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디비전 시리즈 (4)
무사 만루다. 투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억울한 상황이다. 점수 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웃 카운트를 두 개는 잡았어야 할 상황인데, 이젠 외야 플라이를 맞아도 추가 점수를 줘야 한다.
“멘탈 터졌겠네.”
로저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정도면 점잖은 선수다. 얼굴이 좀 붉어졌고 뭐라고 좀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그게 설사 F나 S로 시작되는 말이어도 다 이해해 줄 수 있다.
“너라면 더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경우가 안 생겼겠지. So. 우리 팀 내야를 어떻게 저런 허접한 팀에 비교할 수가 있어?”
“어! 그건 그렇겠네.”
야구를 투수놀음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단체경기다. 나의 미숙한 점을 팀 동료가 채워주기도 한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연속 실책을 범한 유격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안 보인다. 또 앞으로 공이 굴러가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실수 한 번 더 하면 서 있을 수나 있을까?’
오늘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만 4만 명. 중계를 통해 보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 명 아니, 수천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더 실수가 없더라도 그는 이미 SNS 스타 자리를 예약한 상태다. 스스로도 자책하는 실수 영상을 곧 수억 명이 보게 된다.
‘정말 나 같으면… 음.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떻게든 다 살아지는 거야. 용기를 잃지 말고 극단적 선택만은 피해야…’
좋은 선생님이라도 소개시켜 줘야 할 것 같다. 그는 많이 아플 예정이다. 그리고, 그런 증상은 전염된다.
‘수전증이 왔나 봐. 제구가 안 되잖아.’
내가 컵스 팬이라면 쌍욕을 박을 것 같다. 밀어내기 볼넷으로 다시 1득점. 컵스 감독이 다시 마운드로 올라갔다. 투수 교체다.
“너무 싱겁게 가네. 자멸이야. 컵스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팀이었어?”
로저스가 투덜거렸다. 이놈은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이다. 지금 이 상황은 만세를 불러야 한다.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말 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여기서 끝장낼 수 있는 한 방이 꼭 나와야 해. 괜히 목숨 붙여줬다가 이상해질 수도 있어. 이제 다 왔어. 한 방이면 돼. 그럼 이 경기 우리가 잡는 거야.”
애덤은 역시 레전드가 될 사람답게 경기를 보는 눈이 다르다. 이것이 연륜이다.
‘로저스가 많이 보고 배워야 할 텐데…’
6번 필이 지나면 그 뒤 타선 선수들에게 공격적인 무엇을 바라기는 어렵다. 그들 역량의 대부분은 수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필이 끝내줘야 해. 그 뒤로 넘어가면 불확실하다고.’
사실 필도 정교한 타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한 방을 기대할 수 있는 힘 있는 타자다. 이럴 때 딱 한 방이면 된다.
딱-
“아!”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려 스윙을 가져간 것까지는 좋았다. 조금 비껴 맞았다. 필도 1루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아쉬운 듯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할 수 없지. 외야플라이면 1점은 들어온 거잖아. 3:0에 원아웃. 주자 1, 2루 나쁘지 않아. 만약 더 이상 점수를 못 낸다고 하더라도 이거면 충분한 점수야. 이제 내가 잘하면 돼.’
사람이 만족을 알아야 한다. 이왕이면 이것도…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무엇을 얻더라도 얻은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이 경기 시작 전에는 1회부터 3:0 리드 같은 스토리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
뜬 공을 향해 달려가던 좌익수가 속도를 줄였다. 보통이라면 그 위치로 공이 날아들면 중견수가 처리한다. 중견수는 달려온 좌익수에게 처리를 양보할 생각이었는지 슬쩍 몸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서로 멈칫하던 순간이 겹쳤다.
짧은 순간 두 명의 외야수가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면서 동작을 멈췄다. 서로 놀라며 다음 동작에 들어가려는 순간에는 이미 공의 낙하를 노바운드로 처리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게 뭐야? 정말 갈 데까지 가는구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에 언더베이스(on the base)를 위해 3루에 붙어있던 주자가 홈으로 황급하게 달려가고, 덩달아 1, 2루 주자도 뛰기 시작했다.
희생플라이가 졸지에 짧은 안타가 되어 버린 꼴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이번 이닝 벌써 세 개째 에러다. 앞에 두 개는 단순한 에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것에는 어떤 변명조차 붙일 수가 없다.
‘헐! 이게 실화냐?’
4득점을 했는데 여전히 노아웃 만루가 유지되고 있다.
“지금 상황은 타점이 인정돼? 이럴 때 기록지에는 뭐라고 쓰는 거야?”
하도 어이없는 상황이 연속되어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로저스도 비슷한 상태라 이런 물음이 나온 것 같다.
“타점 맞아. 외야수 실책이 나왔지만, 어차피 그게 없었어도 외야플라이에 의해 득점이 되었을 거잖아. 타자는 희생플라이 실책으로 출루한 걸로 기록돼.”
야구에 대해서는 진지한 애덤의 답이 나왔지만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로저스도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우리 덕아웃의 선수들은 그냥 웃는다. 점수를 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선수를 환영할 때도 큰소리는 없었다. 파안대소를 터트리진 않지만 가끔 3루쪽 원정 덕아웃을 바라보며 실실거린다. 컵스 선수들의 얼굴은 이제 찡그림이 확연하게 티가 난다.
“우와! 우리 감독 독하네.”
로저스가 속삭였다.
