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디비전 시리즈 (3)
날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있다. 멋있는 말처럼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잘 공감하지 못했는데 역시 인생이 풍족해지려면 다채로운 경험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자라면서 바람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하다. 오늘 나를 살린 건 오라클 파크의 해풍과 오라클파크 우측의 높은 담장이었다.
상대에게는 너무 잘 맞아 오히려 불운을 가져다준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는 7.3m 높이의 벽돌로 만들어진 스탠드 상단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2루 주자는 홈인했지만, 타자 주자는 우익수의 기민한 펜스 플레이에 이은 총알 같은 송구로 2루에서 아웃. 1점을 줬지만 홈런성 타구를 날린 타자주자를 아웃시키고 공수교대면 엄청난 이익을 봤다.
‘카스트로 어깨 죽이네. 거기서 펜스플레이가 되는 걸 보니까 이젠 자이언츠 선수가 다 되었네.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도 되는 거지. 니들 새옹지마라고 들어나 봤어?’
1점 준 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만하면 최악은 면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다 절벽에 난 나무를 붙잡고 살았는데 열 받는다고 손을 놓고 다시 떨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렵더라도 다시 기어 올라가면 된다.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이제 1회일 뿐이다. 1점 줬지만 기분이 상당히 상쾌하다.
‘역시 우리 팀은 내외야 할 것 없이 수비가… 응?’
가벼워진 기분으로 덕아웃에 가려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탭들의 모습이 왠지 부산해 보인다. 어쩐지 지금 그냥 들어가서는 안 될 분위기다.
‘이게 뭐야. 비디오 챌린지 요청이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뭐가 문제인 거야?’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이 안 된다.
“2루 주자의 본헤드 플레이였어.”
갈피를 못 잡고 1루 쪽 라인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베그웰이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뭐?”
“2루 주자의 홈인보다 2루에서 타자 주자의 아웃이 빨랐던 것 같다고.”
원래대로 하자면 타구가 떴을 때 포수 뒤로 달려가 홈송구가 빠질 때를 대비한 백업 역할을 해야 했다. 그곳이 내가 위치해야 할 곳이었다. 하지만 홈런성 타구에 순간적으로 넋을 놓아 돌아서서 2루만 보느라고 그쪽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홈런이든 2루타든 홈송구는 없다란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엉뚱한 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었다. 펜스를 직격한 장타에 2루 주자의 홈인이 늦을 수 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랬어? 2루타성 타구라서 많이 넉넉한…”
하긴 이해할 수 있는 짓을 했다면 본헤드 플레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확실해?”
“정확하지는 않은데 애매한 부분이 있어. 2주 주자가 3루를 돌고 나서는 거의 걷듯이 했다고. 내가 감독에게 말했어. 내 위치에서는 양쪽이 한눈에 보이니까.”
최대한 신중하게 말하려는 것 같은데 베그웰이 이 정도로 표현하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아웃이라면 대박이 난 것이고.
길어봐야 2, 3분 정도의 대기 시간이었을 텐데 아주 길게 느껴졌다. 자꾸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주심이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제기된 문제는 2루 주자의…”
‘결론을 먼저 좀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심판의 챌린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감질난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4배속쯤으로 돌리고 싶은 순간이다.
“아웃.”
다 끝이 있었다. 기다림은 결국 보상을 받았다.
“우와와와.”
주심의 말을 숨죽여 듣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홈경기는 이래서 좋다.
"Oh. YESSSSS."
너무 기뻐서 더 이상의 말이 안 나온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야구팬이라면 모두 안다. 단기전의 속성을…
단기전을 쉽게 이기려면 미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단기전의 실책은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없다. 특히 수비가 그렇지만 이런 본헤드 플레이 역시 곧바로 패배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런 승부엔 경험 많은 고참급 선수기용이 선호된다.
이건 단순한 1점이 아니라 컵스에 암운이 드리워졌다는 징조다. 컵스 선수들은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입었을 거다.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몸이 굳는다.
틱-
우리 팀 첫 타자인 크리스의 타구가 빗맞아 느리게 유격수 앞으로 흘렀다.
유격수의 대시.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유격수의 타구 판단에 작은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대시의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1회 챌린지의 영향인가?’
“어?”
악송구가 나왔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후속 동작만 이루어졌다면 아웃 타이밍이었다. 유격수의 송구에 1루수가 만세를 불렀다.
주루코치의 팔이 크게 돌았다.
“2루… 2루 슬라이딩. 세이프. OK.”
단순한 유격수 앞 땅볼이 되었을 타구가 갑자기 2루타로 변했다.
‘이거 뭐야. 실수가 실수를 부른 건가?’
컵스도 수비가 괜찮았다. 근본적으로 기본 이하의 수비진을 가지고 와일드카드를 얻을 만한 성적을 정규시즌에 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수비진은 포스트시즌에 들어와서도 다저스와의 시리즈에서 굉장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이러면 연결을 안 시키려야 안 시킬 수가 없잖아.’
이런 균열의 원인이 될 만한 사건은 하나뿐이다.
‘큭큭. 내 생각도 이렇게 돌아가는데 컵스 선수들은…’
컵스에서 타임을 부르고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컵스 투수는 지금까지 공 하나를 던졌을 뿐이다. 즉 투수 때문에 감독이 그라운드에 나선 건 아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좀 진정시켜 반전을 노린 흐름 끊기다.
