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19화 (119/200)

119화. 디비전 시리즈 (2)

‘2번 타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기존의 분석을 바로 폐기하기는 어렵다. 우연이란 존재가 판단의 시점을 늦추게 만든다. 1번 타자에게 우연하게 일어난 볼 배합일 수도 있으니까. 일반적으로 투수는 변덕쟁이다.

‘난 아주 그런 면에서 예외적이지만.’

기본을 중시하고 편법보다는 정도로 타자를 상대한다. 이런 식의 흔들기나 책략은 99% 베그웰이 꾸민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의 내기도 그의 계략에 넘어간 결과일지 모르겠다. 원래 포수에게는 그런 음흉한 성향이 있다.

‘딱 하나를 모르겠어.’

한 부분만 알면 베그웰의 가면을 벗기고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해석이 안 된다.

‘팀 선택을 두 번 다 내가 먼저 했잖아. 그런데도 결과가… 내가 특정 팀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걸까? 백번 양보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 승패를 알아야 그런 것도 가능한데 현실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닌데 왜 베그웰이 낀 내기만 하면 지게 되는 거지?’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필연이고 세 번은… 벌써 이런 식의 패배가 세 번째다.

‘에고, 말이 헛나왔네. 그럴 리가 없어.’

지게 되어 있는 운명 따위는 없다. 세상의 이치는 노력한 자와 이기려는 갈망이 더 큰 자가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 예는… 음. 얼핏 생각이 잘 안 나지만, 2번 타자부터 잡고 좀 더 생각해보면 답이 있을 거야.’

“볼.”

이번에도 통상적인 볼 배합과 반대로 갔다. 거의 70%에 달하는 내 스트라이크 비율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가진 기본 데이터를 흔들어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의도였었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멀뚱해졌다.

‘항상 계획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지. 일부러 안 친 건가? 좀 두고 보라고 벤치에서 사인이라도 나왔나?’

판단하기 조금 애매해서 비슷한 코스로 하나 더 뺐다. 보통의 경우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로 가져가는 게 지금까지 해왔던 볼 배합이었다.

“볼.”

아직도 반응이 없다. 모르는 척 타자의 행동을 살피며 특이점을 찾았지만, 느긋함 이외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역으로 가는 볼 배합의 약발이 벌써 떨어진 건가? 내친걸음인데 하나 더…’

“볼.”

“헐.”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라는 볼카운트는 아주 오래간만인 것 같다. 언제 그랬는지 기억조차 없다.

‘거참! 일관성 있는 놈이네.’

대단한 참을성이다. 만일 진짜로 무조건 기다리라는 벤치의 지시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빤히 보이는 느린 볼이 예상된 코스에서 얼쩡거리면 참기가 어렵다. 이미 볼 두 개를 참고 보아 왔다면 배트를 내밀만도 한데 다시 참았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라는 볼카운트에 스트라이크 비율 70%, 아웃코스 확률 90%라는 내 투구의 공식을 달달 외웠다면 여기서 결코 참아서는 안 된다.

‘야! 게스 히팅 몰라? 너 내 경기당 볼넷이 몇 개인지는 알아? 이거 꽉 막힌 놈이네.’

메이저리그에서 내가 이제껏 준 볼넷 숫자를 9이닝당으로 환산하면 한 개가 채 안 된다. 그래서 나에게 볼넷을 의도적으로 기대하는 타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내 투구 내용 중 가장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볼넷이다.

한동안 내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저 볼넷 허용 투수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를 너무 무시한 생각이었다.

‘오래되다 보니까 별별 선수가 다 있더라고.’

2000년대 이후로 좁혀도 2005년 트윈스의 카를로스 실바는 188이닝을 던지며 9이닝당 볼넷(BB/9)을 0.43개만 줬다.

‘좀 오래된 기록은 200이닝을 넘게 던지면서 9이닝당 0.23개를 기록한 투수가 있던데 난 새 발의 피지. 내가 그런 기록에 어떻게 감히 비빌 수 있겠어.’

어쨌든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는 내게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었다.

‘응? 그래?’

베그웰에서 적절하다 싶은 타이밍에 슬라이더를 던지라는 사인이 나왔다. 그런데 스트라이크를 던지라는 사인이 아니다.

‘이제 구종을 바꿀 때가 되긴 했지. 싱커를 세 개 연속해서 던졌는데 또 던지기는 좀 많이 그렇지. 그건 OK. 그런데 또 볼을 던지라고?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스트레이트 볼넷을 준 적이 있었나?’

고의사구를 내준 적도 한 번 없는데 이건 좀 기분 나쁜 요구다. 너무 요행수를 바라는 볼 배합인 것 같기도 하고 많이 찝찝하다.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스트라이크.”

드디어 타자의 첫 스윙을 보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하지만 감정과는 다른 이성의 촉이 발동되어 버렸다.

‘왜 배트가 나왔지? 그렇게 스트라이크처럼 보였나? 아니면, 꼭 내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국에서는 3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배팅하는 놈은 팀배팅을 모르는 놈이라고 했던 프로팀 감독이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3볼의 경우 투수가 쫓기는 카운터이기 때문에 다음 공은 거의 반드시 가운데에 가까운 스트라이크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배팅 찬스라고 한다. 물론 양국 리그 다 그 반대의견을 가진 쪽도 존재한다. 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과 대처가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릴 수도 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혼자 머리에 열날 때까지 생각했지만, 결론이 모르겠다로 끝나다니 너무 허망하다.

