈가 되어야 한다.

“넌 원정에 왜 따라왔냐?”

상당히 이상한 질문이 기묘한 타이밍에 나왔다.

“뭐? 팀원이 팀 따라 게임에 참여하는 게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였어?”

“참! 말은… 넌 이 시리즈가 5차전까지 가지 않으면 등판할 일이 없잖아. 만일 5차전이 열린다면 홈경기이고 만약 그전에 끝나서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 등판한다고 해도 홈경기지.”

“흠. 그건 그렇지. 뭐…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조금은 찔리는 이야기다. 만약 나와 팀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했다면, 난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컨디션 조절을 하면서 다음 게임 등판을 준비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 팀이 3차전이나 4차전에서 승리한다면 디비전 시리즈 승리 축하연에 참여할 수가 없다. 난 당연히 5차전까지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팀이 컵스에게 질 것 같지가 않다.

샴페인도 터트려야 하고 물총도 쏘아야 한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건 의미가 남다르다. 난 첫 포스트시즌 시리즈 승리의 기억을 훈련하면서 알게 된 것으로 갖고 싶지는 않았다. 드러내놓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구단 직원들이 오늘도 축하 준비를 다 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당신도 비슷하게 생각해서 여기 온 거 아니야?”

2차전 선발이었던 소르카 역시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맞아. 나도 그래서 원정에 따라 왔어. 난 오늘 승리 확률이 99%라고 생각했거든.”

아무리 우리 팀이지만 99%는 너무한 생각인 것 같다. 그런 절대적 확률 같은 것이 나오기 어려운 경기가 야구다.

“그렇지. 하지만 승리확률 99%는 과한 거 아니야? 컵스도 전패로 탈락을 원하지는 않을 거잖아. 특히 홈에서 그런다는 건 악몽이지. 지금 우리 팀은 타격 컨디션 문제도 있고…”

“내 생각에는 우리 타격 컨디션은 잘 유지되어 있는 것 같은데… 별문제 없어.”

“내는 점수가 줄어들고 있잖아. 우리 팀이라서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 주는 게 좋다지만 객관성은 잃지 말아야지.”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너무 그렇게 되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때 선입견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긴다.

“주관적인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봐도 그래.”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그동안 착시가 있었던 거야. 정규 시즌 마지막에 우리 타선이 상대한 건 주로 2진급도 못 되는 투수진이었잖아.”

그건 그랬다. 로스터 확대 기간에 올라온 루키를 포함한 대체선발들이 많았다. 정규시즌 마지막 일이 주간은 그랬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때 폭발한 우리 타격은 예외적인 경우에 넣어야지. 특별한 타격 컨디션이라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려워. 중심타자들을 좀 쉬게 해주는 게 좋았을 테지만 그때 우리 사정이 좀 그랬잖아.”

“음…”

최다승 문제와 개인 성적 때문에 좀 무리했던 경향은 있었다. 지금 시즌 타율 2할에 턱걸이하는 우리 내야수들도 마이너리그에서는 날아다니는 타자들이었다. 그랬기에 콜업이 가능했다. 타율도 상대적인 것이다.

“한동안 10점 이상은 기본으로 내니까 머리에 그것이 박혀서 지금 우리 타선이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해 보이는 거야.”

“1차전에 9점 냈던 건?”

“그것도 예외라고 생각해. 실제로 1회 6점을 낼 때 안타는 하나뿐이었잖아.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 난 그 뒤 공격에서 낸 3점이 일반적 상황이었다고 봐. 그날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으면 우리 팀이 낼 수 있는 점수는 4~5점 정도였을 거야.”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어제도 4점은 냈잖아. 게임당 안타 숫자를 비교해 봐도 1차전과 2차전은 큰 차이가 없어.”

현대야구에서 출루율의 중요성이 높아지기는 했어도 그것이 안타보다 볼넷이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본지표로서 안타 수는 공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표다.

“포스트 시즌에서 상대한 컵스의 선발들을 생각해봐. 상대 1, 2선발을 상대로 그 정도 점수를 냈다면 우리 팀 타격감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 타격 컨디션을 잘 유지하고 있는 거지.”

“으음.”

“오늘도 점수를 낼 만큼은 낼 거야. 오늘 승부의 관건은 로저스가 얼마나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가 아닐까? 선발의 호투를 바탕으로 그렇게 이겨가는 게 우리 팀 컬러잖아.”

확실히 식견이 나보다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아니, 이건 너무 이른 생각이지.”

이런 거 너무 싫다. 자신 없으면 아예 말을 말든지 이렇게 하다 끊으면 어쩌란 말인가!

“말을 꺼냈으면 하라고. 사람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어쩌면 뭐?”