투수는 예민한 존재다. 공 하나 던졌는데 그 공이 빗맞아 실수로 기록되지 않는 유격수의 실수를 유발하고 악송구로 이어졌다. 그걸로 범타를 친 타자는 2루까지 출루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타임. 티를 안 내려 하겠지만, 최소 감정에 기스 정도는 났다. 이건 1선발이 아니라 에이스의 할아버지라도 어쩔 수 없다.
“난리 났네.”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려. 1회에 한 방 맞더니 언덕 위 하얀 집에 갔던 기억이 다시 난 거야?”
로저스 이놈이 버릇없이 막말하는 건 고질이다.
“어허. 이 사람 말이 좀 거칠구만. 오늘 이 중대한 경기의 선발 투수에게 덜 자극적인 말로 좀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어디가 덧나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다니 괘씸한 녀석이다. 선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정신적 안정을 해칠만한 말을 거침없이 하다니 안 될 일이다.
“나한테 성질내지 말고 그걸 저 컵스 놈들에게 좀 쏟으라고. 1회부터 스트레이트 볼넷이 뭐야? 평소 안 하던 바보짓을 하니까 홈런 타구도 나오고 그러는 거잖아.”
“……”
반박을 하고 싶은데 팩트가 기반이라 바로 대응해 뭐라고 말하기가 몹시 어렵다.
“니 말이 맞다고 치자고. 하지만 게임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너의 이런 말이 남은 게임에 도움이 되겠어? 격려와 응원을 먼저하고 욕은 나중에 해야 맞는 거겠지.”
메시지를 반박하기 어렵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이건 기본 테크닉이다. 바둑으로 말하면 정석이고 수학에 비유하면 사칙연산 같은 거다.
“그래. 로저스, 너 말이 너무 심했어. 이런 시기일수록 말을 좀 아껴야지.”
원군의 등장이다. 이건 언제나 일반 대중에게 잘 먹히는 아주 고전적인 수단이다.
“아! 난 괜찮아. 로저스가 어린 마음에 욱해서… 좀 더 잘해보자고 한 말이었을 텐데…”
이럴 땐 이렇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도 그렇지. 선발 투수에게… 로저스 너도 3일 뒤에 선발이잖아. 그때 니가 점수 줬다고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너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잖아. 지금 우리는…”
못마땅한 얼굴을 한 애덤 아저씨의 설교가 제법 길게 이어졌다. 로저스도 그에게는 차마 반발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쨔샤. 말조심해야지. 아무리 친해져도 가릴 건 가리고…’
“애덤.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농담처럼 한 말인데 이렇게 진지하게….”
타악-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소리다.
좌중간을 꿰뚫는 알버트의 2루타가 터졌다. 2루 주자 홈인. 크리스는 미친 듯이 달려 깔끔한 벤트 레그 슬라이딩(bent leg slide)까지 해서 홈을 밟았다.
‘그래. 이게 기본이지. 어떤 팀하고는 많이 다르지.’
어쩌면 의도를 가진 슬라이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보란 듯이 하며 상대로 하여금 실수를 한 번 더 떠올리도록…
‘설마…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런 계산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고의든 아니든 그 장면을 본 모든 컵스 선수들은 전 이닝의 본헤드 플레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무사에 다시 2루다. 타자는 내셔널 리그 타율 1위에 빛나는 베그웰.
‘갑갑하지? 1선발이라더니 별거 없네.’
경기가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다 이렇게 된다. 기세를 탄 팀은 뭘 해도 되고.
“볼.”
틱-
“파울.”
“볼.”
주심이 콜과 함께 손으로 1루를 가리켰다. 결국 볼넷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그에서 가장 정확한 타자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기는 어렵다. 그건 아무리 구위가 뛰어나다고 해도 맞아 나가기 쉽다.
그렇다고 정면승부를 안 할 수는 없지만 빼는 듯 아닌 듯 애매하게 승부를 가져가야 한다. 그런데 상대 투수는 이미 제약이 있었다. 첫 경기의 초반이고 중심타선 앞에 주자를 쌓을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눈 딱 감고 밀어붙였다가 한 방 더 맞으면 끝장이 나버리지.’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볼넷이 나온 것 같다. 베그웰도 끈적하게 물고 늘어졌다. 풀카운트까지 갔다가 나오는 이런 볼넷은 투수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무사에 주자 1, 2루, 이제 4번 레블론 5번 카스토로 6번 필 아저씨로 이어진다. 상대 투수는 점점 더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네. 나도 전 이닝에 그 공이 홈런이 되었으면 아니, 2루타가 되었어도 더 갑갑했겠지. 어쩌겠어. 다 끝이 있다고 투수의 숙명 같은 것인데 이겨 나가야…’
타악-
잘 맞았지만 유격수 정면이다.
“어!”
연속되는 실책이다. 글로브로 못 잡은 것까진 이해한다. 빠른 타구였으니까. 몸으로 잘 막아놓고 떨어뜨린 공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발치에 공을 두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내야안타를 만들어 버렸다. 애매한 구석은 있었지만 내야수가 그 정도는 처리해줘야 한다.
이러면 투수에게 멘붕이 온다. 실투로 안타, 홈런을 맞아도 조금 지나면 투수는 회복을 한다. 예민한 만큼 회복도 빠르다. 그게 안 되는 친구들은 빅리그에 설 수가 없다. 특히 1선발급은 그중 그런 능력이 가장 탁월했던 선수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수비가 이렇게 흔들려버리면 멘탈 회복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