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고인물은 억울하다 (1)
타악-
“에라이··· 어휴!”
또 맞아 버렸다. 세 개째 홈런이다.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빌어먹을···.’
가위바위보 게임과 마찬가지인 볼 배합 게임에서 하나가 애매하니까 이 모양이다. 컵스를 당분간 또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전까지 드러난 것이 무엇인지 보완을 해야 할 것 같다.
총 4안타를 맞았는데 3홈런으로 3실점 했다. 아주 효율적인 실점이었다. 이왕 줄 점수라면 빨리 줘 버리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 좋은 장면은 풀 카운트 승부 끝에 내주는 볼넷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타자는 별다른 세리머니 없이 후다닥 베이스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관중석 한편에서 아직은 때 이른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따라서 승리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한 타자만 더 잡으면 구장에서 정식으로 나오는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9회 현재 스코어는 9:3 완투승 직전이다. 투구 수도 100개. 적절하다.
‘홈런 몇 개를 맞던지 무슨 상관이야. 게임을 하는 최종 목적이 승리인데 이기면 되는 거지.’
이 정도면 무난하게 첫 단추를 채웠다. 숙제는 남았지만.
틱-
“그렇지.”
2루수가 가볍게 전진해 타구를 잡았다.
***
2루수의 손을 떠난 송구가 1루수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OK.”
“푸하하. 이겼어!”
퍼퍼펑-
승리의 순간을 위해 준비한 축포가 터졌다. 구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관중의 환호와 대포 소리가 어울린 절정의 순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오라클파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특별관람석의 네 명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모두 일어나 있었다.
보통 메이저리그의 고급 관람석(Luxury suites)은 10개 정도의 좌석,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바와 응접실까지 갖춰진 공간이다. 연간 최소 12만 5천 불 이상의 가격과 최소 5년의 기간으로 판매된다.
“사장님. 승리를 축하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죠. So의 쾌투였어요.”
승리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하지만, 건네진 말과 다르게 고 감독에게는 1회부터 시작된 찜찜한 생각이 경기가 마무리된 지금까지 내내 가슴에 남아있었다.
“흠흠. 쾌투라고 하기엔 좀 모자란···.”
“고 코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욕심이 과합니다. 충분히 훌륭한 피칭이었습니다. 오늘 경기 중에 드러난 문제는 다음 등판 때까지 보완을 하면 되는 거잖습니까. 중요한 건 컵스가 So를 그렇게 분석하고 흔들었는데도 3실점으로 완투까지 해냈다는 거지요.”
윌리스 단장의 덕담도 무난하게 포장한 말같이 들려 고 감독에게는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소영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거기 흠집이 났다.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준 좋은 투구였습니다. 전력분석실에서 오늘 경기는 충분히 검토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So의 다음 등판 때까지 노력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수정이 가능하니까 걱정 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별로 마음에 와닿지가 않네요.”
고 감독이 미처 제지할 사이도 없이 마일리에게서 너무 노골적인 말이 뱉어졌다. 이런 날 이런 자리에서 어울릴 적당한 내용이 아니었다.
“허헛. 마일리 씨께서 우리 팀의 전력분석실에 대해 불신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잠시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윌리스 단장으로서는 불쾌한 내용의 말이었다. 그는 단장이 되기 전 오랫동안 스카우트 부서의 책임자였고, 그 시절에는 전력분석실이 독립된 부서가 아니라 스카우터 부서 산하의 하부조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된 조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요. 부서를 나누고 책임자를 세웠을 뿐 하던 일과 위상이 그대로인데, 어느 날 갑자기 없는 능력이 생기지는 않겠죠.”
여전히 여과를 거치지 않는 말이 마일리에게서 쏟아졌다.
“그건 너무 과한 말인 것 같은데··· 전력분석실이 독립한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필수 데이터 확보와 운용인력의 확대 등에 예산을 꾸준히 늘려왔는데, 그때에 비해 변한 게 없다는 건 오해인 것 같군요.”
마일리는 웃었다. 그녀도 불과 2년 전까지 트윈스의 스카우터 부서의 직원이었다.
트윈스는 스몰마켓 팀답게 부서가 세분되어 있지 않았고, 자이언츠의 전력분석팀 일에 가까운 업무를 몇 년간 담당했었다. 세이버메트릭션으로 채용되었지만, 단순한 통계와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 자료채굴)으로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냈었다.
“돈만 많이 투자한다고 모든 일이 되는 건 아니죠.”
“음. 그럼 우리 팀에 부족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트윈스에 채용되었을 때, 담당자가 통계적 개념들을 야구 데이터에 적용해 쓸 만한 스카우팅 정보로 가공하는 능력을 보겠다고 하더군요. 윌리스 단장님도 전력분석실 신규 직원들을 뽑을 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긴 하군요. 아! 마일리 씨가 에이전트를 하기 전에 트윈스 스카우트 팀에 있었네요. 알고 있었는데 잠시 잊었습니다. 그곳과 우리 팀은 많이 다르죠. 그건 그렇고, 그 말이 뭐가 이상하지요?”