‘에이, 몰라. 내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었어. 이런 건 원래 잘하는 베그웰에게 맡기는 게 속 편해. 계속 하던 놈이 잘하는 거지.’

나의 모토인 심플 라이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응? 싱커를 또 빼라고? 이거 뭐 하자는 거야. 진짜 볼넷을 주겠다 이건가? 아니지. 볼카운트가 달라졌는데 이번엔 배트가 끌려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냥 던지라는 대로 던지면 되지. 뭘 복잡하게 생각하려고 해.’

“볼.”

타자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볼넷 출루. 이쯤 되니까 나도 이상하다는 게 느껴진다.

‘쿠세가 있었나?’

쿠세(癖, 버릇 벽)는 일본어에서 비롯되었지만, 야구에서 습관적 행동 같은 것을 지칭할 때 흔히 쓰였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쿠세라는 단어가 클리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던데 생각해보면 그럴듯하다.

‘미국에서는 루틴이 드러났다라는 표현을 쓰던데… 티핑 피처스(Tipping pitchers)라고 하기도 하고.’

이번 타자를 향해 던진 5개의 공을 구종 별로 생각해보면 싱커 넷에 슬라이더 하나였다. 스윙이 이루어진 건 슬라이더 하나 싱커에 대해 타자는 전혀 스윙하려고 들지 않았었다.

‘그건 전 타자도… 아니야. 마지막 싱커에 스윙… 음. 스윙하려고만 했었지. 그건 스트라이크여서 그랬던 건가?’

레전드인 카를로스 벨트란은 투수의 손목과 글러브의 각도 차이를 보고 구종을 기가 막히게 읽어 내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일반적으로는 안 보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보이는 그 무엇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내 생각의 방향을 너무 일방적으로 끼워 맞추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걱정스럽다.

내가 던지는 공의 반 이상이 싱커다. 조금씩 구질과 구속을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공이다. 진짜 내게서 뭔가를 보고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주력 구종을 던지는 데 제한이 생긴다면 난 평균 이하의 투수일 수밖에 없다.

슬쩍 베그웰의 눈을 찾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만 보고는 모르겠다. 이럴 때 타임 같은 걸 불러서 괜히 티 낼 필요는 없다.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고 결정적일 때 뒤통수를 때리는 전략도 있을 수 있으니까. 나도 느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이번 타자에게 한 볼 배합을 보면 쟤가 먼저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볼을 계속 던지라고 한 건 수위를 재어 본 건가?’

이럴 때 베그웰의 존재는 의지가 된다. 혼자서 이런 장면을 맞닥트렸다면 머리 좀 아팠을 것 같다. 이럴 때 난 머리를 비우면 된다. 베그웰이 하라는 대로 해서 결과가 나빴던 적은 없었다.

1사 1루에서 3번 타자가 나왔다.

‘자! 뭘 던질까? 빨리 주문을 해 봐.’

‘응? 슬라이더? 초구부터? 아! 내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겠다고. 그냥 던져.’

틱-

타자가 초구부터 세게 돌린다.

“파울.”

다시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다. 초구는 스트라이크였지만 이번에는 더 바깥으로 달아나는 공이다.

“스트라익.”

가볍게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슬라이더에는 시원하게 배트가 딸려 나온다. 유인이 된다.

‘그런 거라면 슬라이더를 하나 더… 가 아니네.’

베그웰은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느린 싱커를 요구해 왔다. 이 구질은 일반 투수의 커브와 비슷한 궤적을 가진다. 첫 타자에게도 위닝 샷으로 던졌었다.

“스트라익. 배터아웃.”

‘어? 이게 뭐지?’

첫 타자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움찔만 하고 배트를 내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스트라이크 존의 하단에 안착한 공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타자의 반응으로 판단하자면 그들이 처음에 가지고 나온 전략이 수정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어떨 때는 스윙을 하고 지금은 안 할까?

‘싱커에 대해서는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별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런 게 아닌가?’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했었다면 루킹 삼진을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아웃이 될 거라면 당연히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 그래야 출루에 대한 작은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다. 공을 맞혀서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야 실책과 같은 변수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만들어진다.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상대 타자들의 스윙 기준이 나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것 같다. 하지만 투아웃을 잡았다.

‘궁금한 건 이번 이닝 마치고 물어보면 되겠지. 일단 공 던지는 데 집중해야 돼. 음. 다시 느린 싱커 OK.'

“스트라익.”

‘헉. 2루 도루?’

앞 타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주자가 뛰는 걸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동안 빠른 공을 하나도 안 던졌더니 주자가 초구부터 가차 없이 2루로 돌진해 버렸다. 베그웰은 2루로 던지지도 못했다.

‘좌타자에 투아웃. 조심했어야 하는데…’

딱 도루의 타이밍이었다. 좌타자의 타석에서는 포수가 1루 주자의 움직임을 보는 데 제약이 생긴다. 거기다 빠른 주자. 내가 견제구라도 몇 개 던졌어야 했다.

1회부터 2사 2루 타자는 상대 팀의 4번이다.

‘제법 끈적하게 나오네. 이렇게 다저스를 이긴 거였어?’

확실히 중계로 경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도루? 기분이 좀 나빠서 그렇지 별 상관없어. 어차피 안타를 못 치면 득점이 안 돼요. 니들 헛심 쓴 거다.’

타자만 잡으면 모든 일이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렇지. 마음에 딱 드네. 이제껏 패스트볼을 하나도 안 던졌는데 딱 적당한 타이밍이야. 의외성이 중요하지.’

타악-

타자의 배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코스 높은 볼을 잡아당겼다.

‘헐! 이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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