“여기서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 하는 거지. 당연한 걸 가지고…”
애덤은 당연한 듯이 말한다.
7번으로 나온 3루수 테일러가 대놓고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미국으로 온 이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스퀴즈를 하려는 건 처음 보는 장면인 것 같다.
번트하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도 컵스의 수비위치는 그대로다.
“지금 상황으로 번트를 대비한 전진수비는 못 하지. 만약 그랬다가 진짜 번트가 아니고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fake bunt and slash)라면 대량실점의 빌미가 될 수 있어. 그럼 그냥 이 게임 접어야 해. 그냥 번트 대면 1점을 줄 생각인 거야. 아웃카운트를 늘려 이 이닝을 빨리 끝내고 싶을 테지.”
내가 반대 입장이었더라도 지긋지긋하기는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팀이 억지로 더 점수를 낼 필요는 없다.
‘석 점이 나면서 이 경기는 끝났어. 여유 점수가 많아서 나쁠 건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게임에서 3점 이상 줄 것 같지는 않다고.’
7번 테일러와 8번 크로포드의 번트 성공으로 6:0이 되었다. 정말 오늘의 우리 팀은 무엇을 하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타악-
꽤 잘 맞은 타구였지만 유격수 정면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쪽으로 타구가 날아가면 왠지 모를 기대감이 든다. 투아웃이 되었지만 아직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있다. 비록 우리 팀 9번 타자인 유격수 패터슨이 2할에 못 미치는 타율을 가지고 있지만, 1할 타자도 열 번에 한 번은 안타를 친다. 그 한 번이 지금일 수도 있다.
‘오! 잡았네. 그럼 송구미스를 하려고?’
퍽-
유격수의 꽤 빠른 송구가 이번에는 실수 없이 1루수 글러브를 파고들었다.
‘정신이 돌아왔나? 그럼 뭐 하니. 많이 늦은 것 같은데…’
길고 길었던 공격이 드디어 끝났다. 에러 3개와 볼넷 2개를 엮어 1안타를 치고도 6점이나 뽑아냈다.
‘자괴감 오지게 들겠네.’
그라운드에서 플레이할 때는 많은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공격을 위해 덕아웃에 앉아있으면 의도하지 않아도 잡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좋게 말하면 바둑의 복기처럼 잘못된 곳을 찾아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지만 에러는 반성이 안 된다. 후회와 질책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대개 그 끝은 짜증으로 마무리한다.
컵스의 5번 타자가 뭔가 결연해 보이는 눈빛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그래봐야 이제 돌이킬 수가 없어요. 급한 건 니 사정이고 난 이제 아주 편안해요. 눈 깔아라. 나도 이제 다 알았다고.’
덕아웃에서 베그웰에게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상대가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별할 수 있는 구종은 싱커뿐이고, 그것도 낮은 코스 한정이란 말이지.’
싱커 각을 크게 할 때 투구폼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 베그웰이 눈여겨봤지만 바로 찾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바로 찾아질 것 같으면 진작 누구든 알아챘을 거야. 컵스의 눈 밝은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했겠지.’
각 팀의 전력분석을 담당한 수많은 눈들이 그렇게 훑어도 몰랐던 것이라면 정말 아주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당장 수정은 어렵다. 그렇다면 상대가 구별하기 어렵게 던지면 된다. 단순하게 모든 싱커를 스트라이크로 던질 계획이다.
‘코너워크(Corner Work) 왜 하겠어? 상대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보여줘서 특정 코스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하는 거잖아. 그리고 어차피 난 원래도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았다고.’
낮은 쪽을 안 쓴다고 특별히 공이 한곳으로 집중되고 그러지는 않는다. 물론 평소보다는 다양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인코스를 좀 많이 던지면 된다. 장타의 위험 때문에 그렇게 안 던진 건데 6점이라는 안전핀이 생겼다.
좀 전에 덕아웃에서 베그웰과 새로운 투구 플랜을 이야기하다가 지난 내기에서 내가 왜 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 스포츠베팅 분석업체에 따르면 역대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언더독(스포츠에서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이 탑독을 이기는 업셋 발생 확률은 41.6%라고 한다. NBA(32.1%)나 NFL(34.2%)에 비해 훨씬 높다.
기본적으로 야구에서 업셋은 타 종목에 비해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 이것을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운이 승부에 미치는 영향이 타 종목에 비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실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강팀이 약팀에 지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노력, 분석, 이런 것도 양자가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노력하는 자가 이기는 것도 아니다. 결국엔 타 종목과의 승률 차이는 운이 개입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So.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답에 가까운 거야. 니가 어느 쪽을 선택했어도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승률이 5:5에 가까운 어떤 게임이더라도 감정이 개입된 상태에서 선택한다면,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확률로 떨어지게 돼.’
이게 베그웰이 내게 알려준 결론이었다.
동전의 앞뒤를 맞히는 게임에서 무조건 한쪽을 선택하면 50%는 맞게 되지만 맞히려는 의지를 가지고 고르면 맞을 확률이 40%가 된단다. 그 빠지는 10%가 인간이 운과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버그 같은 거라고 한다.
결국 베국웰은 그 내기에서 내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 뒀고, 난 어떻게 선택에도 승패 확률이 5:5에 가까운 게임에서 내 의지와 감정을 따라서 이길 확률을 40%로 만든 거라나 뭐라나…
‘이게 믿겨져? 나도 이해는 잘 안 되는데 한 번 써먹어 보려고. 다 하다 보면 알게 되지 않겠어?’
이미 이 게임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