전혀 터무니없는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반 직원과 관리자, 경영진은 모두 제각각의 관점을 가진다. 가끔 이렇게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감 없는 의견을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월리스 단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전 트윈스에 근무하는 몇 년 동안 코치와 선수가 원하는 정보를 잽싸게 알아채는 경청 능력을 키워야만 했고, 압박감이 심한 상황에서도 믿을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죠. 과정을 진행하는 것은 저였지만, 결과를 판단하는 것 매번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결과는, 본인의 기준에 맞는 결론이죠.”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자료라도 각자가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까.”
실무에서 관리직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의 치기 어린 말 같이 느껴져, 윌리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답변할 수 있었다.
“오해는 윌리스 단장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왜 그게 같은 자료일 거라고 생각하시죠? 담당자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상사의 입맛과 다른 자료를 올릴 리가 없겠죠. 아예 그런 자료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더 합리적 생각이 아닐까요?”
“뭐라고요? 허헛.”
“그때의 제 개인적 경험으로, 전 다양한 배경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자이언트가 크게 다를 것이란 생각은 안 드네요.”
“하하핫. 상당히 불편한 내용을 너무 가감 없이 하셔서 제가 가만히 듣고 있기가 어렵네요.”
아무 말 없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해리스 사장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느닷없이 단장과 중요 에이전트 사장 간에 오가는 날 선 말들에 좀 당황한 것 같은 말투다.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이대로 넘기기가 안타까워서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전력분석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선수가 우리 회사 선수라 민감했었나 봅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일리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아프지만 좀 들어 볼 만한 말이긴 했습니다. 그런 시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윌리스 단장도 굳이 문제 삼고 싶지 않은 듯했다.
“비난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자이언츠에는 전통적인 스카우팅 조직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분석이라는 역량만을 놓고 보자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마일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리스 사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그 조직은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육성하는 데 발군이었습니다. 로저스, 존슨, 체이스, 알버트와 같은 어린 선수들을 키워내고, 자이언츠의 팀 컬러에 맞는 끈끈한 수비진을 만들어냈죠. 단장님께서 어려움 속에서도 장기간 꿋꿋하게 주도하셨던 일이 지금 꽃을 피운 겁니다. 외부 영입 선수들이 활약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뼈대가 없었다면 지금은 없었겠죠.”
사장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단장은 대화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마일리 씨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말씀을 좀 더 들어 보고 싶네요. 나 같은 올드 스쿨이 구단의 상층부에 오래 머물러 있어 어떤 부분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런 뜻으로 들리는데···.”
“데이터를 모으고 그것을 기반으로 분석한다고 해서 바로 팀이 바뀌는 건 아니겠죠. 이런 말씀은 죄송하지만, 단장님의 영향력이 너무 곳곳에 뻗어 있습니다. 모두들 단장님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한 구단에서 수십 년을 일하시며 일반 스카우터로 출발해 구단 경영진이 되셨습니다. 직원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롤 모델인 셈이지요. 팀 문화 그 자체가 되신 겁니다.”
“내가? 그건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 같구려.”
“그건 밝은 면이고, 어두운 면도 있지요.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기준이 수십 년간 거의 같았습니다. 물론 단장님께서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 전력분석팀을 독립부서로 만드는 등 노력하셨지만, 역설적으로 본인의 영향력 때문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렵죠. 본의 아니게 사일로(silo)가 되신 겁니다.”
사일로(silo)는 곡식 등을 저장하는 데 쓰는 굴뚝형의 창고다. 한 창고에는 한 종류만 보관한다. 이처럼 조직의 각 부서가 서로 섞이지 못하고 내부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서 간 이기주의 현상을 사일로 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수십 년간 조직의 기준을 제시하던 익숙한 분이 조직의 수장인데, 그의 말보다 데이터를 이용한 분석 기법을 수용해 의사결정을 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고, 데이터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창의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음.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나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 변화를 모색해 왔는데 지금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단장으로서는 상당히 황당하게 느껴지는 의견이었다.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분석은 단순한 통계와 데이터마이닝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공지능을 결합하고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시대가 되었죠. 이것이 무조건 옳은 길이라서 따라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자이언츠 팀 문화 나름대로의 장점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장점을 살리기 위한 선택 때문에 뒤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정을 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이러저러한 제약 때문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그런 의지조차 별로 없는 조직에게 So의 건을 해결하라고 던지시지는 않겠죠.”
“우리 전력분석실도 충분히··· 그랬던가! 음.”
단장의 침묵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