나의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소르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거 참! 안 생길지도 모르는 일인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흠. 할 수 없지. 만약에 다음 공격에서 우리가 2점 정도만 리드하면 감독이 시리즈를 오늘 끝내려 들 거라고 생각해.”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오늘 끝낼 수 있으면 좋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어! 두 점? 왜 하필이면 두 점이지?’

단순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단순하지가 않다.

“혹시 그게 내일 선발을 오늘 후반에 투입한다든가 하는… 그런 생각인 거야?”

소르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로저스가 7회까지 던지고, 애덤과 체이스 순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 잘하던 거 괜히 바꿔서 별로 좋을 게 없잖아.”

“그편이 가장 무난한 시나리오이긴 한데 애덤이 어제 던졌잖아. 애덤 나이를 생각해봐. 지금은 가급적 연투를 피하는 게 좋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더 놓은 곳을 바라보는 팀이다. 치러야 할 게임이 아직 많이 남았다. 포스트 시즌 초반인데 가급적 무리를 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로저스가 세 번째 타순부터 실점이 늘어난다는 통계가 있어서 포스트 시즌 같이 중요한 경기에서 길게 쓰는 걸 좀 꺼릴 거야.”

“그건 존슨도 마찬가지잖아. 특히나 존슨은 기복이 로저스보다 훨씬 심해서 오히려 안정성이 떨어지는 거 아냐?”

“그 말은 맞는데 존슨에게는 다른 특징이 있잖아. 초반이 특히 강해. 타자들이 그의 패스트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 배팅 타이밍을 잡아내기 위해서 한 타순 정도로는 어렵다는 아주 큰 강점이 그에게 있어.”

당장 다음 5회초 공격에서 점수를 뽑는다면 빠르게 교체할 수도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인터넷상에서 한국 팬들은 로저스를 육무원 혹은 칠무원이라고 불렀다. 공무원에 빗대어 만든 별명이라는데 안정적이라서 좋기는 하지만 폭발력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어느 투수에게나 최고의 무대에서 주목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더군다나 나서기 좋아하는 로저스 같은 유형은 그런 부분이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다른 실점도 없는데 이른 교체는 자존심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다.

‘한두 점 승부가 아니라 우리 타선이 대량득점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점수 차가 좀 벌어지면 벤치에서도 로저스로 밀어붙이겠지.’

혹시 있을지 모를 내일 등판을 대비한 컨디션 조절 때문에 존슨이 불펜투구를 하는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코칭 스탭의 머릿속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다니 참 오묘한 세상이다.

타악-

“에고.”

2사까지 잘 잡아놓고 볼넷 후 적시 2루타를 맞았다. 스타트가 빨랐던 1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다. 선취점을 빼앗겼다.

홈 송구가 빠지는 것을 대비해 포수 뒤편으로 와있던 로저스가 몹시 아쉬워하며 마운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힘내라, 로저스.’

이율배반적이게도 이렇게 뒤지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7회 정도까지 무난히 던질 수 있는 게 보장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겨야 좋은 거지. 완투를 하더라도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마운드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마운드에 다시 선 로저스의 얼굴에 이미 아쉬움을 찾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에 마음을 저렇게 추스를 수 있다는 건 훌륭한 투수의 자질이다. 머리 구조가 단순한 놈이라 가능한 건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이 상황에서는 도움이 된다.

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실점하기 전 상황이었던 2사 1루보다 더 안 좋아졌다. 이제는 2루에 주자가 있다. 짧은 단타로도 실점할 수 있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날카로운 커브가 아웃코스 존에 꽂혔다. 타자는 얼어붙었다.

“나이스.”

저절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타자의 허를 찌른 좋은 승부였다. 로저스는 위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났다.

“아아악!”

로저스는 공수교대로 더그아웃에 들어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복도 쪽으로 나가 버렸다. 화장실에라도 가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리글리 필드는 옛날에 지어진 건물이라서 이런 면이 아쉽다. 문 닫고 좀 떨어지면 이런 소음이 들리지 말아야 할 텐데 이렇게 잘 들리면 모르는 척하기가 어렵다.

“큿. 속 많이 상했나 보네. 좀 멀리 가서 하지. 다 알만한 놈이…”

“그럴 정신이나 있었겠어? 더그아웃을 벗어나서 저러는 게 나름 신경 쓴 거지.”

그건 맞는 말이다. 선발 투수가 더그아웃에서 자기 성질에 못 이겨 글러브를 내팽개친다든지 얼음통을 차는 등 일을 벌이는 건 생각보다 흔하다. 대개는 팀원들이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나름 티 내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갔지만, 문제는 더그아웃의 모두가 다 들었다.

‘이러면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나?’

선발 투수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걸 모두가 너무 뚜렷이 알게 되었다.

타악-

5회초 선두타자가 깨끗한 안타를 치고 진루했다.

‘크큿. 들었나? 저기까지는 안 들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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